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엑스엘게임즈 대표이자 온라인게임의 아버지, 송재경 대표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바로가기]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와 키보드를 움직이면 화면 안의 캐릭터가 내 입력대로 움직인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온다. 그 역시 나와 같은 플레이어다. 상대방의 캐릭터를 보며 간단한 대화를 나눈다. 그와 함께 사냥을 할 수도, 서로 싸울 수도 있다. 가상의 세계에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과 다양한 일을 체험하며 게임을 즐기는, 이른바 온라인게임에서 흔히들 보는 풍경이다.
여기서 굳이 풍경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우리가 온라인게임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을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온라인게임이란 이른바 ‘그래픽 머드(Graphic MUD: Multi User Dungeon)’. 쉽게 말하자면 게임 내에서 행해지는 모든 활동이 이미지로 표시된다. 최근에는 텍스트로만 이루어지는 온라인게임은 거의 없어진 상태며, 온라인게임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래픽 머드’ 와 동일시되기 때문에 이러한 장르명을 따로 언급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송재경(현 엑스엘게임즈 대표)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러한 온라인게임 장르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1차원적 게임을 평면의 그림으로 표현한 2차원으로 바꿈으로써, 매니아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머드 게임을 현재 온라인게임의 형태로 만들었다. 그가 제작한 국내 최초의 그래픽 머드 게임 '바람의 나라' 와 '리니지' 는 국내 온라인게임 산업의 부흥을 이끌어냈으며, 나아가 세계 온라인게임 시장에서 한국이라는 국가가 선두에 설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천재 개발자 송재경. 그의 굴곡진 인생을 살펴보자.
우연히 컴퓨터를 접한, 말 없고 수줍던 모범생
1967년생, 송재경의 어린 시절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자리에 앉아 공부만 하던 모범생으로 묘사할 수 있다. 고등학교 때는 하루 종일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송재경이 공부밖에 모르던 샌님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중학 시절, 친구 집에서 우연히 만난 8-Bit 컴퓨터는 단숨에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당시 집에 컴퓨터가 없었던 송재경은 꾸준히 친구 집을 오가며 컴퓨터로 하는 각종 작업에 재미를 붙였다. 송재경은 수백 페이지의 두꺼운 프로그래밍 관련 책자를 수백 번씩 읽어가며 게임도 해 보고, 그림 그리기 등 간단한 프로그램을 직접 짜 보기도 하면서 컴퓨터 세계에 점차 빠져든다.
▲한글 에디터나 기초적인 레이싱 게임 등을 제작하며 프로그래머의 꿈을 키운 송재경
사실 그의 게임 인생은 그로부터 1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후에야 시작된다. 송재경이 청소년기를 보냈던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은 게임이라는 문화 자체가 막 태동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즐길 게임이 별로 많지 않았다. 게임을 접할 공간은 기껏해야 오락실 정도였고, 그리 유복하지 못했던 집안 사정으로 인해 1판 50원의 오락실 요금이 부담스러워 가끔 구경만 하던 정도였다. 그러던 송재경에게 컴퓨터라는 기계는 그야말로 마법상자였고, 집과 학교에서는 연습장에 코딩을 해 가며 프로그래머의 꿈을 키웠다.
1986년. 학창시절의 우수한 성적과 한 곳에 몰입하는 끈기, 그리고 컴퓨터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송재경은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한다. 여기서 그는 게임인생 최초의 파트너인 김정주를 만난다. 현 NXC 그룹 회장이자 넥슨을 10조 기업으로 성장시킨 김정주는 송재경과 같은 서울대학교 컴퓨터공학과 86학번 동기다. 둘은 입학 후 곧바로 친해졌고, 송재경은 김정주와 함께 대학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모방해가며 본격적인 프로그래머로의 길에 뛰어든다. 대학 시절의 송재경은 폰트 하나하나를 일일이 그리며 워드프로세서 기능을 하는 한글 에디터를 제작하기도 하고, 터보파스칼을 이용해 기초적 레이싱 게임을 제작하거나, '스페이스 인베이더' 를 본뜬 모방형 게임을 만드는 등 다양한 경험을 쌓는다. 프로그래머의 꿈이 무르익는 시절이었다.
카이스트 박사를 포기하고 게임 개발로 뛰어들다
대학교 4학년 때, 송재경은 스터디 그룹을 결성해 카이스트 대학원 입학 시험을 준비한다. 1년 간의 시험준비 끝에 카이스트 전산학과에 성공적으로 진학한 송재경은 이 곳에서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라 불리는 전길남 교수를 만나 석-박사과정을 밟는다. 전길남 교수는 이후에도 송재경 인생의 멘토 역할을 하는데, 현재 엑스엘게임즈의 사풍인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개발환경과 철저하고 꼼꼼한 일처리 등은 대부분 전길남 교수 밑에서 배운 것이다. 참고로, 1년 늦게 카이스트에 입학한 김정주 역시 송재경이 있는 전길남 교수 밑으로 들어오며 석박사 과정을 함께 한다.
대학원 시절 송재경은 Unix 하의 X-윈도우 시스템 그래픽 환경에서 한글을 입/출력, 저장, 인쇄할 수 있게 해 주는 메모장 프로그램과, 유닉스와 X11 환경에서 한글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터미널 에뮬레이터 '한텀' 등을 개발하며 프로그래밍 경험을 쌓는다. 당시 송재경이 제작/배포한 프로그램들은 카이스트 전산과 학생들 사이에서 오픈 소스로 풀리며 인기리에 사용되었고, 그들로부터 얻은 의견을 토대로 다양한 업데이트도 이루어졌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송재경은 프로그래머 지망생이었지, 게임 개발자는 아니었다.
1992년,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 진입까지 서너 달의 휴식기를 얻은 송재경은 당시 카이스트 재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머드 게임을 처음 접한다. 채팅과 게임을 적절히 융합시킨 머드 게임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문화였으나, 그 마니아성으로 인해 일부에서만 회자되었다. 당시 한두 달 가량 머드 게임에 빠져 있던 송재경은 이러한 머드 게임에 대해 약간의 불만이 있었다. 텍스트로 모든 것이 표현되는 게임 특성 상 비주얼적인 요소가 부족했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했는지 등을 잊어버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나라면 조금 더 잘 만들 수 있었을텐데…’ 라는 생각을 한 송재경은 이 때 오픈소스를 토대로 한 텍스트 머드를 시범적으로 제작해 보기도 했다. 당시부터 송재경의 마음 속에는 게임 제작에 대한 희미한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93년 말, 송재경은 1년 반에 걸친 박사과정을 미련없이 중퇴하고 주변의 제안에 따라 한글과컴퓨터에 입사하게 된다. 송재경은 한글과컴퓨터에서 아래아한글 개발자 김형집이 맡고 있던 ‘넥스트스텝’ 프로젝트에 투입된다. 그는 이 곳에서 X-윈도우 코딩 관련 일을 맡았다.
그렇게 몇 달 가량 프로그래머로서의 삶을 살아가던 송재경에게, 게임 개발자로의 첫 도전의 기회가 찾아온다. 박사 과정 중 알게 되었던 삼정데이터서비스의 오충용 대표가 텍스트 머드 게임을 만들어 천리안을 통해 서비스해 보자는 제의를 한 것. 오충용 대표가 추진한 '쥬라기 공원' 은 당시 대유행하던 동명의 영화(스티븐 스필버그 제작)를 모티브로 한 어드벤처북 형식의 텍스트 머드로, 송재경의 게임개발 이력 맨 앞줄에 위치하고 있다.
▲ 송재경이 처음으로 참여한 게임 프로젝트 '쥬라기 공원' 스크린샷
'쥬라기 공원' 에서 송재경이 맡은 일은 게임 내에서 한글 입력이 되도록 엔진 부분을 코딩하는 작업이었으며, 이마저도 한글과컴퓨터에 재직하며 퇴근 후 1~2시간씩 2주 정도 참여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때의 프로젝트 참여는 송재경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게임 개발에 대한 열정을 불타오르게 하는 기폭제가 된다. 이 때부터 점차 커진 열망은 그를 더 이상 프로그래머로 머물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송재경이 참여한 ‘쥬라기 공원’ 은 천리안의 히트 콘텐츠로 자리매김. 당시 1달 5,000만 원 가량의 수익을 올리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쥬라기 공원’ 의 히트를 지켜본 송재경은 과거 석사시절부터 꿈꿔왔던 ‘즐기기 쉬운 머드 게임’ 제작에 대한 열의를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일명 ‘그래픽 머드’ 게임의 시작이었다.
두 청년의 넥슨 설립과 ‘바람의 나라’
‘쥬라기 공원’ 프로젝트가 끝나고 여전히 한글과컴퓨터에서 일하던 28세의 송재경은 이러한 MUD게임의 현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전히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어제 무엇을 했는지를 일일히 기억하기가 귀찮았던 것. 세상 모든 위대한 발명은 귀찮음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던가? 결국 송재경은 과거부터 꿈꿔 오던 MUD게임의 모든 상황을 이미지로 표현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이른바 그래픽 머드, MUG(Multi User Graphic) 게임. 우리가 현재 떠올리는 모든 온라인게임의 모습을 실현에 옮긴 것이다.
때마침, 송재경이 근무하던 한글과컴퓨터 ‘넥스트스텝’ 프로젝트의 메인 코더가 병역특례 훈련으로 자리를 비우면서 4주 가량 팀 내의 업무가 정지되는 기회가 찾아온다. 이에 송재경은 업무 공백기를 틈타 현 엔씨소프트 부사장인 이희상 등과 함께 아주 기초적인 그래픽 머드 게임 프로토타입을 제작한다. 시간과 인력 부족으로 인해 애니메이션도 없었고 간신히 서버 접속과 캐릭터 그래픽이 조금 구현되는 수준에서 그쳤지만, 어쨌든 송재경이 처음 제작한 그래픽 머드 게임이었다. 향후 업무로 복귀한 송재경은 해당 프로젝트를 공식적으로 추진해 보려고 시도했지만, 당시 한글과컴퓨터는 온라인게임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게임에 대한 열의를 참지 못한 송재경은 회사를 퇴사했고, 카이스트에서 박사 학위를 밟고 있던 김정주를 찾아갔다.
송재경과 김정주는 과거 대학 시절부터 유난히 손발이 잘 맞았다. 옛날부터 창업에 대한 이야기를 간간히 꺼내며 언젠가는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처럼 세계를 주름잡을 회사를 만들어보자고 다짐해오던 둘은, 송재경의 한글과컴퓨터 퇴직을 계기로 다시 하나로 뭉친다. 송재경은 회사 재직 시절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는데, 특히 서울대의 SCSC(서울대 컴퓨터 스터디 클럽) 출신 인물들(엔씨소프트 김택진 대표, 드림위즈 이찬진 대표 등도 이 곳 출신)과의 교류가 잦았다. 송재경과 김정주는 이를 통해 5천만 원의 투자를 받는 데 성공했고, 이를 발판 삼아 94년 12월 말 역삼동 오피스텔에 자리를 튼다. 이것이 바로 넥슨(NEXON)의 시작이다.
일단 그래픽 머드 게임이라는 목표 하나로 백지에서부터 게임을 개발하기 시작한 송재경과 김정주. 그러나 뼛속까지 ‘공돌이’ 인 두 사람이 게임의 상세한 설정을 짜기에는 여러 모로 고충이 있었다. 그 때, 송재경이 즐겨 읽던 순정만화 잡지 <댕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 중 유달리 눈에 들어온 작품이 바로 김진 작가의 역사 판타지 ‘바람의 나라’ 였다. 송재경은 ‘바람의 나라’ 라는 제목부터 고구려를 소재로 한 배경 등이 매우 마음에 들었고, 우연히도 김진이 과거 한글과컴퓨터 외주 일러스트 작업을 할 때 안면을 튼 인연도 있었다. 이에 송재경과 김정주는 그 날로 김진을 찾아가 ‘바람의 나라’ 에 대한 사용 계약을 맺고 본격적인 게임 구체화에 들어간다.
▲ 만화가 김진의 동명 원작을 토대로 제작된 MMORPG ‘바람의 나라’
사실 그래픽 머드 게임을 제작/상용화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텍스트로 모든 것을 처리하던 머드 게임과는 달리, 그래픽 머드는 각 캐릭터의 디자인과 의상, 던전, 마을, 아이템, 몬스터 등의 그래픽 작업이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그래픽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처리하고 전송해주는 서버, 다양한 외부 업무 처리 등 다양한 전문가가 필요했고, 5천만원의 투자금만으로는 부족했다. 다행히 김정주가 창업과 사업 운영에 필요한 행정업무를 도맡은 데다 고가의 외주 작업까지 유치해 오는 등의 활약을 펼쳤고, 그래픽 디자이너를 포함해 현 네오위즈홀딩스 대표이사 나성균 등의 개발진들이 속속 보충됨에 따라 송재경은 1년여 동안 게임 개발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물론 모든 것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일단 이전까지 거의 시도되지 않은 ‘그래픽 머드 게임 상용화’ 라는 점이 꽤나 애를 먹였다. 누군가가 닦아놓은 길이라면 중간중간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라도 판단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스트레스 요소였다. 더불어 PC 패키지게임 개발자들의 시기와 질투도 심했다. 서울대-카이스트 출신의 엘리트들이 투자까지 받아가며 역삼동 오피스텔에서 집기 갖춰놓고 신기술입네 뭐입네 떠든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열악한 상황과 비교되는 환경에 대한, 사실상 샘내기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그러나 게임에 대한 열정은 이러한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김정주와 송재경은 이후 1년 동안 게임 개발을 진행한다. 송재경과 김정주. 넥슨의 창립 멤버 두 사람은 각기 활동 분야가 달랐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와 카이스트 전산학과를 함께 나온 두 사람이지만, 현재의 모습에서 비춰지듯 송재경은 개발 쪽에, 김정주는 사업과 관련된 쪽에 더 재능이 많았다. 두 사람의 절묘한 콤비네이션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상용화된 그래픽 머드 게임’ 이라 불리우며 넥슨 신화의 기초를 닦은 ‘바람의 나라’ 라는 게임을 탄생시킨다.
넥슨을 떠나 ‘리니지’ 를 탄생시키다
순조롭게 ‘바람의 나라’를 개발하던 송재경은 정식 서비스를 몇 달 남겨놓은 96년 말, 김정주 등과의 의견 충돌로 넥슨을 퇴사한다. 메인 감독이었던 송재경의 퇴사로 인해 넥슨은 그의 후임 프로그래머들을 고용했고, 이 때 송재경의 인수인계를 받은 사람이 현 넥슨코리아 서민 대표다.
넥슨을 나온 송재경은 카이스트 대학원 시절 실험실의 직속 선배였던 허진호 박사(당시 아이네트 사장, 인터넷기업협회회장을 8년간 연임 후 현 크레이지피쉬 대표로 재직 중)의 권유로 아이네트사로 향한다. 그 해 여름, 송재경은 이번에는 한국적인 이미지 대신 중세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새로운 그래픽 머드 게임을 개발하고자 마음먹는다. 또 다시 만화잡지 <윙크>를 펼쳐 본 그의 눈에 이번에는 신일숙 작가의 ‘리니지’가 띈다. 김진 작가를 통해 신일숙 작가의 연락처를 얻은 송재경은(당시 윙크 편집부에 연락처를 물었지만, 가차없이 거절당했다고 한다) 한 달 동안 정신없이 작성한 ‘리니지’ 기획서를 가지고 신일숙 작가를 찾아가 작품의 게임 사용 허가를 따냈다.
▲당시 송재경이 한 달만에 만들었다는 ‘리니지’ 초기 기획서
라이선스 계약 이후 송재경은 아이네트에서 본격적인 ‘리니지’ 개발에 착수한다. 이 시절, 송재경은 향후 그와 가장 오래 일하게 되는 파트너 김민수(현 엑스엘게임즈 이사)를 채용하게 된다. ‘리니지’ 에서 송재경은 과거 ‘바람의 나라’ 에서 시도치 못 한 다양한 기술을 도입한다. 예를 들면 ‘바람의 나라’ 처럼 도트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3D 스튜디오 맥스로 캐릭터를 랜더링 작업한 후 2D로 변환해 게임에 적용하는 등인데, 당시로서는 꽤나 선진적인 시도였다.
이후 IMF 구제금융 신청을 앞두고 대한민국의 경기가 전체적으로 불황이던 시절, 송재경이 근무하던 아이네트 역시 경영 악화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엔씨소프트 대표 김택진으로부터 영입 제의가 들어온다. 김택진은 과거 송재경이 한글과컴퓨터에서 근무할 당시 현대정보기술(HIT)에 재직 중이었는데, 양사의 조인트 프로젝트를 통해 1주일에 한 번씩 만나며 친해졌고 이후 넥슨 시절에도 김정주와 함께 3인이 만나 몰래 밤중에 술을 마시곤 했다(90년대에는 12시 이후 술집 영업이 금지되었었다). 훗날 한국 게임업계를 주름잡는 3인의 만남은 그 시절부터 이루어졌다.
결국 송재경은 김택진의 러브콜을 받아들여 개발 중이던 ‘리니지’ 프로젝트와 함께 당시 벤처기업이었던 엔씨소프트로 향한다. 결과적으로 ‘리니지’는 엔씨소프트 성공신화의 시초가 된다. 결국 ‘리니지’는 1년 후인 98년 11월, 엔씨소프트에서 최종 출시되어 ‘바람의 나라’와 함께 국내 온라인게임 시장을 선두에 서서 견인하기 시작한다.
90년대 후반 온라인게임의 부흥을 이끈 ‘바람의 나라’와 ‘리니지’(심지어 두 게임 모두 지금까지 인기리에 서비스 중이다!)가 모두 송재경의 손에서 탄생한 것을 보면, 그의 존재가 한국 온라인게임 업계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의 나라’와 ‘리니지’의 성공은 당시 ‘스타크래프트’와 함께 PC방 열풍을 일으켰으며, 나아가 한국 가정에 초고속인터넷통신망을 보급하는 데 일조한다. 또한 위 게임들의 성공신화를 보고 수많은 인재들이 온라인게임 업계에 뛰어들었으며, 이는 한국이 세계 온라인게임 시장을 주도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 송재경의 대표작이자 엔씨소프트 성공신화의 주역 ‘리니지’
자신만의 회사를 차리다
‘리니지’와 ‘바람의 나라’를 통해 온라인게임 산업의 기틀을 잡은 송재경. 이후 다수의 온라인게임들이 쏟아져나옴에 따라 국내 게임업계의 대세는 패키지게임에서 온라인게임으로 전환되기 시작했으며, 엔씨소프트 부사장이자 개발총괄을 맡고 있던 송재경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리니지’의 성공적 런칭 이후 엔씨소프트는 의욕적으로 사업을 확장해 2000년 여름, 미국 지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엔씨소프트의 미국 사업은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당시 미국에서는 풀 3D MMORPG ‘에버퀘스트’가 출시되어 센세이션을 일으키던 시기였다. 그 상황에서 2D 게임인 ‘리니지’는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고, 사업이나 마케팅적 부분에서도 서투른 면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고자, 송재경은 역사적인 계약을 성사시킨다. 당시 EA가 ‘울티마 온라인 2’ 프로젝트를 취소하며 해당 게임 개발팀 전체가 공중에 붕 뜬 상태였는데, 이를 송재경이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당장 오스틴으로 달려간 송재경은 ‘로드 브리티쉬’ 리차드 게리엇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이 둘의 계약은 2001년 5월 미국에서 열린 E3 행사장에서 이루어졌으며, 송재경과 리차드 게리엇의 역사적 협업을 성사시킨다.(‘타뷸라 라사’ 프로젝트가 취소되고 리차드 게리엇이 ‘우주 먹튀’ 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는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이후 송재경은 리차드 게리엇과 함께 ‘타뷸라 라사’ 프로젝트의 고문 겸 어드바이저를 맡아 반 년 정도 미국에서 머문다. 당시 미국에서 습득한 서구식 기업경영방식은 현재 엑스엘게임즈에도 상당수 녹아 있다.
이후 2002년 초, 송재경은 ‘타뷸라 라사’ 프로젝트에서 나와 한국으로 돌아온 뒤 엔씨소프트의 차기작인 ‘리니지 포에버’ 프로젝트를 총괄하게 된다. ‘리니지 포에버’ 프로젝트는 ‘뮤’ 의 흥행으로 인해 대세가 된 3D MMORPG의 흐름을 쫓아가기 위한 것으로, 미국 지사와 한국 본사의 모든 힘을 하나로 모은 대형 프로젝트였다. ‘리니지 포에버’의 엔진팀과 프로그래머 일부는 미국에, 나머지 프로그래머와 기획팀, 아트팀 등은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송재경은 1년여 동안 미국과 한국을 수없이 오가며 개발에 힘쓴다.
그러나 송재경은 2002년 말, 김택진 대표와의 불화 등 일신상의 이유로 엔씨소프트를 떠난다. 이는 김정주 회장과의 다툼으로 넥슨을 퇴사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인데, 추후 송재경은 당시 다툼의 원인에 대해 ‘지금 보면 사소한 문제였다’ 라고 일축(지금은 김정주와 김택진 두 사람과 모두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한다. 사실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 사이의 관계만 보더라도, 두 명의 천재가 만나면 의견 차이를 보이며 헤어지는 일이 잦다. 송재경과 김정주, 김택진 사이의 관계도 그러했다. 무엇보다 송재경은 자신의 의지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커다란 무대를 필요로 했다.
결국 송재경은 2003년 3월 엔씨소프트 부사장에서 공식 사임하고, 이후 그가 맡고 있던 ‘리니지 포에버’ 프로젝트는 공중 분해된다. ‘리니지 포에버’ 프로젝트에 참여한 개발자들의 개성이 너무 강해서였을까. 송재경 재직 중에는 그의 그릇에 담겨 있던 이들은 그의 퇴사를 기점으로 제각기 흩어지게 된다. 결국 ‘리니지 포에버’는 아래아한글 메인 코더였던 우원식 현 엔씨소프트 상무를 중심으로 한 ‘아이언(현 아이온)’ 프로젝트, 기획팀장이었던 김지호 전 마리텔레콤 이사(단군의 땅 제작자)를 중심으로 한 소셜게임 프로젝트 ‘얼터라이프(제작 중지)’ 등 몇 개의 프로젝트로 갈라지고, 현재 엔씨소프트가 개발 중인 ‘리니지 이터널’ 역시 이 프로젝트의 연장선이다.
쉽지 않은 회사 창립과 최초의 실패작
엔씨소프트를 퇴사하기로 결심한 2002년 말, 그동안 승승장구해 오던 송재경의 인생에 잠시 쉼표가 찍힌다. 엔씨소프트를 퇴사하기로 결심한 송재경은 2002년 11월부터 자신의 회사를 창립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가 퇴사 후 1개월만에 자신의 회사인 엑스엘게임즈를 설립한다. 학창 시절 프로그래밍에 꽂혀 서울대와 카이스트까지 일사천리로 진학하거나, 게임에 꽂혀 한글과컴퓨터를 가차 없이 퇴사한 것처럼, 송재경은 무엇인가에 꽂히면 머리 속이 그것만으로 가득 차고 이를 끝까지 밀고나가야 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거기에 긍정적인 천성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과감한 창업을 시작한다.
▲ 엑스엘게임즈의 첫 작품 ‘XL1’
2003년 4월, 엑스엘게임즈 창립 당시 멤버는 고작 네 명. 시작은 ‘리니지’ 프로젝트 때부터 함께 했던 김민수를 비롯해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꾸린 조그마한 스튜디오였다. 개발자에서 회사 대표가 되면서부터 송재경은 오로지 개발만 바라볼 수 없는 몸이 된다. 송재경이 모아 온 자금만으로 시작했을 때는 회사 규모도 작았고 외부 간섭도 없었기에 별다른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나, 이후 회사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각종 투자가 이루어지고, 타 업체와의 계약도 신경써야 하는 등 개발 외적인 부분까지도 책임져야 할 상황이 온 것이다.
이윽고 찾아온 첫 작품의 흥행 실패 역시 송재경을 힘들게 한다. 엑스엘게임즈는 창립 3년 만에 첫 작품인 ‘XL 1’을 세상에 내놓는다. 제목부터 엑스엘게임즈의 첫 번째 게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XL 1’은 놀랍게도 MMORPG가 아닌 레이싱 게임이었다. ‘송재경 하면 MMORPG’ 라는 공식을 과감하게 깬 것이다. 뭔가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고 싶었던 욕심과 함께, 당시 직원들의 취향을 한껏 반영(정작 송재경 본인은 레이싱 게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한 결과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XL 1’은 흥행에 실패하고 만다. 송재경 개발 인생 최초의 쓴맛이었다.
처음에는 캐주얼한 느낌으로 게임을 제작하고자 했는데, 욕심이 생겨 프로젝트가 점점 커졌다. 사실적인 게임을 추구하자는 방향으로 물리 엔진까지 직접 개발하다 보니, ‘카트라이더’처럼 가벼운 게임보다는 ‘그란투리스모’처럼 사실적인 게임을 만들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래픽이나 물리엔진 등은 1류 레이싱 게임에 비하면 뒤떨어지고, 캐주얼한 느낌도 없는 어정쩡한 결과물이 나왔다. 무엇보다 큰 패인은 나 자신과 직원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퍼져있던 엘리트주의였다. 예를 들면 차량 라인업 부분에서 실제 존재하는 차들을 게임 내에 구현하려니 라이선스 문제가 걸렸고, 차량의 이름만 살짝 바꿔서 구현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아예 새로운 차를 디자인했는데, 정작 유저들은 기존 페라리 등의 명차를 원하더라. 이러한 요소들이 합쳐져 결국 흥행 실패라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나 싶다. -송재경이 말하는 ‘XL1’의 패인 |
‘XL 1’의 실패는 엑스엘게임즈에 크나큰 타격을 입혔다. 창립 당시 투입한 자금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고, 야심차게 출시한 게임은 유저들의 외면을 받았다. 긍정적 마인드의 송재경도 이때만큼은 우울 모드에 빠져 회사를 포기할 지, 다른 곳에 팔 지, 아니면 포기하고 다시 엔씨소프트로 돌아갈 지를 고민할 정도였다. 사실 많은 창업자들은 이러한 실패를 넘지 못하고 쓰러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송재경은 많은 일을 겪으면서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를 버티게 해 준 것은 ‘게임은 결국 기업 대 고객(B2C) 산업이다’ 라는 모토였다. 기업 간의 줄다리기나 정치 싸움에 치중하지 않고도, 유저들이 알아줄만한 좋은 게임을 만들면 자연스레 성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좌우명은 송재경이 ‘XL 1’의 실패를 딛고 일어서게끔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송재경은 가장 큰 패착이었던 엘리트주의를 버리고, 유저 입장에서의 게임을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바로 ‘아키에이지’다.
경영과 개발 양립, 그리고 ‘아키에이지’
송재경은 ‘XL 1’ 의 실패를 딛고 2006년 하반기 ‘아키에이지’ 의 개발을 시작한다. 2013년 1월 2일공개서비스를 시작한 ‘아키에이지’는 2013년 1월까지 6년 넘는 개발기간과 400억 원의 자금을 투입한 대작 MMORPG로, 게임 속에서의 무한한 자유를 추구하고 있다. ‘아키에이지’를 개발하며 엑스엘게임즈는 30여 명의 스튜디오 규모에서 500명 이상의 대규모 개발사로 성장했다. 송재경 역시 개발자와 경영자로서 양쪽의 역할을 수행하며, ‘아키에이지’ 의 성공적인 런칭을 이뤄냈다.
▲엑스엘게임즈의 야심작 ‘아키에이지’
약 9년간 엑스엘게임즈를 운영해오며 송재경은 뚜렷하고 독특한 경영 철학을 선보였다. 과거 전길남 교수와 리차드 게리엇, 그리고 엔씨소프트 등에서 배운 다양한 기업 문화의 정수만을 농축시켜 적용시킨 것. 전길남 교수 실험실에서 배운 자유롭고 편하지만 뚜렷한 결과를 요구하는 회사 분위기, 리차드 게리엇에게 배운 직원 화합 프로그램인 주간 종례, 엔씨소프트에서 배운 직원 복지와 능력개발 프로그램 등… 이러한 정책 덕분에 엑스엘게임즈는 개발자가 개발에만 전념할 수 있는 직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여기, 송재경의 경영 철학과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다. 업무 종례 시간, 신입사원 한 명이 “주인 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자 송재경이 나서 “이 회사는 내 회산데 왜 여러분들이 굳이 주인 의식을 가지려고 합니까? 그냥 맡은 바 임무에만 충실하시고 일찍 집에 들어가서 쉬세요!” 라고 말한 것이다. 농담 섞인 발언이긴 했지만, 이 말에는 송재경이 가지고 있는 경영철학의 일면이 담겨 있다. 주인의식이란 사용자(기업)측 관점에서 주인이 아닌 사람에게 주인 ‘의식’을 가지게끔 하는 억지 논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엑스엘게임즈에서는 ‘주인 의식’ 이 아니라 ‘직원 의식’을 가지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주인 의식을 갖기 전 나와 회사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이러한 의식에 대한 의심을 가지자는 뜻이다.
온라인게임의 아버지라 불리는 송재경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500명 이상의 직원을 거느린 대형 개발사 대표임에도 불구하고 ‘아키에이지’ 업데이트를 위해 현장에서 뛰어다니며, 스트레스를 받으면 미친 듯이 코딩을 하는 천상 개발자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은퇴하는 그 날, 혹은 그 이후에도 게임 코드를 붙잡고 있을 지도 모른다.
▲경영자와 게임 개발자 두 역할을 소화하고 있는 송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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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메카 취재팀장을 맡고 있습니다jong31@gamemec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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