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의 만화 코너에 가 보면 대부분 일본 작가들의 만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실제로 최근 가장 많이 판매되고 있는 만화책들은 나루토, 원피스, 아이실드21 등 모두 일본 만화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산 만화가 있다. 바로 ‘열혈강호’다.
▲ 대한민국 대표 인기 만화 '열혈강호'
엠게임에서 온라인 게임으로도 제작돼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열혈강호’는 코믹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스토리와 무협이 만나 국내 만화 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번 원화 명인 릴레이 탐방에서는 지난 이명진 작가에 뒤이어 ‘열혈강호’의 세계를 펜으로 담아내고 있는 양재현 작가를 만나봤다.
한비광의 웃음처럼 밝은 줄만 알았다. 그러나…
‘열혈강호’는 무협 만화다. 보통 무협만화는 복수 등의 무거운 소재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지만 ‘열혈강호’는 다르다. 한비광이라는 주인공은 늘 코믹하고 어리버리한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진지한 분위기에서는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지고 만다.
▲ 우리를
늘 웃음짓게 만드는 캐릭터 한비광.
실은 깊은 고뇌를 간직한 작가에 의해 탄생된
캐릭터다
기자에게 있어 ‘열혈강호’란 작품은 늘 즐거움만을 안겨줬던, 절로 웃음이 터져나오 게 만드는 만화책으로 기억된다. 따라서 이 작품을 만들어낸 인물도 늘 웃음만을 안고 사는 재미추구자 일 거라 생각했다.
양재현 작가의 작업실은 서울 응암동의 한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서자 기자의 예상과는 달리 그의 작업실은 깔끔하다 못해 휑한 느낌마저 들었다. 남자들만 사는 곳이라 음침하다는 그의 말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잘 정돈된 가구들은 웬만한 신혼집을 능가했다. 그나마 벽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열혈강호 일러스트들과 책장에 꽂힌 만화책들이 ‘열혈강호’의 작업실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내 만화 시장이 시름시름 죽어간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렁이가 그리고 싶었던 2살배기 아이
양재현 작가가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때는 2살. 지렁이가 너무나 그려보고 싶었다는 생각으로 펜을 잡기 시작한 것이 2살 때란다(그의 어머니에 따르면 말이다). 그는 계속 지렁이를 그리다 보니 다른 것도 그리게 됐고, 점차 그림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고등학교 때 본격적으로 만화가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했다고 전했다.
고등학교 때 양재현 작가의 그림 스타일은 ‘시티헌터’와 흡사했다. 아니 너무 닮은 나머지 당시 친구가 해적판으로 발간됐던 ‘시티헌터’를 들고 오면서 “야, 네가 이 만화 베껴서 그리는 거지?”라고 했을 정도였다.
“정말이지 시티헌터를 보고 깜짝 놀랬습니다. 제가 추구하고자 하는 그림과 너무 똑같았고, 그림 하나 하나에 담겨있는 건물이나 이런 것들이 제 머릿속에 있던 이미지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죠. 저와 코드가 참 잘 맞는 작가인 것 같습니다.”
▲ 2살 때 처음 펜을 쥐었죠!
양재현 작가는 ‘시티헌터’를 자신과 코드가 통하는 만화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만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다.
▲ 시티헌터
글+그림 = 만화, 전극진+양재현 = 열혈강호
‘열혈강호’의 표지를 보면 ‘글-전극진, 그림-양재현’이라고 표기돼 있다. 즉 만화 스토리는 전극진 작가가, 그림은 양재현 작가가 담당하는 것이다. 이 둘은 어떻게 만나게 됐고, ‘열혈강호’를 함께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양재현 작가가 전극진 작가를 처음 만난 곳은 AAW(아마추어 애니메이션 단체)였다. 89년도에 처음 만나 친분을 쌓았다. 하지만 양재현 작가가 국방의 의무를 위해 잠시 떠나 있는 동안 전극진 작가는 이미 프로작가로 데뷔해 있는 상태였다.
양재현 작가가 군대를 제대한 후 전극진 작가는 그에게 함께 열혈강호를 연재하자고 제안했고, 평소 어떤 말을 하면 서로 연상하는 이미지가 같을 정도로 생각이 잘 통했기 때문에 양재현 작가는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극진이 형은 저의 가족이라고도 할 수 있죠. 둘이 생각하는 게 너무 비슷하고 추구하는 방향도 같습니다. 물론 열혈강호를 연재하면서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는데, 그럴 때에는 제가 직접 전화를 걸어 이번 스토리를 좀 변경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합니다. 극진이 형은 제 의견에 귀를 잘 기울여주고 서로 협의점을 잘 찾아갔기 때문에 열혈강호를 장기간 연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작업실 방 벽에 붙어있는 열혈강호 일러스트. 갖고싶다!!
이렇듯 양재현 작가는 서로 의견 충돌이 있을 때는 둘 다 한발자국 물러나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 줬기 때문에 긴 시간 동안 열혈강호를 연재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대만을 보면 한국 만화시장의 앞날이 보인다?
서문에 언급했다시피 양재현 작가는 국내 만화시장이 점차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사실 이러한 말은 만화책 대여점이 생길 때부터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합법화된 P2P 사이트와 만화책을 스캔 해 업로드하는, 이른 바 스캔족의 성행으로 대여점마저 붕괴 위기에 처해 있다.
“IMF 이전 국내 만화시장은 10만 부 시대였습니다. 만화가 10만 부 정도 팔리면 성공했다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물론 일본이 1000만 부 시장인 것을 감안하면 많은 판매량은 아닙니다만, 당시 음지에서 활동하던 국내 만화 시장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IMF 이후의 만화시장은 6~7만 부 시대로 급 하락 했습니다. 하지만 대여점이 생긴 이후 열심히 노력한 작가보다 그냥 설렁설렁 만화책 부수만 늘린 작가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던 이상한 구조였죠. P2P 사이트가 합법화된 후요? 뭐 긴 말 할 필요 없습니다. 제일 잘나가는 국내 만화 판매 부수가 2만 부 입니다.”
▲ 게임메카를 위해 손수 그림을 그려주셨다
양재현 작가는 최근 기승을 부리고 있는 스캔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국내 만화계를 몰락으로 이끌어간 주범이 바로 스캔족들이라는 게 그의 의견이다.
“최근 P2P사이트를 보면 만화책을 일일이 스캔 해 업로드하는 스캔족들을 볼 수 있습니다. 웃긴 건 말이죠, 스캔을 한 사람이 ‘scan by XX’라며 스캔한 이미지는 자신의 소유권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죠.”
“혹자는 스캔한 만화를 보고 구입할 만한 가치가 있으면 구입한다고 주장합니다.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대 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베가본드나 베르세르크 등의 만화책은 어째서 국내 만화 판매 순위의 제일 하위권을 차지하고 있을까요?”
▲ 열혈강호
전권이 책장에 순서대로 나열돼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실상은.....
양재현 작가는 스캔을 해놓고도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다니는 스캔족과 이를 다운받아 보고도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 소비자들의 인식을 꼬집어 맹렬히 비판했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된다면 얼마 안 있어 국내 만화시장이 붕괴될 것이라는 게 그의 의견이다. 실제로 그는 대만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대만의 경우 우리나라보다 공유문화가 먼저 발달했습니다. 스캔족 역시 성행했고요. 그러면서 대만의 만화 작가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했고, 현재 대만에는 자국만화가 한 개도 없는 실정입니다. 때문에 대만의 어린이들은 타국의 문화가 녹아있는 만화를 보면서 자라고 있습니다. 모두 대만 정부 때문에 생긴 결과 입니다. 기존에 있던 대만 작가들이요? 중국으로 넘어가 온라인 게임 개발사에서 원화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대만에만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물론 국내에 만화 작가들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점차 만화작가들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다들 온라인 게임 개발사에서 원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국내 온라인 게임 원화가 발달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안을 들여다 보면 만화 작가들의 서러움이 묻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흥행에만 신경쓰는 것이 아니라 국내 만화 시장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하고 있었다
양재현 작가는 대만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대만의 경우 우리나라보다 P2P를 통한 공유문화가 빨리 형성됐다는 것. 물론 정부가 합법적으로 이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대만 만화작가들이 모두 몰락했고, 타국의 만화만이 시장에 보이고 있다. 대만에서 만화를 연재하던 작가들은 현재 게임 업계에서 원화가로 활동하거나 다른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양재현 작가는 국내 온라인 게임 원화가 일본이나 타 국가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전했다. 실제로 국내 유명 원화가들이 일본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원화가들은 원래 만화 작가였다가 생계 유지가 힘들어 어쩔 수 없이 직업을 바꾼 경우라고 한다. 마치 앞서 설명한 대만 만화시장의 몰락을 보는 듯 하다.
온라인 게임이 만화를 죽인다?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온라인 게임의 발달이 정말 국내 만화시장을 죽이고 있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온라인 게임이 발달함으로써 그림을 그리는 이들에게 일자리와 좀 더 뻗어나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열혈강호만 하더라도 열혈강호 온라인이 있었기에 대만 및 중국에서 흥행할 수 있었고, 애니메이션 및 드라마까지 제작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재현 작가는 열혈강호 온라인이 대만 게임 순위 상위권에 들면서 원작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충분히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만화와 온라인 게임의 만남이야 말로 원소스 멀티유즈의 예라며 현재 개발 중인 ‘열혈강호2’에 더 깊숙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 엠게임의 열혈강호 온라인
“열혈강호 온라인이 중국과 대만, 일본 등에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열혈강호라는 기본 콘텐츠가 마련됐기 때문입니다. 다른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로 기본 콘텐츠가 마련돼 있어야 더 높은 발전을 이룹니다. 그런데 기본 콘텐츠를 개발하고 발굴해야 하는 인재들이 P2P 사이트와 스캔족들의 활약으로 어깨도 피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정부의 지원?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냥 방해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기자에게 열변을 토하며 달라진 소비자들의 인식과 정부의 대책 등에 대해 설명했다. 물론 정부 사람들의 경우 나이가 많기 때문에 문화 콘텐츠 등의 필요성 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도 있고, 다운받는 것이 사서 보는 것보다 편하기 때문에 P2P사이트를 선호하는 소비자들 입장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적어도 최소한 불법적인 활동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 그 전에 정부에서 불법을 합법으로 인정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라며 한탄하는 그의 모습은 국내 최고의 인기작가라는 타이틀을 무색하게 할 정도였다.
▲ 들어온지 얼마 안된 신입 문하생. 야식을 사랑하신다는...
국산만화의 자존심 열혈강호. 뚝심을 지킨다!
열혈강호는 총 60권 연재를 목표로 작업 중에 있다. 60권 연재를 모두 마친 뒤 무엇을 할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양재현 작가는 자기도 모르겠다며 지금만큼은 연재에 집중하고 싶다고 했다.
현재 열혈강호는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될 예정이다. 뿐만 아니라 ‘열혈강호2’, ‘열강사커’ 등 온라인 게임영역도 넓힐 예정이다. 양재현 작가는 열혈강호를 활용한 다양한 문화 사업에 힘쓸 예정이다. 이유? 자신이 고생해 영역을 확장함으로써 후배 만화작가들이 설 수 있는 자리가 더욱 넓어지기 때문이다.
늘 한비광과 같은 낙천적인 성격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만 같던 양재현 작가. 그의 내면 역시 한비광의 속내와 마찬가지로 깊고 슬픈 작가의 고뇌가 철저히 숨겨져 있었다. 최근 북미, 프랑스 지역에까지 출간된 열혈강호. 일본의 인기 만화 드래곤볼처럼 연재가 끝난 후에도 다방면으로 만나볼 수 있기를 고대한다.
▲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다 사진기를 들이대자 이런 포즈를...
▲ 거실에 떡하니 침대가... 이 상태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 현관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는 담화린
▲ 게임메카 독자분들을 위한 서비스!!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