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슨의 세 번째 작품 일랜시아는 근 10년 간 게임 업데이트나 패치가 중단된 채 방치돼 왔다. 유저 수도 많지 않고, 수익도 거의 나지 않는다. 일반적인 게임이라면 진작 서비스가 종료됐어야 맞지만, 바람의나라와 어둠의전설, 아스가르드와 함께 ‘클래식 RPG’라는 이름으로 묶여 넥슨을 상징하는 게임으로서 유지되고 있다. 사실, 현재의 일랜시아는 서버만 돌아가고 있다 뿐이지 게임 현황은 흔히 말하는 ‘망겜’의 정의에 부합한다.
이런 일랜시아를 아직도 지키고 있는 이들이 있다. 십 년째 방치되어 버그도 많고, 보안도 뚫렸고, 미완성 콘텐츠도 널려 있고, 각종 매크로와 핵 프로그램까지 막지 않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하고 있다. 그들은 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5월 28일 개막한 인디다큐페스티발 2020에서 상영된 박윤진 감독의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이러한 물음을 직접 찾아나선 한 일랜시아 유저의 이야기를 그렸다.
현재 일랜시아의 상태는…
영화를 통해 한동안 관심 밖으로 밀려났던 현재 일랜시아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일랜시아는 1999년 제작된 고전게임으로, 클라이언트 설치 용량이 약 500MB 밖에 되지 않을 정도다. 보안 업데이트조차 멈춘지 오래이기에, 수많은 비인가 프로그램이 불법과 합법의 경계에서 판을 친다.
캐릭터의 이동 속도를 높여주는 스피드핵은 일반적인 게임에서는 바로 제재 대상이지만, 일랜시아에서는 십 년 넘게 필수 유틸리티로 쓰이고 있다. 사양이 허락하는 한 게임을 복수 실행할 수 있게 해주는 멀티 프로그램도 필수에 가깝다. 각종 반복적인 활동(채집, 구매, 어빌리티 수련 등)을 도와주는 매크로 프로그램 역시 없으면 게임을 못 할 정도로 활성화 됐다. 일각에서는 사냥과 일상 활동을 비롯해 게임을 자동으로 돌려주는 오토 프로그램이 성능에 따라 수십만 원에 팔리기도 하고, 원래는 바닥에 묻혀 보이지 않아야 할 광물을 투시해서 자동 채취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이 모든 프로그램들은 원래대로라면 단속 대상이지만, 운영진 부재 속에 ‘안 사용하는 사람이 바보’ 취급을 받으며 활성화되어 있다.
그 결과, 현재 게임에 남아 있는 유저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이러한 프로그램을 최대한 사용해 가며 랭커를 향해 달리는 헤비 유저들로, 공식화 되어 있는 성장 루트를 철저히 따라가며 강한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24시간 게임을 돌린다. 돈을 주고 ‘부계’라 불리는 대리 플레이어를 고용하기도 한다. 두 번째는 캐릭터 성장과는 상관 없이 게임 그 자체에 애정을 가지고 그 안에서 맺은 커뮤니티에 집중하는 이들이다. 하루 종일 게임 내에서 노래만 부른다던가, 길드원들과 대화나 상황극을 하며 놀거나, 세계를 탐험하는 것이 주 활동이다.
이들은 입을 모아 일랜시아를 버린 넥슨을 욕하며, 현재의 일랜시아를 ‘망겜’이라 표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십수 년째 묵묵히 게임에 접속하고 있다. 박윤진 감독은 첫 번째로 “이 게임 왜 하세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게임이 이것 밖에 없어서”, “눈이 덜 아파서” 같은 적당한 답변들이 나왔지만, 진짜 이 게임을 하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는 답변은 아니었다.
힘든 사회생활, 가혹한 MMORPG 트렌드… 일랜시아를 하는 이유
그 이유를 찾기 위한 여정에서, 박윤진 감독은 많은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만난 유저들은 대부분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중반으로, 실제 일랜시아 유저들 역시 이 나이대가 많다. 2000년대 초반 게임을 시작할 때만 해도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정도였던 이들은 사회에 첫 발을 내딛고, 한창 일할 나이가 됐다.
사회에 나서는 것은 쉽지 않다. 누군가는 하던 공부를 집안의 반대와 사정으로 그만두고 공무원 준비를 했으며, 누군가는 쉽지 않은 학업과 좋지 않은 결과에 좌절한다. 어떤 사람은 힘든 육체노동을 하면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중압감을 지고 있다. 그들이 마음의 안식을 위해 찾는 곳은 바로 일랜시아다. 그들은 추억을 찾아서, 여기가 아니면 갈 곳이 없어서, 게임을 통해 얻은 지인들을 만나기 위한 이유 등으로 게임에 접속해 지친 심신을 치유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는 힘든 생활에서 안식처를 찾기 위함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사람이 처한 환경이 각기 다르듯, 이 역시 일반화 할 수는 없다. 박윤진 감독이 만난 일랜시아 유저들의 모습이나 반응을 봐도, 모두가 힐링을 이유로 이 게임에 접속하는 것은 아닌 듯 보였다.
상영이 끝난 후, 박윤진 감독을 만나 이에 대한 답을 들어보니 “일랜시아는 사회의 축소판과는 달라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최근 MMORPG는 게임 내에서 남을 누르고 올라서기 위해 돈을 쓰고, 상대를 누르고, 권력을 쟁취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과정을 강요한다. 반면, 일랜시아는 넥슨이 한참 전에 수익을 포기한 게임이기에 게임 그 자체를 순수하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십수년 간 쌓아 온 인간관계를 유지시켜 주는 플랫폼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기에, 그들에게 일랜시아는 단순한 게임 그 이상의 공간이다.
넥슨에 원하는 것은 최소한의 관리
그런 일랜시아지만, 넥슨에게 버림받았다는 소외감은 유저들의 마음을 좀먹고 있다. 실제로 넥슨 4대 클래식 RPG 중 일랜시아는 가장 오래 방치돼 있는 게임이다. 바람의나라는 얼마 전 제 3의 전성기라는 말이 나올 만큼 활발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어둠의전설이나 아스가르드 역시 지난 10년 간 크고 작은 업데이트나 패치가 진행된 바 있다. 상징성이라는 가느다란 동아줄에 매달려 연명하고는 있지만, 넥슨 매각설 당시 “우리 게임 종료되는 것 아니냐”라는 불안감을 가장 크게 느낀 이들 역시 일랜시아 유저들이었다.
방치가 계속되다 보니 다른 게임이라면 유저들이 들고 일어나고 PD가 사과해도 모자랄 사건이 터져도 별다른 조치 조차 없다. 대표적 사례가 2019년 벌어진 팅버그 사건이다. 한 유저가 게임 캐릭터에 버그를 심어, 게임 내에서 자신과 마주치는 모든 사람의 게임 클라이언트를 강제 종료시킨 사건이다. 이러한 사태가 오랜 기간 지속됐지만, 넥슨에서는 손을 쓰지 않았다. 과연 넥슨이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가조차 의심되는 상황에, 얼마 안 되는 유저들 중에서도 게임을 접는 이들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이를 일랜시아 최악의 위기라 표현하기도 했다.
사실 이전까지 일랜시아 유저들은 운영자 복귀를 사실상 포기했다. 오히려 운영자가 돌아와서 게임을 손보기 시작하면 현재 활성화 돼 있는 비인가 프로그램들이 막힐까 두려워하는 유저도 있었다. 그러나 팅버그 사건으로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는 수준이 됐다. 박윤진 감독은 넥슨에 수없이 메일을 보낸 끝에, 판교 넥슨코리아 사옥 유저상담실에 찾아가 직접 민원을 넣어 꼭 고치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이후 10월 24일, 넥슨이 일랜시아 전서버 리붓을 진행함에 따라 해당 사건은 가까스로 해결됐다. 게임이 없어질 뻔한 위기를 겨우 넘긴 것이다.
일랜시아 유저들은 넥슨에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추억이 깃든 게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관리 정도만을 원하고 있다. “게임을 통해 얻은 인연이 너무 크다”, “게임이 종료된다면 내 추억 하나가 없어지는 느낌일 것이다”, “일랜시아 외 다른 게임은 하지 않을 것 같다” 등, 일랜시아 유저 의견에 귀를 조금이라도 기울인다면 ‘클래식 RPG’라는 넥슨의 상징은 더욱 빛이 나지 않을까 싶다.
“넥슨이 시간을 내어 일랜시아 유저 의견을 듣고 그에 맞춘 콘텐츠 업데이트를 진행해 주었으면 좋겠다”라는 박윤진 감독은, 운영진을 기다리는 일랜시아 유저들을 대변해 캐릭터 ‘내언니전지현’을 앞세워 본격적인 활동을 계획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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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메카 취재팀장을 맡고 있습니다jong31@gamemec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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