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개발자 김태곤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한국형 역사게임의 선구자' 정도다. 사실 고리타분하고 딱딱하다. 뭔가 게임개발자라면 더 신이 나고 흥미진진한 표현이 필요한데, 아쉽게도 그에게는 그런 식의 이미지가 없다.
충분히 그럴만하다. 지난 21년 동안 '역사게임'이라는 한우물만 파왔으니 그 이미지가 오죽할까. 전략 시뮬레이션부터 시작해 MMORPG, 그리고 최근에는 모바일까지. 여러 장르와 플랫폼을 거쳤지만, 이에 상관없이 그는 역사를 기반으로 한 게임만을 만들었다. 현재 개발 중인 모바일게임 [영웅의군단] 역시 세계사를 다루고 있다. 시장 주류와 거리가 있는 만큼, 결과적으로 그는 게이머들에게 친숙한 개발자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김태곤이 걸어온 길은 충분히 존경받을만하다는 데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는 게임을 통해 재미는 물론 역사의 교훈을 모두 담으려 했고, 더 나아가 게임개발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부분에까지 힘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알면 알수록 낯설지 않은 이 남자, 게임개발자 김태곤의 이야기는 바로 이렇게 시작해야 할 거 같다.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바로가기]
▲ 김태곤 현 엔도어즈 상무
모범소년, 게임을 만나다
모범소년. 어린 시절 김태곤은 바로 이 한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 그만큼 그는 지금의 정직한 이미지에 부합하는 전형적인 '범생이' 스타일이었다. 부모나 교사의 말에 위반하는 일도 없었다. 학업에 집중했던 만큼 성적은 좋았고, 당시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이 그러했듯 장래희망은 '과학자' 정도의 우등한 꿈을 적어냈다.
이런 모범소년이 처음 게임을 만난 것은 동네 오락실이었다. 80년대 중반, 국내에도 서서히 오락실이 들어섰는데 소년 김태곤도 여기서 게임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러나 당시에도 오락실의 사회적 인식은 좋지 못했다. 청소년이 들어가면 안 되는 '불법업소'라는 인식이 컸다. 모범소년은 [갤러그] 같은 게임이 너무 재미있었지만, 가면 안 된다는 스스로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출입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태곤과 게임의 달콤한 인연은 '컴퓨터'를 통해 계속 이어졌다. 고등학교 시절, 김태곤은 일주일에 한 번 컴퓨터 수업을 받았는데 이게 너무 재미있었다. 결국 그는 '공부'를 하겠다며 부모를 졸랐고, 그렇게 해서 8비트 MSX 규격의 개인 컴퓨터를 갖게 된다. 이후 그는 컴퓨터로 베이직 등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결국 최고의 관심 분야는 게임으로 한정됐다. '불법업소'로 여겨지던 오락실을 가지 않고도 집에서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건 그에게 무척 행복한 일이었다. 대신 모범소년답게 평일에는 학업에 열중하고 주말에만 게임을 즐겼다.
당시의 MSX 규격 컴퓨터는 일본에서 파생된 만큼, 당연히 일본식 게임이 많았다. 이에 김태곤은 자연스럽게 여기에 영향을 받았는데, 가벼운 게임보다 상대적으로 무거운 게임을 더 좋아했다. 그가 기억하는 첫 게임 역시 불교 시대를 배경으로 한 RPG [간다라]였다. RPG의 전형적인 문법만 갖춘 그런 게임이었지만, 당시 김태곤의 눈에는 굉장히 파격적이고 근사해 보였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다양한 일본식 RPG를 접하게 된다. 주말에만 게임을 즐겼던 관계로 일주일 동안의 기다림은 궁금증을 더해 게임의 재미를 더 증폭시켰다.
이후 1991년, 김태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전공의 경우 뭔가 커다란 목표가 있었다기보다, 당시 이공계가 인기가 높아 그 역시 자연스레 이쪽을 선택한 케이스다.
▲ 김태곤이 기억하는 [간다라]는 불교 세계관을 다룬 꽤나 독특한 RPG 중 하나였다
김태곤과 아이들, 그리고 실패한 첫 게임개발
대학에 입학했지만, 김태곤은 학교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아니 못했다는 표현보다는 '안 했다'가 적합할 거 같다. 고교시절까지 워낙 규정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었던 만큼, 대학시절의 자유로움은 그의 내면에 '변화'를 일깨우기 충분했다. 결국 그는 1학년부터 여행을 다니거나 평소 못한 게임을 잔뜩 해보는 등 처음으로 찾아온 자유를 만끽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소위 말하는 '나쁜 짓'은 하지 않았지만, 그만의 '일탈'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1년을 놀다 보니 그는 무심코 한 가지를 깨닫는다. 모든 걸 비우면 결국 채울 것을 찾게 된다, 라는 인생사 진리였다. 이에 김태곤은 2학년부터 서서히 '무엇으로 채울까'에 대한 고민을 했는데, 가장 강렬한 충동은 '게임개발'이었다. 게임을 좋아한데다 그 심오함과 깊이에 관심이 있었던 만큼, 손수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명분도 뒷받침됐다. 전자공학은 하드웨어 산업과 연관돼 있지만 C언어 같은 소프트웨어가 어느 정도 뒷받침돼야 했고, 신문 같은 미디어에서는 이제 곧 멀티미디어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한창 떠들어대고 있었다. 고민 끝에 그는 자신의 신념과 시대흐름에 몸을 맡기기로 한다. 게임을 만들며 공부하면 후에 진로를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도 있었다. 결국 김태곤은 학교를 휴학하고 본격적으로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의 게임개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소개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바로 김태곤의 죽마고우다. 당시 김태곤은 게임개발을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혼자 모든 걸 감당할 수는 없었다. 특히 그는 원래 좋아하던 일본식 RPG를 만들고 싶었는데, 그와 함께할 동료가 꼭 필요했다. 그는 동료를 모으는 데 필요한 분야를 분석했는데,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프로그래밍-디자인-음악으로 압축됐다. 기획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무엇이 필요한지 '스스로' 판단한 그는 고교 동창이자 친구인 정종필, 이형진, 이제형을 찾았다. 정종필은 고교시절부터 만화를 잘 그렸고, 이형진은 작곡과 지휘를 경험해볼 정도로 음악을 잘 알았다. 이제형은 C언어를 알고 있었다. 김태곤은 이 친구들에게 '우리'가 게임개발을 왜 해야 하는지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게임을 즐겼던 세 사람은 김태곤의 설득에 결국 넘어갔고, 그렇게 그들은 팀으로 함께 게임을 만들기로 한다.
▲ 김태곤과 이형진 현 엔도어즈 실장(좌), 둘은 93년부터 지금까지 함께 게임을 만들고 있다
치기 어린 기운이 다소 섞인 팀이었지만, 그들은 사뭇 진지하게 처녀작 [나이트마스터]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창의적인 게임을 만들자, 이런 특징을 부여하자, 뭐 이런 것에 집중하기보다 앞서 언급했듯 그들이 오래 즐겼던 일본식 RPG를 '우리 식대로' 만들어보자는 목표의식이 더 컸다. 게임개발이 어떤 것인지 감조차 없었지만, 혈기 왕성한 4명의 대학생은 열정만으로 이를 뛰어넘을 기세였다. 어설프기 그지없는 시나리오를 만들었고, 이후에는 늦은 시간까지 토론하며 밤을 지새웠다. 힘들다는 생각은 없었다. 구상했던 걸 하나하나 결과물로 만들어가는데 기쁨을 느꼈다. 개발실은 김태곤의 집이었는데, 열기 덕분에 방 형광등은 밤늦도록 꺼질 틈이 없었다.
그러나 역시 현실의 벽은 높았다. 애초 계획한 대로 김태곤과 이제형이 프로그래밍을 하고, 정종필은 그림을 그리고, 이형진은 게임에 소리가 나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 작업은 어려워져만 갔고 한계가 느껴졌다. 모든 일은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이루어졌고 조각이 너무 흩뿌려진 나머지 이를 묶어 완성하는 게 버거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네 남자에게는 입대라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현실까지 덮쳐 왔다. 결국 이들은 첫 작품 [나이트마스터]의 완성을 하지 못한 채 모두 군대에 가게 된다. 첫 실패작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나름의 의미가 있었던 만큼, 당시 하이텔 동호회에 '데모 버전' 형태로 올려두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다행히 김태곤에게 군대생활은 그의 게임개발 인생에 있어 무척 중요한 지점이 된다. 현역 군인 대부분이 그렇듯, 군대라는 울타리에 있다 보면 자연스레 사회에 대한 환상이 커지게 된다. 어떻게 보면 무엇인가의 본질을 제대로 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복무 당시 김태곤은 게임을 만들었던 시절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뼈저리게 느낀다. 또, 이런 생각은 그뿐만 아니라 함께한 친구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에 '김태곤과 아이들'은 군대에서 다시 한 번 게임개발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갔다. 취미가 아닌, 업으로서의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느낀 것이다.
결국 김태곤은 '업무활용'을 목적으로 부대장에게 호소해 집에 있던 컴퓨터를 가져왔다. 덕분에 그는 컴퓨터를 의무병 전산업무에도 활용했고, 이에 더해 개인적인 공부도 할 수 있었다. 일과시간에 공부는 터무니없었으니, 그는 잠을 줄이면서 새벽 시간에 3~4시간씩 꼬박꼬박 프로그래밍 공부를 했다. 다른 걸 신경 쓸 일이 없으니 실력은 빠르게 향상됐다. 친구였던 정종필도 게임에 써도 될 법한 그림을 자주 보내왔다. '군사우편'에 담긴 친구의 그림을 보며 김태곤은 웃었고, 그렇게 상상만 해도 행복한 ‘진짜 꿈’을 키워나가게 된다.
이렇게 2년이 흐르고 김태곤은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 마침 김태곤의 동생이 게임 하나를 추천해줬는데, 그가 건네받은 것은 다름 아닌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전략 시뮬레이션 [워크래프트]였다.
▲ 김태곤의 첫 게임 [나이트마스터]는 결국 완성되지 못한 채 하이텔에 올려두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충무공전]의 탄생과 역사게임의 시작
글쟁이들은 백지 앞에 깜빡이는 커서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공포를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설렘을 느낀다. 무엇을 어떻게 써내려 갈까? 머릿속을 정리하면서 한 줄 한 줄 채워갈 때마다 공포와 설렘은 곧 희열로 바뀐다.
전역 이후 김태곤의 상황이 이랬다. 어차피 첫 게임인 [나이트마스터]는 실패로 돌아갔으니, 이제 그는 군대에서 준비했던 것들을 백지 위에 써 내려가는 것만 남았다. 그는 휴가 때 접해본 [워크래프트]를 떠올렸다. 지금까지 그가 했던 게임과 너무나 다른 전략 시뮬레이션 장르. 김태곤은 이 게임을 '개발자' 시각에서 바라봤는데, RPG보다는 아무래도 작업 리소스가 적겠다고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략 시뮬레이션은 앞에 나왔던 유닛이 후반에도 계속 나오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RPG가 아닌 전략 시뮬레이션 장르에 도전하기로 마음먹는다.
두 번째 게임을 준비하면서 '김태곤과 아이들' 4인방도 다시 뭉쳤다. 준비태세를 잘 갖춘 까닭에 그들은 아예 팀 이름도 만들었다. 바로 HQ DOWN이었다. 특별한 뜻은 없다. 이들은 가끔 당구를 치면서 놀았는데, 툭 하면 나오는 말이 “우리는 뭐만 하면 한 큐에 다운되냐?”였다. 한 큐에 다운. 그래 좋다. 바로 이게 우리의 정체성이다.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한 큐에 다운'은 곧 팀 명으로 이어졌고, 그들은 HQ DOWN 줄여서 HQ로 불렀다.
이후 HQ는 게임의 생명이 될 세계관부터 고민했다. 사실 [워크래프트]는 휴먼과 오크라는 명확한 대립구도가 있었다. 김태곤은 어차피 [워크래프트]를 기준으로 삼은 만큼, 이에 걸맞은 대립구도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이때 그는 '한국의 역사'를 생각했고, 그 중에서도 동아시아의 큰 전쟁 중 하나인 '임진왜란'을 떠올렸다. 이를 세계관으로 하면 명확한 대립구도도 성립될뿐더러 이순신과 권율 등 주인공으로 삼을만한 인물 문제까지 해결될 수 있었다. 세계관이 잡힌 이후에는 게임 세부 구성을 짰다. 다행히 임진왜란은 보병과 기병 외에도 천자총통, 조총 등 화약무기도 존재해 '병과'의 다양성을 높일 수 있었다. 게다가 거북선과 같은 최고의 군함까지 있었던 만큼, 실제 배 위에서 유닛들이 전투를 벌이는 해상전을 구현하는 것도 상당히 멋있을 거 같았다.
이렇게 해서 HQ의 두 번째 작품인 [충무공전(96)]이 8개월 만에 완성됐다. 사실 게임은 형편없었다. 아마추어가 만들었다는 티가 여기저기 묻어나는 되게 엉성한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AI는 형편없고, 조작법 등도 무척 힘겨웠다. 게다가 게임의 핵심이었던 거북선은 '뗏목'처럼 표현돼 게이머들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그러나 순수한 대학생 팀 HQ 입장에서는 처음으로 '완성한 작품'이라는 데에게 그 의미가 컸다. 게다가 김태곤이 향후 20년 동안 걷게 될 '역사게임'의 시작도 바로 이 [충무공전]에서 비롯됐다. 참고로 [충무공전]은 정무식과 김문규가 있었던 트리거소프트를 통해 유통됐는데 판매량은 약 2만 장이었다. 높은 수치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충무공전]은 트리거소프트와 HQ를 세상에 살포시 알리는 데 결정적인 기운을 불어넣었다.
김태곤 본인도 나름대로 [충무공전]을 통해 한 가지를 느꼈다. 바로 '게임개발자'에 대한 확신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김태곤은 게임개발을 업으로 삼을 수 있느냐에 명확한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충무공전]의 제품 패키지를 처음 받던 날, 그는 너무나 기뻤고 바로 여기서부터 게임개발자로서 인생을 살기로 마음먹게 된다.
▲ 김태곤이 처음으로 완성한 게임 [충무공전] 역사물에 대해 부담이 컸던 그는, 이 게임에서
왜적은 소위 말하는 아주 ‘나쁜 놈들’ 정도로 표현했다. 그랬거나 말거나, 지금 봐도 참 조악해 보인다
HQ, 전략 시뮬레이션으로 입지를 다지다
[충무공전]으로 사기를 얻은 HQ는 바로 다음 게임을 준비했다. HQ는 트리거소프트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닌, 독자적으로 일을 진행해보고 싶었는데, 결국 그들은 불길한 단어 DOWN을 빼고 HQ로 정식 사업자 등록을 했다. 작고 초라했지만, 경기도 하남시에 오피스텔을 얻어 그들만의 '개발실'을 만든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이후 그들이 준비한 세 번째 게임은 아이러니하게도 또 임진왜란 소재였다. 그 이유는 명쾌하다. HQ는 당시 그들이 보기에도 어설펐던 [충무공전]이 나름 인기를 얻자, 여기에 보답하고 싶었다. 쉽게 말해 어떻게 완성은 했지만, 개발과정에서의 아쉬움이 컸던 탓에 다음 작품으로 이를 만회하고 싶었던 것이다. 즉, HQ는 [충무공전]의 온전한 완성판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HQ는 기존 [충무공전]의 부족했던 점을 확실하게 개선하고, 멀티 플레이까지 지원하는 전략 시뮬레이션을 만들었는데 이게 바로 [임진록(97)]이다.
알다시피 [임진록]은 임진왜란 이후 지어진 고전소설명이다. 김태곤은 역사로 테마를 잡은 이상, 여기서 주는 교훈도 게임에 녹이고 싶었다. 왜적의 침입이라는 치욕스러운 역사 속에서 우리 조상이 꿋꿋하게 맞서 싸웠다는 사실을 게임을 통해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임진록]은 [충무공전]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고, HQ는 더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참고로 [임진록]은 삼성전자를 통해 유통됐는데, 판매량은 정확하게 나오지 않았다. 다만 [임진록]은 당시 삼성전자가 판매하던 브랜드PC(매직스테이션)의 번들로 제공됐는데, 덕분에 [임진록]은 더 많은 사람이 즐기면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을 수 있었다. 이후 [임진록]은 대만으로도 수출됐다.
▲ 기존 [충무공전]에서 큰 발전을 이룩한 [임진록]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게임이다
"작고 초라한 회사가 삼성전자와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어요. 아마 계기가 됐던 것은 납기일이었던 거 같네요. 삼성전자가 우리 게임을 PC에 제공하기로 했으니, 우리는 정해진 기한까지 게임을 넘겨야 했죠. 저는 아직 마르지 않은 군인정신으로 납기일에 정확히 맞춰 게임을 갖다 줬습니다. 그랬더니 되레 삼성전자가 당황스러워하더라고요. 납기일을 지킨 회사는 HQ가 처음이라고 말이죠. 바로 이게 신뢰의 증표가 된 거 같아요. 덕분에 우리는 삼성전자와 지속해서 협력할 수 있었고, [임진록] 시리즈는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을 수 있었죠”
-김태곤
아마추어 팀이었던 HQ는 [충무공전]과 [임진록]이 뜻밖에 성과를 거두자 자신감이 붙었다. 바로 여기서 HQ는 한 가지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데 바로 '욕심'이었다. HQ는 [임진록]이 해외로까지 수출되는 걸 보고, 충분히 글로벌한 시각으로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에 기반을 두고 나온 게임이 [이스트(98)]다.
결과적으로 [이스트]는 판매량이 1,000장도 안 될 만큼 참패했다. 김태곤과 HQ는 글로벌한 게임을 만든다는 것을 목표로 동양과 서양 신화에 나오는 캐릭터가 겨루는 조금 특별한 게임을 기획했다. 게임명도 원래 [이스트앤웨스트]였지만, 너무 직설적이고 유치한 맛이 있어 그냥 [이스트]로 하기로 했다. 동양과 서양 신화는 게임으로 담기 좋은 소재이긴 했지만, 서로 다른 면에 워낙 두드러져 일관성이 갖추기 어려웠다. 이걸 한 번에 묶어 '문명전쟁'으로 거창하게 포장하려 했으니 당연히 힘들 수밖에. HQ 입장에서는 처음 겪은 '실패'였다.
[이스트]의 실패로 쓴맛을 본 HQ는 '자신감'이 큰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들은 [임진록]의 후속작인 [임진록2(00)]를 내놓았는데,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접근했던 만큼 게임은 발매 이후 약 18만 장이 팔리며 값진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에도 [임진록] 시리즈는 [임진록 2+ 조선의 반격]으로까지 이어져, 총 누적 판매량이 30만 장 이상을 돌파해 한국을 대표하는 하나의 전략 시뮬레이션으로 부상하기에 이른다.
하나 더 언급하자면 HQ는 [임진록2] 이후 [천년의신화(00)]를 제작하는데, 여기에는 약간의 행운이 따랐다. 2000년 당시 경주에서 '경주세계문화엑스포'가 열렸는데, 주최 측에서 수익사업 중 하나로 게임 제작 공모회를 연 것이다. HQ는 이 공모전에서 발탁됐고,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천년의신화]를 내놓게 된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의 공식게임으로 발매된 [천년의신화]는 콘텐츠 사업 중 유일하게 흑자를 기록했다고…
▲ [천년의 신화]는 임진왜란이 아닌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 특징이었다
[거상]의 탄생, 그리고 아픔
[임진록2]와 [천년의신화] 이후 김태곤은 고민에 빠졌다. 4명으로 시작한 HQ는 어느새 20명이 훌쩍 넘은 규모로 커졌다. 대표이사로 있던 김태곤은 여기서 선택을 해야 했다. 계속 게임개발에 매진할 것인지, 아니면 사업적인 쪽을 아예 책임지고 경영자로서의 업무에 충실할 것인지. 고민이 컸지만 김태곤의 선택은 명확했다. 게임개발이 너무 재미있었고, 이 일을 할 때마다 행복을 느꼈던 그는 결국 '게임개발자'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이다.
이에 HQ는 당시 대만계 회사였던 감마니아코리아와 손을 잡기에 이른다. 당시 감마니아코리아는 개발조직이 없고 주로 유통을 했던 만큼, 두 회사는 궁합이 잘 맞았다. 결국 두 회사는 2000년, 합병을 했고 김태곤과 HQ는 감마니아코리아에 들어가 새로운 게임을 준비했다. 사실 당시 개발사와 유통사의 합병은 으레 있는 일이었지만, 이후 갈등으로 무너지는 일이 많아 리스크도 있었다. 김태곤은 한편으로 걱정됐지만, 그보다 '신뢰'를 더 믿었다. 감마니아코리아는 곧 조이온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HQ가 준비하는 차기작에 집중하게 된다.
새 보금자리를 튼 HQ도 나름의 전략을 수립했다. 마침 시장은 [바람의나라]와 [리니지] 등의 등장으로 PC패키지에서 온라인으로 추세가 바뀌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이 흐름을 타고 온라인게임에 도전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HQ는 온라인게임 개발 노하우가 전혀 없었다. 결국 자구책으로 기존 [임진록2]을 활용하는 형태로 뼈대를 잡았다. 전투 방식이나 인터페이스는 [임진록2] 그대로 가고, 이 외에 필드 구현 등 온라인게임에 필요한 것만 추가로 제작하기로 한 것이다. 차기작의 정식 이름은 [임진록온라인 거상]으로 결정됐다.
▲ 김태곤의 첫 온라인게임 [임진록온라인 거상] 경제가 중심이 되는 게임이었다
자구책으로 [임진록2]를 활용하기는 했지만, 김태곤은 게임의 독창성은 확실히 부여하고 싶었다. '거상'이라는 부제만 봐도 알 수 있듯, 그가 생각한 것은 다름 아닌 '경제'였다. 시작은 "장사를 한다"에서 출발했지만,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었다. 그만큼 [임진록온라인 거상]은 현실과 견주어도 될 만큼 경제의 틀이 잘 잡힌 게임이었다. 교역을 통해 장사를 하는 것은 물론 생산 시스템 등을 추가돼 이를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개인거래로 시작하지만, 신용등급이 오르면 좌판을 열어 교역의 폭을 넓힐 수도 있었고, 희귀한 건 경매에 부칠 수도 있었다. 기존 게임의 '길드'는 '상단'으로 표현해 플레이어가 서로 이익을 공유할 수 있도록 했고, 각 마을에 투자가 가능하도록 해 수익금의 일부를 받을 수 있는 것도 가능했다. 현실 속에 내재된 자본주의가 바로 이 게임 안에 모두 녹여져 있었다.
또 [임진록온라인 거상]은 MMORPG 최초로 부분 유료화를 도입(캐주얼 최초는 넥슨의 퀴즈퀴즈)하기도 했다. 이에 기반을 두고 '무료로 즐기는 MMO'로 마케팅 포인트를 잡은 결과, 게이머들은 구름 같이 몰려들었다. 결과적으로 [임진록온라인: 거상(2002)은 어마어마한 이슈 태풍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고, 수많은 마니아 층을 양산했다. 이 게임은 이후 [천하제일상 거상]으로 명칭이 바뀌고, 2013년 지금도 서비스가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임진록온라인 거상]은 김태곤 본인에게 아픈 추억이기도 하다. 김태곤과 HQ는 게임 완성도에 집중한 까닭에 개발기간이 다소 지연됐는데, 바로 여기서 조이온과 갈등이 생긴 것이다. 결국 그 과정에서 김태곤은 치유할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받게 되고, [임진록온라인 거상]을 완성한 이후 바로 퇴사를 하게 된다. 유저들은 게임에 열광했지만, 안타깝게도 김태곤은 그 온기를 느껴보지도 못한 채 떠나야 했다. 참고로 [임진록온라인:거상]은 서비스 이후 2002년 디지털콘텐츠 대상 종합심사에서 국무총리상을 받기도 했다.
아픈 추억이 공존하긴 했지만, 이후 김태곤은 HQ의 설립멤버와 일부 마음 맞는 직원을 모아 다시 한 번 HQ를 설립했다. 게임개발자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은 만큼, 절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김태곤은 여기서 또 다른 회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바로 인티즌이다. 인티즌은 당시 포털 사업을 하던 회사였는데, 수익모델이 없어 답답한 상황이었다. 과거 인티즌과 인연이 있었던 김태곤은 그들과 협력하기로 하고, 또 한 번 합병하기에 이른다. 이후 인티즌은 기존 포털 사업을 완전히 정리하고 철저하게 게임사업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노선을 바꾸었는데, 이 회사는 후에 사명을 엔도어즈로 변경하게 된다.
▲ 당시 조이온은 [임진록온라인 거상] 외에도 [동토의여명] 같은 게임도 만들고 있었다.
다만 김태곤은 퇴사했기 때문에 [동토의여명]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
엔도어즈 역사의 시작, [아틀란티카]와 [삼국지를품다]
인티즌에서 새 출발을 알린 김태곤은 바로 심혈을 기울여 다음 신작을 준비한다. 그는 [임진록온라인 거상]을 통해 배운 것이 많았던 만큼, 뼈대는 전작과 비슷하게 잡았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 전투와 경제요소를 잘 버무린 그런 게임. 김태곤은 여기에 한 가지 요소를 더 추가했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정치'였다.
확실히 게임 내용에 정치를 녹인 것은 놀라운 아이디어였다. 당시에는 이런 게임 자체가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기존 [임진록온라인 거상]을 통해 현실의 자본주의를 게임 내에 녹일 수 있다는 것에 확신을 얻었던 김태곤은 그보다 더 무거운 소재인 정치도 충분히 게임에 아우를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결국 그 선택은 통했다. 이 게임은 월드 내에 여러 마을이 있는데, 플레이어는 마을 중 하나를 선택해 가입할 수 있었다. 마을을 일종의 자치구처럼 구성해 인위적인 사회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덕분에 각 마을 유저들은 ‘가족’ 같은 커뮤니티를 연결해나갔고, 이를 기반으로 게임이 제공하는 여러 콘텐츠를 즐겼다. 또, 투표 시스템을 도입해 게임 내 최고 우두머리인 ‘군주’와 조선의 행정기구였던 6조 등을 뽑을 수 있도록 했다. ‘정치인’이 된 유저들은 게임이 주는 여러 혜택을 누릴 수 있었는데, 이는 게임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었다. 대신 그들의 의사결정은 공유가 됐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경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공식 홈페이지에는 별도의 기자단이 활동했다. 맞다. 이 게임은 게임이라기보다 하나의 가상사회였다. 덕분에 유저들은 이 게임에 더 몰입했고, 고유의 즐거움은 물론 현실에 녹여진 정체, 경제 등을 느낄 수 있었다. 김태곤은 어차피 정치에 무게중심을 둔 만큼 게임 명에서도 이게 확실히 느껴지도록 했는데, 이게 바로 2004년에 서비스를 시작한 ‘군주온라인’이다.
워낙 특색이 있었던 게임인 만큼 [군주온라인]은 서비스 이후 꽤 인기를 끌었다. 바로 여기서부터 김태곤 특유의 ‘색깔’을 알아본 유저들도 늘었고, 그의 게임을 즐겨하는 마니아 층도 생겨났다. 앞서 언급했듯 인티즌도 엔도어즈로 사명을 바꾸고, 김태곤(당시 개발이사)을 필두로 한 게임사업에 더 집중하게 된다.
[군주온라인]이 성과를 거둔 것은 김태곤에게 또 한 번의 의미를 부여했다. 지난 [임진록온라인 거상]의 설움이 한 번에 날아갈 정도로 회사 내에서 자리를 확고히 잡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는 애초에 원했던 것처럼 ‘게임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그에게 있어서는 무척 행복한 순간이었다.
▲ [군주온라인]은 기존 [거상]에 정치를 더한 게임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완전히 자리를 잡은 김태곤은 이후 온라인게임 신작 하나를 더 내놓는데 바로 [아틀란티카(08)]다. 이 게임은 과거 실패의 쓴맛을 봤던 [이스트]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국내 역사를 넘어서 세계사를 다룬 그런 게임을 기획한 것이다. 이 게임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미지의 대륙 아틀란티스를 찾는 것을 목표로 하고 여기에 각종 세계 문화 유산을 담은 것이 특징이다. 조선에서 시작해 만리장성을 지나 중국의 요순신전, 동남아의 앙코르와트, 모헨조다로 등 유적지를 거친다. 중동의 바빌론 공중정원, 지중해의 크레타 신전, 동유럽의 드라큐라성(브란성)도 만나볼 수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를 비롯해 전 세계의 유명한 유적지들도 모두 볼 수 있다. 기획은 확실히 돋보였다.
그리고 또 하나 [아틀란티카]는 국내 MMORPG 최초로 턴 방식 전투를 도입해 화제가 됐다. 당시 시장에서는 [아무개 온라인]이라는 이름으로 [디아블로]나 [리니지]식 전투방식을 갖춘 온라인게임이 무수히 쏟아졌는데, 김태곤은 이를 보며 약간의 환멸을 느낀다. 결국 그는 언제나 그렇듯 게임에 남다른 특징을 넣고 싶었고, 그렇게 해서 턴 방식 전투를 도입하게 된 것이다. 다소 시대에 뒤떨어질 수 있다는 주변 우려가 있기도 했지만, 결국 [아틀란티카]는 서비스 이후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며 김태곤의 명성을 힘껏 올려주는 게임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2010년 엔도어즈는 넥슨에 피인수되는데, 다행히 김태곤의 위치는 큰 변함이 없었다. 어차피 엔도어즈의 정체성은 김태곤 그 자체에 있기 때문에, 그 역시 회사를 떠나겠다는 생각보다 게임개발에 더 매진했다.
그가 빚어낸 가장 최신작은 [삼국지를품다(12)]다. 이 게임은 게임 내용에 대한 변화보다는 플랫폼으로서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했다는 데에서 또 한 획을 그은 게임이다. 최근 시장은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온라인에서 모바일로 바뀌는 격변이 일고 있는데, 이를 예견한 김태곤은 PC-모바일-태블릿이 모두 연동되는 웹게임을 준비했다. 이것이 바로 [삼국지를품다]다. 멀티 플랫폼을 감안해 별도의 설치가 필요 없는 웹게임으로 가되, 대신 게임 내용은 삼국지의 정통성을 완벽하게 담아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게임 역시 성공적으로 서비스됐다.
그러나 [삼국지를품다]는 시장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꼭 숫자적 성공이 아닌, 아직도 시장에 없는 멀티 플랫폼에 ‘삼국지’의 온전함을 고스란히 담은 게임은 찾기 힘들다는 것에서 그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 그래픽이 아쉽긴 했지만 [아틀란티카] 역시 게이머들에게 큰 환호를 받았다
김태곤은 왜 역사게임을 만들까?
김태곤은 [충무공전]을 시작으로 지난 21년 동안 쭉 ‘역사’라는 한우물만 파왔다. 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우리는 게임으로서의 역사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역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잠시 긴장을 하게 마련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역사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무게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람은 누구나 역사를 좋아한다. 간단한 예로 지난 수십 년 동안 TV드라마에서 사극을 방영되지 않았던 적은 없다. 사극은 엄연히 역사물이다. 사람들은 역사의 시대적 배경, 굵직한 사건, 캐릭터 갈등, 사랑, 정치 등을 통해 현실과 다른 즐거움을 느낀다. 즉, 역사물은 엔터테인먼트 적인 접근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이다.
때문에 역사게임이라고 해서 무조건 고리타분한 것만은 아니다. 역사라는 시대적 흐름을 타면서도 거기에 전투를 비롯한 다양한 요소를 ‘재미있게’ 구현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한국식으로 만든 남자가 바로 김태곤이다.
사실 김태곤은 군 전역 이후 [워크래프트]와 비슷한 구도를 고민하는 과정 중에 역사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후 계속 역사를 다루면서 그 역시 어떤 사명감을 느낀다. 게임으로서의 재미뿐 아니라 역사가 주는 아픔이나 교훈 등을 기록하고 싶었던 것이다. 김태곤은 [임진록]을 제작할 당시 한산도를 방문했는데,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찾으며 많은 것을 느꼈다. 이에 그는 지금도 더 심도 있게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보다 창의적인 역사교육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 시점에서 김태곤은 이미 게임으로 그것을 뛰어넘고 있다.
결과적으로 김태곤에게 역사는 ‘자신(HQ)만의 경쟁력 – 게임과 역사의 궁합 – 역사에 대한 교육적 접근’이라는 세가지 가치가 있다. 그는 아직 지치지 않았다. 그만큼 역사라는 건 깊이가 헤아릴 수 없고, 알면 알수록 달콤하니 그 역시 더 빠져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게임이 또 어떤 식으로 발전될지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이렇게 그가 진득하게 한우물만 파온 것은 지난 시절 [워크래프트]에 영향이 있을 수도 있다. 아무것도 몰랐던 그는 마냥 [워크래프트]를 토대로 게임을 만들었는데, 결국 그것을 계기로 게임개발자의 인생을 걸었다. [충무공전]이 성공했지만, 그는 그와 비슷한 [임진록]을 또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맞다. 개발자 특유의 자존심 때문이다. 심도 있게 파고들어 자신은 물론 그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에게도 만족을 주는 것이 바로 그 자존심의 정체다.
자리를 잡은 이후, 김태곤은 자신이 [워크래프트] 같은 존재가 되기로 한다. 누군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준을 만들고, 다른 누군가에게 이에 대한 영향을 주고 싶은 것이다. 리스크가 컸지만, 그가 게임 내에 정치를 도입하고 경제개념을 살리고 과거의 방식을 다시 활용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삼국지를품다]는 그의 포부가 얼마나 큰지 확실하게 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이러한 그의 도전은 늘 시장의 주류와는 거리가 멀어 소위 ‘대박’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게임은 늘 독창적이었고 신선했다. 굳이 포장을 하지 않아도, 그가 한국게임산업에 끼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다.
현재 그는 새로운 목표 하나가 생겼다. 바로 한국의 게임개발자로서 귀감이 되는 것이다. 특히 그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게임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을 ‘게임’을 통해 바꾸려고 하고 있다. 게임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지금 성장하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충분히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바로 이런 걸 하고 싶은 것이다.
과거의 그는 게임은 무조건 ‘재미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게임에서 충분히 캐릭터의 목을 베는 연출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청소년 이용불가를 달면 된다. 그러나 김태곤은 그런 게임을 만들고 싶지 않다. 그는 자기 자녀가 “우리 아빠 게임”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고, 또 언제라도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그런 게임을 만들고 싶다. 더 놀라운 것은 실제로 그는 지금까지 그런 게임만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게임은 어느새 세상에 미치는 영향이 커질 정도로 발전했고, 그만큼 게임을 보는 사회의 냉소적인 시선도 커졌다.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책임을 느끼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개발자가 있다는 것은 참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95년 한산도를 방문한 김태곤, 이후부터 그는 지금까지 꾸준히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지금도 공부하고 있다
노인이 되도 나는 게임을 만들겠다
김태곤은 역사게임을 만들었지만, 그 역시 현실이라는 역사 속에서 살아왔다.
영화 [포레스트검프]는 한 바보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그는 혼자만의 바보가 아니다. 이 영화는 한 바보의 이야기로 전개되지만, 그 과정에서 전쟁과 같은 세계 역사의 흐름과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바보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그는 열심히 인생을 살았고, 그렇게 살았던 인생은 누구보다 행복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면서 인생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뭉클한 감동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태곤 역시 바보의 삶을 살고 있다. 게임개발만 아는 바보다. 그는 그저 열심히 게임만 만들었다. 순진한 대학생 팀 HQ는 멀티미디어 시대로 넘어가는 흐름 속에서 삼성전자와 인연을 맺어 [임진록] 등을 내놓았다. [천년의신화]를 탄생할 수 있게 한 세계문화엑스포는 2013년 지금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임진록온라인 거상]을 준비할 때는 IMF 사태가 터졌고, 이후 사람들은 경제관념에 대한 관심이 부쩍 올랐다. TV 광고에서 시작된 “부자 되세요!”라는 말은 유형처럼 번졌고, 드라마 [상도]가 인기를 끌었다. 또, 그가 [군주온라인]을 내놓을 당시에는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노란풍선’과 함께 젊은 층 사이에서 정치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삼국지를품다]를 준비할 때는 애플이 혁명을 일으키며 PC온라인과 모바일의 경계를 허물었다. 맞다. 김태곤 역시 이런 시대 흐름 사이사이에서 인생을 살았다.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았지만, 이런 흐름은 그에게 큰 의미가 없다. 그는 그저 게임을 만들며 살았던 인생이 가장 값지고 행복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게임개발자는 그의 천직이다. 그에게는 미야모토 시게루 같은 위압감도 없고, 누구보다 화려하게 인생을 살지 않았지만, 국내 게임산업 역사 어딘가에 김태곤이 있다는 사실은 즐겁다. 그는 은퇴한 이후 노인이 돼도 ‘노인을 위한 게임’을 만들겠다고 한다. 그의 나이 42세. 앞으로 20~30년 후 그의 모습이 더 기대된다.
▲ 게임개발에 대한 김태곤의 열정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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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산적형. 나사빠진 낭만주의자.
'오빠'와 '모험'이라는 위대한 단어를 사랑함.blue@gamemec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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