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한 동경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이런 노래가 뭇 소년들의 가슴을 울릴 정도로 비행기 파일럿, 그것도 전투기 파일럿은 소년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귀청을 찢는 듯한 굉음을 내뿜으며 드넓은 창공을 마음껏 활공하는 전투기 파일럿들. 이들을 꿈꾸는 건 우리들이 과거 하늘을 동경하다 비참하게 죽고 만 이카루스의 후예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고 최무룡 씨가 주연한 빨간 마후라의 영화 포스터 |
▲ 하늘을 날기 위한 이카루스의 몸부림 |
사실 어렸을 때 비행기 파일럿을 꿈꿔보지 않은 소년은 얼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나 혹독하고 대상이 한정되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 꿈을 접어야 했다. 한 대에 수백억 원, 많게는 2천억 원을 넘는 전투기들(註 1). 이렇게 한 번 몰아보기 어려운 전투기들을 완벽히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어려운 조작은 배제한 채 하늘을 날며 적들을 격추시키는 쾌감을 제공할 수 있는 게임이 있다면 오히려 히트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3D 플라이트 슈팅게임의 대명사 에이스컴뱃 시리즈의 최신작 ‘에이스컴뱃 5(이하 AC5)’가 발매됐다. 비행기를 조종해서 특정 미션을 완수한다는 컨셉의 게임은 과거에도 있어왔지만 조작의 사실성을 강조한 나머지 게임의 난이도가 너무 높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에이스컴뱃은 조작은 쉽게, 그러나 오브젝트의 사실성은 최대한 강조하는 방향으로 컨셉을 잡아 그 전통을 발전시켜왔다.
PS로 처음 발매된 에이스컴뱃은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계속 발전을 거듭해왔다. 중간에 방향성을 잘못 잡아 팬들을 실망시킨 적도 있었지만, 최신작 AC5에 이르기까지 에이스컴뱃은 그 이름만으로 히트를 보장하는 대작 타이틀의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기에 이른다. 자, 최신작 AC5가 또 어떤 즐거움을 우리에게 선사해주는지 살펴보자.
▲ F-22A |
▲ 유로파이터 타이푼 |
註 1: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배치된 F-16의 경우 대당 440억 원이며 차세대 공군주력기 사업의 대상기종인 F-15K(F-15E의 한국사양)는 대당 1,370억 원 정도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 게임 중에 등장하는 최신예기 F-22A는 대당 1억 8,000만 달러, 즉 2,000억 원을 호가한다.
더욱
드라마틱해진 스토리성
비행기를 조종해 등장하는 적들을 격파한다는, 어찌 보면 너무 단순한 플레이의 반복만이 이뤄지는 플라이트 슈팅게임이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까지 계속된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게임 속에 가미된 스토리성에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AC2까지 AC 시리즈에서 스토리에 대한 비중은 사실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나 세 번째 작품부터 스토리성을 대폭 강화시킨 AC 시리즈는 4에서 스토리의 흐름을 두 세력간의 전쟁을 바라보는 한 소년의 내래이션 형식으로 전개시켜 호평을 받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정의가 하나일 수는 없다. 그래서 전쟁은 두 세력간의 정의가 충돌하는 가장 잔혹한 형태라고 하지 않던가. 이런 전쟁의 흐름을 어느 한 세력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게임에서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세력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한 쪽이 미화되고 한 쪽은 폄하되기 마련. AC4에서는 어느 한 세력의 주의(主義)에 동화되지 않은 평범한 한 소년이 바라보는 전쟁을 그림으로써 게임의 본 내용과는 다른 전쟁의 참혹함, 비극 등을 메시지로서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AC5 역시 전작의 호평을 받았던 스토리 구성을 채택했다. 다만 주의(主義)에 동화되지 않은 소년에서 공정함과 객관성이 필수로 요구되는 기자로 바뀌었을 뿐이다.
▲ 전작에선 소년을 |
▲ AC5에서는 기자를 화자로 등장시켰다 |
게임 속 화자(話者)로 등장하는 인물은 오시아 공군을 취재하는 기자(=쥬넷)다. 이 기자는 전쟁 기간 내내 오시아 공군 샌드 섬 소속의 한 편대와 행동을 함께 하며 전쟁이 일어난 이유와 진행과정, 그리고 흑막 속에 감춰진 비밀 등을 오시아, 유크토바니아 어느 세력의 입장에서도 아닌 제 3자의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플레이어에게 전해준다. 비록 플레이어는 오시아 공군의 한 파일럿(=코드병 부비)이 되어 적들과 싸워야 하지만, 인터미션이나 브리핑 시에는 기자의 객관적인 잣대에 의해 전쟁의 상황을 전해 듣게 되는 것이다.
제 3자의 입장에서 스토리를 전달해주는 요소는 앞서 설명했듯 AC4에서 이미 채용되어 호평을 받았던 부분이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게임의 장점인 스토리성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겠지만, AC5에는 스토리의 진행 과정 역시 드라마틱하다.
게임이 시작하면 갑작스런 적의 공격으로 교관과 훈련생 8명이 죽고 훈련생이었던 주인공(=부비)은 전투기에 탑승, 처음으로 출격하게 된다. 게임 초반에는 편대의 가장 막내로서 편대장과 동료들의 보살핌을 받는 처지지만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주인공은 공석이 된 편대장 자리를 맡아 동료들과 함께 전장 곳곳을 누빈다. 동료의 전사, 믿고 있던 사람의 배신, 전쟁의 흑막 등이 조금씩 밝혀지면서 AC5의 스토리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드라마가 된다.
분명 AC 시리즈는 후속작이 나올 것이다. 과연 AC6에서는 또 어떤 스토리로 우리를 만족시킬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 미션 진행 도중에 흘러나오는 스토리 진행은 애니메이션으로 처리됐다 |
혼자가
아닌 여럿의 이야기
전장에서 전우란 또 다른 나에 다름 아니다. 내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전우가 있기에 적들이 우글거리는 전장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들 수 있는 것이다.
AC5는 전작과 가장 차별되는 차이점으로 ‘편대’ 시스템을 부각시켰다. 실제로도 4대의 전투기가 편대를 이루는데, 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3명의 편대원(=전우)을 게임에 등장시킴으로써 전작과의 차별화를 꾀한 것이다.
우선 편대라는 개념이 등장함으로써 전투 시 펼칠 수 있는 배리에이션이 늘어났다. 기존에도 함께 출격하는 아군의 개념이 있긴 했지만 이들은 독립된 AI에 의해 그냥 혼자서 움직였다. 따라서 일정한 시간 내에 작전지역 내에 있는 적들을 모두 없애는 미션 같은 경우에는 주인공 혼자서 바삐 돌아다니다 결국에는 실패하고 마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그러나 AC5에서 (주인공이 편대장이 된 이후) 편대원들은 주인공의 지시에 충실히 따른다. ‘공격’ 명령을 내리면 작전 범위 내에 있는 적들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며 ‘원호’ 명령을 내리면 자신을 쫓고 있는 적을 공격해 위기에서 구해준다. 또한 ‘특수병장’ 명령을 내리면 특수무기의 사용 여부도 조절할 수 있다. 상황에 따라 적절한 명령을 내림으로써 전투의 재미를 배가시킬 수 있는 것이다.
▲ 자신을 포함해 4대가 한 편대를 이룬다 |
▲ 가운데 서있는 남자의 팔에 가린 인물이 바로 주인공 |
또한 편대 시스템은 전투뿐만 아니라 스토리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주인공에 초점을 맞춰 스토리가 진행됐던 전작들과는 달리 3명의 동료들에게도 애정 어린 스포트라이트를 골고루 분배함으로써 스토리에 대한 몰입감을 높인 것이다. 믿고 따르던 편대장의 격추, 홍일점 나가세 중위의 적진고립, 분위기 메이커 쵸퍼의 전사 등 편대원들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게임 곳곳에 녹아듬으로써 스토리는 더욱 극적으로 화한다.
▲ 편대의 홍일점 나가세 케이. 적진에 고립되었을 때 오히려 적병들을 포로로 잡고 부상당한 아군을 보호하는 등 남자 못지 않은 터프함을 보여준다 |
▲ 편대의 분위기 메이커 ‘쵸퍼’. 민간시설을 지키는 와중에 격추당한다. 격추당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민간시설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공터로 비행기를 유도했다 |
감탄이
나올 정도로 리얼해진 곳곳의 요소들
디테일한 묘사가 압권
필자는
AC 시리즈의 그래픽은 이미 4에서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연 AC5의
그래픽이 얼마나 전작과 차별화를 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E3 2004에서 AC5를 실제로 플레이해봤을 때도 별 차이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제품이 나온 후 진득하게 즐겨보니 필자의 생각은 큰 착각이었음을 느끼게
됐다.
배경이 얼마나 깔끔하고 세밀하게 처리됐는지, 비행기의 디테일이 얼마나 리얼한지, 광원 효과와 폭파 시 연출이 얼마나 대단한지 등으로 AC5의 그래픽을 논한다면 AC4와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AC5의 리얼함은 단순히 그래픽에 있지 않다.
우선 게임의 최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비행기의 묘사가 단연 압권이다. R3 버튼을 이용해 비행시점을 3가지 중 하나로 바꿀 수 있는데, 그 중 파일럿 시점이 기체마다 모두 다르다. 전면이 탁 트인 시점과 비행기 후면에서 바라보는 시점과 함께 준비되어 있는 파일럿 시점은 각종 계기판이 세밀하게 재현되어 있어 게임을 즐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시점이긴 하다. 따라서 이 시점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차이를 못 느낄지 모르겠지만, 50종 가까이 등장하는 비행기들의 계기판 위치가 모두 다르다. 물론 이 계기판의 배치는 모두 실제 계기판의 위치와 레이아웃을 적용한 것이다.
▲ 계기판의 위치와 레이아웃이 기체마다 다르다 |
그리고 전투 시 비행기의 묘사에도 눈여겨볼 점이 많다. 각 기체마다 기총이 발사되는 위치가 다른 점, 미사일이나 특수병장을 사용하면 재장전될 때까지 무기 발사대에 거치된 미사일이 보이지 않는 점, 카나드 익을 장비한 기체의 경우 기체의 움직임에 따라 세밀하게 카나드 익이 반응하는 모습 등은 정말 세밀한 곳까지 신경을 쓴 제작진의 노력에 감탄이 절로 나오게 된다.
▲ F-14처럼 가변익 전투기의 경우 가속할 때는 주익이 오른쪽처럼 접힌다 |
그 중에서 필자가 가장 놀란 점은 스텔스 전투기인 F-22A의 묘사다. F-22A는 스텔스 성능을 위해 평상시에는 무기를 기체 내부에 수납하고 있다가 전투 시에만 미사일 거치대를 밖으로 내보내 미사일을 발사한다. 따라서 외부에 미사일이 노출되어 있는 일반 기체와 비교해 미사일 발사시간에 약간의 갭이 발생하게 된다. AC5에서는 이 부분까지 완벽하게 재현됐다. 일반 기체의 경우 발사 버튼을 누르면 미사일이 곧장 발사되는데 F-22A의 경우 0.5초 정도 후에 미사일이 발사되는 것이다. 시점을 돌려 기체 아래쪽을 바라보면 발사버튼을 눌렀을 때 미사일 거치대가 외부로 빠져나오고 그 다음에 미사일이 발사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떤가? 놀랍지 않은가?
▲ 무기 발사대를 기체 내에 수납하고 있는 스텔스 전투기의 모습. 미사일이 보이지 않는다 |
▲ 기체가 초음속을 돌파하는 순간에는 이렇게 화면 연출이 바뀐다 |
무선 교신의 묘미
AC5에서
크게 달라진 점 중의 하나는 전투 중 일어나는 무선 교신의 정보량이 대폭 늘어났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AC 시리즈에서는 무선 교신이라고 해봤자 미션 시작 시에 ‘무운을
빈다’ 정도의 간단한 내용이거나 스톨, 미사일 접근을 알려주는 경고음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AC5에서는 편대 개념이 도입되어 아군까지 주고받는 농담을 비롯해 적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 아군의 지원을 바라는 NPC의 구원신호 등 다양한 교신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게다가 스토리 전개와 관련된 중요한 포인트들도 전투 중 일어나는 교신
내용을 통해 펼쳐지므로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 관제기와 편대기, 때로는 적기로부터 계속 교신이 들어온다 |
3시간
클리어, 3년 플레이
플라이트 슈팅게임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게임의 플레이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AC5에는 미션 플레이 시간이 따로 표시되는데 실제로 필자가 게임을 클리어한 결과 엔딩까지 걸리는 플레이 시간은 대략 3시간 정도(미션 진행 시간만 포함되므로 인터미션과 브리핑 등을 함하면 실제 플레이 시간은 5~6 시간 정도). 그러나 실제로 AC 시리즈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3시간이 아니라 3달, 심지어 3년까지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AC5에는 특정 조건을 만족시켰을 때 얻을 수 있는 훈장 개념이 도입됐다. 개중에는 기총으로 5기 격추, 적기 1000대 격추 등 간단한(?) 것들도 있지만 익스퍼트 난이도 모두 S랭크 등 획득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훈장들도 있다. 이 훈장들을 모으려면 꾸준히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다.
또한 AC5에는 기체에 경험치 개념을 도입해 기체의 경험치를 올리면 동일 성능의 파생기 또는 업그레이드 버전의 기체가 등장하게끔 만들어놓아 전투기 마니아들의 수집욕을 자극하고 있다. 이 역시 플레이 시간이 대폭 늘어나게끔 만든다. 모든 기체를 모아야 등장하는 숨겨진 기체, 특정 미션에서 부품들을 찾아 조립해야 출현시킬 수 있는 숨겨진 기체 등 AC5에는 숨겨진 요소가 무척 많다.
아! 한 가지 더! AC5는 기본적으로 캠페인 모드와 아케이드 모드 두 가지로 이뤄져 있다. 캠페인 모드는 AC5의 본 모드로 시나리오를 느끼며 게임을 진행하는 모드인 반면 아케이드 모드는 적 전투기들과의 도그파이팅만을 전문적으로 즐길 수 있는 특별 모드. 특히 아케이드 모드는 전작 AC4에서 언급됐던 ‘뫼비우스 원’의 후일담을 그리고 있어 전작을 즐겨본 사람이라면 반가운 마음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
▲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로고 |
▲ 짧게 짧게 진행되는 미션들을 즐길 수 있다 |
자국민에 최적화된 게임
앞서 설명했듯 AC5는 무선 통신에 의해 얻게 되는 정보량이 상당히 많다. 그렇기에 무선 통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게임을 원활히 진행하기도 힘들거니와 게임의 재미를 100% 느끼기도 힘들다. 적들과의 전투에 정신없는 마당에 자막을 읽을 겨를이 있겠는가. AC5 일본판은 영어, 일본어를 지원하기 때문에 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사람들은 불편을 느낄 수밖에 없다.
11월 25일 국내에 발매되는 AC5는 한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영문판 그대로 발매된다고 한다. 롤플레잉게임처럼 텍스트가 많아야만 한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텍스트가 얼마 되지 않더라도 게임의 재미를 100% 느끼기 위해 필요하다면 반드시 한글화는 이루어져야 한다. 국내에 처음 발매되는 AC 시리즈의 최신작 AC5가 높은 게임성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판매량을 보여줄지, 게이머들에게 얼마나 만족도를 줄지 주목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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