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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을 막지 못한 방패, 데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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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RM 보안 프로그램 '데누보'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프로그램을 보호하는 락(Lock)과 이를 부수는 크래킹(Cracking)은 흔히 창과 방패의 싸움에 비유된다. 빛이 비치면 자연히 그림자가 지듯 게임 산업이 태동한 이래 불법복제에 시달리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다. 처음에는 조잡한 모조품 팩을 만드는 수준이었으나, 점차 시장이 커짐에 따라 보안을 파훼하고 프로그램 변조하는 전문 그룹이 탄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창이 날카로워지는 동안 방패도 가만있진 않았다. 초창기 콘솔부터 각종 복제방지책이 꾸준히 탑재됐으며 디지털 다운로드가 활성화된 오늘날에는 DRM(Digital Rights Management, 디지털 저작권 관리)이 대세로 떠올랐다. 여기에 DRM을 보호하는 2중 잠금 장치, 이른바 ‘최강의 방패’라는 데누보(Denuvo)까지 등장했다.

2014년 9월 ‘피파 15’로 데뷔전을 치른 데누보는 곧장 전세계 게이머의 주목을 받았다. 일반적인 DRM이 신작 출시 후 단 하루도 버텨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수 개월간 선방했기 때문. 결국에는 유명 크랙 그룹 3DM에게 무력화됐지만, 출시 초기에 매출 대부분이 발생하는 게임 특성상 이미 데누보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스스로 가치를 입증한 데누보는 더욱 많은 게임에 기용되기 시작했다. 성능도 날로 향상되어 2016년 초 ‘라이즈 오브 더 툼레이더’에 이르러선 3DM이 크래킹을 포기해 큰 화제를 모았다. 드디어 방패가 승리했다며 도처에서 기사가 쏟아졌고, 불법복제에 시달리던 업계와 게이머가 환호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승리의 전율은 오래가지 못했다.

곧 CONSPIR4CY, MKDEV 등 여러 크랙 그룹이 와신상담하여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이들은 새로운 수법을 동원해 한차례 포기했던 ‘저스트 코즈 3’ 등을 크래킹했으며 캡콤이 자랑하던 ‘바이오하자드 7’조차 일주일도 안돼 무력화시켰다. 데누보측은 당장 버전 업그레이드로 취약점을 틀어막았지만 크랙 그룹이 칼자루를 쥔 것은 자명해 보인다.

‘바이오하자드 7’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니어 오토마타’와 ‘프레이’ 등 최신게임이 연달아 뚫렸다. 가장 최근 사례는 이번 달 들어서 불과 4일만에 보안 해제된 ‘철권 7’. 이래서는 최대한 시간을 끌며 출시 초기의 매출을 보호한다는 데누보의 존재 가치가 유명무실해진다. 드디어 끝이 보이나 싶던 창과 방패의 싸움도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창의 맹공 앞에 영원불멸한 보안은 허상으로 전락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일부의 탐욕과 기술을 과시하고픈 크랙 그룹의 호승심이 만나 빚어낸 일그러진 세태. 불법복제가 기승을 부릴수록 업계는 보안에 과도한 지출을 해야 하고 게이머도 불편한 절차들을 감수해야 한다. 시장 위축으로 인한 피해는 돌고 돌아 불법복제 사용자에게까지 이르기 마련이다.

‘철권 7’에 적용된 최신 데누보가 파훼된 지 일주일이 흘렀다. 데누보측이 극적인 해결책을 들고나올지, 아니면 장차 다른 보안 프로그램이 대두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확실한 점은 창이 포기하지 않듯 방패가 완전히 파괴되는 일도 없으리란 것. 더 많은 게임이 크랙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방패의 반격이 시작되길 바라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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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기자 기사 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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