괴상한 시뮬레이터 열풍은 올해도 이어진다
게임메카 서형걸 기자
2021.01.04 16:36
염소 시뮬레이터로 시작된 ‘괴상망측한 시뮬레이터’ 열풍은 거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언타이틀드 구스 게임’으로 정점을 찍었다. 작은 거위 한 마리가 평화로운 마을을 발칵 뒤집어놓는 과정을 그린 이 게임은 지난 2019년, 주요 ‘올해의 게임(GOTY)’ 시상식 5개 중 2개를 석권했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현재 게이머들은 ‘거위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독특한 콘셉트의 시뮬레이터 전성시대는 올해도 이어진다. 예년보다 많은 수의 게임이 대기하고 있는데, 빵과 고양이, 그리고 교황과 예수까지. 스크린샷만 한 장만 봐도 감탄사가 나오는 2021년 시뮬레이터 기대작을 살펴보자.
“누군가 시뮬레이터의 미래를 묻는다면 플레이웨이를 보게 하라”
커피 스테인 스튜디오는 염소 시뮬레이터 개발사로 유명하지만, 현재는 초심을 잃었다. ‘새티스팩토리’라는 이름의 지극히 멀쩡한 공장 건설-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들며 정상 게임의 세계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초지일관 독특한 시뮬레이터를 고수하는 장인이 있으니, 바로 플레이웨이다. 2021년에도 플레이웨이는 다수의 시뮬레이터를 선보일 예정이다.
그 중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는 게임은 전세계 25억 명(2020년 기준)이 믿는 종교의 창시자를 주인공으로 한 ‘아이 앰 지저스 크라이스트’다. 일명 ‘예수 시뮬레이터’라 불리는 이 게임은 세밀한 원작(성경) 고증이 특징이다. 요셉과 성모 마리아가 하늘의 계시를 받는 것부터 장성한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기적을 행한 다음, 모함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다음 부활하는 것까지 예수의 전 생애를 체험할 수 있다.
철저한 원작 고증을 내세운 만큼 사탄과 맞서 싸우는 모습은 이미 영상을 통해 확인된 바 있으며, 채찍으로 신성모독을 일삼는 이들을 내쫓는 일명 ‘물리적 천벌’까지 구현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엄격·근엄·진지한 콘셉트 덕분에 오히려 웃음이 나오는 이 게임의 유일한 단점은 제목 자체가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주인공이 죽었다가 부활해 승천한다는 반전이 있는데, 출시 2,000여 년 전부터 주요 시나리오가 다 유포됐다.
예수의 삶을 체험했다면, 그를 섬기는 성직자의 삶도 누려봐야 한다. 바로 ‘교황 시뮬레이터’라 할 수 있는 ‘더 포프: 파워 앤 신’이 그것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 테라스에서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전부로 보이는 교황의 삶이 뭐가 재미있냐고 할 수 있지만, 이 게임에 등장하는 교황의 모티브가 된 이는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황'임과 동시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치력을 뽐냈던 알렉산데르 6세다.
정적에게 이단이라는 누명을 씌워 화형에 처하는 것은 기본이다. 독을 탄 음료를 마시게 하거나, 암살자를 보내 등 뒤에 칼을 꽂는 것은 물론, 아예 군대를 일으켜 가문 자체를 멸문지화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요직에는 가족들(심지어 자녀까지!)을 앉히고, 천국으로 향하는 급행티켓인 면죄부를 팔아 부를 축적하는 등 각종 부정부패를 모두 행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사탄도 울고 갈 만한 성직자다.
이런 사악한 교황에게 추천해줄 만한 게임도 출시 예정이다. ‘헬 아키텍트’는 말 그대로 지옥 건설·경영 시뮬레이터다. 지옥의 죄수들을 노동력과 고통을 자원 삼아 보다 더 크고 활기찬 지옥을 만드는 것이 플레이어의 목표다. 한가지 유의할 점은 죄수들에게 채찍뿐 아니라 당근도 선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죄수들에게 고통만 계속 가하면 이를 견디지 못하고 일찍 회개해 버려 지옥을 떠난다. 지옥의 장기적 발전을 생각한다면, 가혹한 형벌과 함께 어르고 달래는 것도 필수다. 안타깝게도 지원언어에 한국어가 없다는 것이 단점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시뮬레이터들이 플레이웨이를 통해 발매 예정이다. ‘콘트라밴드 폴리스’는 공산주의 국가의 국경을 지키는 경찰관이 되어 밀수품 운반업자를 단속하는 게임인데, 나라에 망조가 들었는지 밀수품이 없는 차량을 세는 것이 더 빠를 지경이다. 예리한 눈썰미로 증빙서류를 세심히 살피고, 각종 도구를 이용해 밀수품을 적발해야 한다. 뭐, 큰 문제를 일으킬 물건이 아니라면 소정의 뇌물을 받고 눈 감아 주는 것도 괜찮다. 역시 영어만 지원한다는 점이 조금 아쉬운 부분.
다음은 폐선 시뮬레이션 게임 ‘쉽 그레이브야드 시뮬레이터’다. 플레이어는 12km나 되는 긴 해변에 위치한 세계 최대의 폐선장에서 일하며, 거대한 선박들을 해체해야 한다. 망치, 톱, 용접기 등 다양한 장비를 활용할 수 있으며, 뜯어낸 잔해를 팔아 돈을 벌어 보유한 장비를 업그레이드 하는 것도 가능하다. 선박해체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위험한 작업 중 하나인데, 게임에서도 부주의하게 용접기를 사용하다 폭발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수 있으니 유의하자.
마지막으로 하라는 요리는 안하고 재료와 도구로 각종 장난을 치게 되는 쿠킹 시뮬레이터가 VR로 나온다. 쿠킹 시뮬레이터 VR은 본래 2020년 4분기 내에 나올 예정이었지만, 올해 1분기로 연기됐다. 키보드와 마우스, 또는 게임패드 대신, 두 손으로 직접 요리를 할 수 있게 됐는데, 맛있는 음식보다도 얼마나 대단한 난장판이 벌어질지 기대된다. 예수 시뮬레이터, 교황 시뮬레이터, 그리고 폐선 시뮬레이터와 마찬가지로 한국어를 지원한다
서전 시뮬레이터 2로 구긴 자존심, 생선으로 명예회복한다
‘서전 시뮬레이터’, ‘나는 빵이다’ 등으로 유명한 보싸 스튜디오도 독특한 시뮬레이터 장인이라 할 수 있다. 보싸 스튜디오는 2020년에 서전 시뮬레이터 2를 발매했는데, 달라진 시스템과 멀티플레이에 치중한 콘텐츠로 1편에 비해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시뮬레이터 외길 인생은 포기하지 않았는데, 올해에는 ‘나는 빵이다’ 후속작이라 할 수 있는 ‘아이 앰 피시’를 출시할 예정이다.
나는 빵이다가 맛있게 구워지기 위해 네 모서리를 움직이며 각종 장애물을 뛰어넘는 식빵의 눈물겨운 사투를 그렸다면, 아이 앰 피시는 자유를 찾아 어항째로 탈출을 감행한 물고기의 사투를 그린다. 주택가 배관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어항을 굴리는 물고기의 모습을 보면 심장이 떨릴 정도다. 어항이 꽤 튼튼해 잘만 굴러간다면 깨지지 않지만, 방심하는 순간 산산이 부숴져 물고기도 절명하니 조심해야 한다.
서기장 동무나 고양이도 되어 보자
플레이웨이와 보싸 스튜디오, 두 양대 산맥의 시뮬레이터 외에도 눈 여겨 볼만한 게임이 있다. 우선 중국의 작은 게임사 레니움 스튜디오(Rhenium Studio)가 만들고 있는 턴제 국가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 소비에트 시뮬레이터를 살펴보자.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1922년 12월 30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최고 지도자가 되어 국가를 발전시키고 나치 독일과 맞서 싸워야 한다. 1922년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집권한 해인데, 한마디로 이 게임은 ‘스탈린 시뮬레이터’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슬로건이 ‘소련을 다시금 위대하게!’라는 점에서 절대 평범한 시뮬레이션 게임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은 올해 봄 출시 예정인 고양이 시뮬레이터: 야옹(Cat Simulator: Meow)이다. 작고 귀여운 야생 고양이가 되어 오픈월드 필드를 탐험하고, 개 또는 양과 결투를 하고 쥐, 닭 등을 사냥하는 등 말 그대로 고양이의 삶을 체험하는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앞서 언급한 게임에 비해서는 여러모로 평범해 보이지만,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최고의 기대작 아닐까 한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게임에 대한 애정과 흥미를 기사에 담아내고 싶습니다.laridae@gamemec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