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생활 속 오타쿠 코드 1부: 생활 속 오타쿠 코드 - 미디어 편 |
들어가며: 미디어와 오타쿠적 요소의 교차점
▲ 자료 화면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이 글을 보고 있는 분들 중 게임과 애니메이션에 취미를 가지신 분 - 편의상 ‘오타쿠’내지는 ‘오덕’으로 합시다 - 이 꽤 있을 거라 믿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이런 취미를 가진 사람들은 이 사실이 남에게 알려지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죠. 주위의 안 좋은 시선 때문입니다. '아직도 만화영화나 보고 앉아 있냐' 는 그 질타를 안 받아 보신 분은 거의 없을 겁니다. 한국에서 애니를 보고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어찌 보면 동성애자보다 더 박해받는 소수자인 것이죠.
▲ W...WTH?
상황이 이러하니 미디어에서 비치는 '오타쿠' 들은 사회부적응자,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와 동일한 의미로(사실 따지고 보면 차이가 존재하나) 취급됩니다. 신기한 건 그러면서도 미디어에서는 애니와 게임의 OST를 쓰고, 대놓고 이런 음악을 표절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디어에는 애니메이션과 게임의 캐릭터들이 느닷없이 나오는 일이 종종 생깁니다. 제작자 중에 '오타쿠'가 많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은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어쩌면, 겉으로는 오타쿠들을 안 좋게 보면서 정작 컨텐츠에서는 오타쿠적 요소를 떼어놓을 수가 없다는 것 아닐까요? 이 '오타쿠코드' 에서는 이러한 미디어와 '오타쿠적 요소'가 만나는 교차점을 하나씩 되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보는 TV에 삽입된 오타쿠 코드
라디오를 듣다가 자신이 아는 노래가 우연히 나오면 기분이 좋지 않습니까? 특히나 그 노래가 팝송이나 잘 알려지지 않은 가요처럼 마이너 하다면 더더욱 그렇겠죠. 그렇다면 TV에서 내가 아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의 한 장면이 나온다면 어떨까요? 라디오에서 덜 대중적인 음악을 들었을 때처럼 기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방송에 '그런 것' 들을 감히 집어넣을 생각을 한 그 사람들은 대체 누구일까요. 그전에, TV에 나온 애니메이션/게임의 캐릭터들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한번 볼 일입니다.
▲ 자세히 보면 한글 번역까지 되어 있다
위 사진은 2007년 7월부터 9월까지 MBC에서 방영되었던 야구 드라마 '9회말 2아웃'의 한 장면입니다. 노처녀 홍난희(수애)와 난희의 소꿉친구 변형태(이정진)가 동거를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지요. 07년 7월 22일 방영분에서 형태가 난희가 일하는 회사에 들릅니다. 난희는 이 작은 출판사에서 만화를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형태가 책상에 늘어진 만화를 집어서 봅니다. 그가 집은 그 만화는 성인만화였고, 이 만화를 본 형태는 그녀가 이런 만화를 번역한다는 사실을 알고 곧 분위기가 어색해 집니다. 형태가 봤던 이 만화는 '유이샵'의 성인만화와, 동인팀 '사이가도'의 동인지입니다. ('유리와 친구들'아시나요? 그게 사이가도의 동인지입니다) 따지고 보면 형태가 성인만화를 보고 당황해야 했기 때문에, 여기서 유이샵의 만화가 나온 것은 나름 적절했습니다. 만약 유이샵이 아니었다면, 또 다른 성인만화가 나왔을 것입니다.
▲ 적절한 그림으로 보이지만
이번에는 동 방송사의 교양오락프로그램 '도전! 예의지왕'입니다. (07년 12월 21일 방송분) 회사 예절에 대한 상황극을 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돌발상황에 대한 다양한 반응을 담은 버리이어티 프로그램입니다. 여기서 김흥국 씨는 '누나손'이라는 제품을 소개하는 프리젠테이션을 했는데, 문제는 그가 족자를 넘겼을 때였습니다. '누나손'의 기능 중에 연인과 헤어질 때 쓰는 '싸대기 기능'이 있었던 겁니다.
▲ 실은 미소녀 게임 'myself;yourself' 의 한 장면!
'싸대기 기능'에서 삽입된 이 그림은 일본 미소녀 게임 제작사인 5pb(‘메모리즈 오프’ 시리즈로 유명한 KID의 개발진이 모인 팀)의 게임'myself;yourself'의 CG였습니다. 연인에게 날리는 싸대기를 설명하는 데는 이만한 그림이 또 없을 테니, 탁월한 제작진의 센스를 볼 수 있었습니다.
▲ 무려 교육방송에 출연한 랜서
이런 출연은 오락프로그램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디에도 등장합니다. 심지어 EBS의 프로그램에도. '우리말 나들이'에서 '꽝조사'라는 단어를 설명할 때였습니다. (꽝조사: 낚시를 가서 고기를 꽝치고 돌아오는 낚시꾼) 꽝조사에 대한 예문과 자료화면이 나오는데, 보시다시피 이 그림은 저 유명한 미소녀 게임인 'Fate hollow atraxia' 의 CG입니다. 랜서가 낚시를 하는 CG를 절묘하게 꽝조사와 결합시킨거죠.
물론 만화나 게임의 한 장면이 달랑 나오는 수준이 아닌, 대놓고 소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SBS의 영화소개프로그램 '접속 무비월드'는 코너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에서 애니메이션 '쓰르라미 울적에'를 거론했습니다.
▲ 이 정도면 제작진이 애니메이션에 상당한 소양이 있다고 봐야 한다.
영화 '극락도 살인사건'과의 유사점을 논하면서 말입니다. 방송에서는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한 점, 마을 사람들이 살인사건을 신의 저주라 믿는 점이 극락도와 쓰르라미의 유사점으로 제시되었죠. 이후 각 작품에 치명적인 사실이 발설(=스포일러)되어 볼 기분을 떨어지게 했지만, 공통점을 제대로 잡아내기는 했습니다. 애초에 타겟이 ‘극락도 살인사건'과와 유사한 작품이었으니 여기서 '쓰르라미 울 적에' 말고 다른 것이 나오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필요성이나 전체적인 맥락과도 관계없는, 생뚱맞게 등장한 애니와 게임의 캐릭터들도 있습니다. 현재는 '폭소클럽2'에 밀려 없어진, KBS의 '웃음충전소'라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 프로그램 중 '풀하우스'라는 코너는, 단칸방에 사는 가족이라는 설정으로 진행되는 콩트였지요.
그런데 고시생인 아들이 붙박이 신발장에서 튀어나올때, 붙박이장에 붙어있는 그림을 봅시다. 미소녀 게임 'Kanon'의 히로인 '사와타리 마코토'가 보이는군요. 저게 꼭 저기에 붙어있어야 하는건지 의문입니다. 있으나 마나 아무런 지장이 없는 건데 말이죠.
▲ 대체 이 캐릭터는 왜 나온 걸까?
스펀지의 '보드레 공주'도 별 의미없는 등장이었습니다. 이 방송은 제작되지 못한 '로보트 태권 V'의 줄거리를 알려주는 내용이었죠. 제작되지 못한 시리즈므로 원본 필름이 남아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그래서 스펀지 제작진은 피규어를 대역으로 사용하여, 그 내용을 재구성하였습니다. '투하트'의 호시나 토모코가 '영희'를, '오네가이 티쳐'의 '미즈호' 가 납치된 과학자를 대신하여 나왔죠. 그 중 압권은 '기동전사 건담 SeeD'의 '라크스 클라인'이 '보드레 공주'로 분한것이 아닐까 합니다. '건담시드'와 '태권V'가 같은 로봇물이라는 것 말고는 별 연관을 찾을 수가 없네요. (자세한 그림은 여기를 클릭)
▲ '축 아무로 레이 경성대 합격'
캐릭터도 나오지 않고서 오타쿠들의 이목을 끈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KBS드라마 '경성스캔들'의 한 장면입니다. 등장인물 뒤의 배경에 현수막 하나가 걸려있습니다. 일제시대의 글씨니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보면 '아무로 레이 경성대 합격' 이라는 말이 됩니다. '아무로 레이'는 기동전사 건담의 주인공입니다. 그가 시간을 뛰어 넘어 조선에 와야 했던 이유가 있을까요? 그것보다 그의 경성대 합격을 축하해주는 사람들이 더 신기하네요. 역시 영웅은 어디를 가도 영웅인가 봅니다.
반면 무한도전 일본편(07년 9월 29일)은 사정이 다릅니다. 무한도전의 멤버들이 일본에 가서 자신들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나 찾아보는 방송이었죠. 문제는 이들이 맨 처음 간 곳이 '오타쿠의 천국'(그러나 자막에는 일본 최대의 전자상가) 아키하바라였습니다. 이곳에서 일본 코미디언도 아닌 한국 코미디언을 아는 일본인이 있을 리가 없지요. 무도 멤버들이 낙담하고 있을 때, 카메라에 비친 것은 코스프레를 한 오타쿠였습니다.
그들을 보여주며 '일본 오니 돌+아이는 오히려 평범' 라는 자막이 붙었지요. 노홍철(돌+아이) 보다 더하다는 겁니다. 코스프레 자체가 그리 익숙한 문화는 아니지만, 이건 제작진이 의도한 게 아닌 자연스럽게 터진 상황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편집하지 않은 것이 제작진의 의도라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그러나 방송에 나온 캐릭터들을 의미있는 / 없는 것으로 나누는 것은 애초부터가 무의미합니다. 어짜피 일반 시청자들이 볼때는 그런 것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오직 오타쿠만이 이런 캐릭터들을 보고서 의식할 수 있습니다. 즉,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것이죠. 몰라도 보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지극히 세부적인 요소를 가지고 오타쿠들만 반가워(?) 하는 것입니다.
▲ 방송계에 오타쿠가 한 둘이 아닌듯
마지막으로 무릎팍도사 - 김수로편을 봅시다. 방송 초반에 무릎팍이 재미없다고 하는 가짜 제보가 몇 개 나옵니다. '무릎팍도사'의 PD는 이 제보에 대하여 항변을 하는데, PD가 쓴 가명은 '독고건담' 이었습니다. 더군다나 PD의 뒤에는 건담 피규어가 있었구요. PD가 대놓고 건담오타쿠(건타쿠)라고 '커밍아웃'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치며
중요한 건 바로 이겁니다. 방송국의 제작자중에는 오타쿠가 상당수 있다는 거지요. 일개 스탭부터 한 프로그램의 PD까지 말입니다. 이들이 방송현장에서 일하면서 재미로 넣어주는 이 캐릭터들을, 오타쿠들은 용케도 발견하여 웃고 즐깁니다. 만드는 사람도 오타쿠, 발견하는 사람도 오타쿠. 어쩌면 방송국의 오타쿠들은 시청자들에게 ‘서브리미널 메시지’를 보내는게 아닐까 합니다. 자신과 같은 오타쿠들을 찾기 위해서 말이지요.
글/그림: 수시아 (http://docean.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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