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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바스텐부터 칸나바로까지, 피파온라인3에 구현된 역대 발롱도르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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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해 동안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에게 수여하는 '발롱도르'


2015년 초 핫이슈는 '복고'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시작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복고열풍'은 지난해 말 무한도전의 '토토가'로 정점을 찍었다. 이후 음악을 비롯해 영화, 방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난 시대를 재조명 중이며, 이러한 현상은 게임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대표 주자는 피파온라인3다. EA코리아와 넥슨은 세계 축구계를 달구고 있는 스타 플레이어들을 충실히 구현하는 한편, 과거 빛나는 영광을 누린 '레전드 선수'들을 게임에 추가 중이다. 덕분에 유저들은 호날두와 메시, 펠레, 반 바스텐이 함께 경기장을 누비는 광경을 게임으로 접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 그야말로 '복고' 키워드에 어울리는 형태다. 


뿐만 아니다. 매번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메시 vs 마라도나', '셰브첸코 vs 토레스' 등의 논쟁을 게임을 통해서도 풀어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도출된 결과가 100% 옳은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일말의 재미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과거 축구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이들은 앞서 언급한 레전드 선수들이 생소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게임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은 자연스럽게 반감된다. 이에 게임메카에서는 피파온라인3에 구현된 '축구 레전드'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마련해 보았으며, 오늘 대상은 역대 발롱도르 수상자들이다.



피파온라인3에 구현된 21명의 레전드 선수


2014년 12월을 시작으로 피파온라인3는 지금까지 총 21명의 레전드 선수를 게임에 구현했다. 1960대를 풍미한 펠레를 비롯해 얼마 전 은퇴한 반 데 사르까지 이들이 활약한 시기는 폭넓다.



▲ 지난 윈터쇼케이스에서 공개된 '피파온라인3 2차 월드 전설 영상'


이 중 오늘 알아볼 발롱도르를 수상한 이는 반 바스텐과 마테우스, 마이클 오웬, 파벨 네드베드, 셰브첸코, 칸나바로의 총 6명이다


※ 현재 발롱도르는 지난 2010년 FIFA가 선정하는 'FIFA 올해의 선수상'과 프랑스 축구전문지 프랑스 풋볼의 '발롱도르'가 통합된 시상식이다. 본문에서 소개할 역대 발롱도르 수상자는 프랑스 풋볼의 '발롱도르'를 기준으로 했다.


'스트라이커의 교과서' 마르코 반 바스텐



▲ 발롱도르를 3회나 수상한 마르코 반 바스텐 (이미지 출처: FIFA.com)


마르코 반 바스텐은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세계 축구계를 주름잡은 스트라이커다. 네덜란드의 사상 첫 유로 우승 주역인 그는 자국팬들에게 '플라잉 더치맨'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네덜란드 최고의 선수로 여겨진다. 


반 바스텐은 1988년과 89, 1992년에 AC 밀란 소속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1987년에는 팀 동료이자 같은 네덜란드 대표 출신인 루드 굴리트가 발롱도르를 차지해 '3연속 네덜란드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반 바스텐이 프로 데뷔를 한 것은 16세 때다. 이른 나이부터 두각을 나타내 소속 팀 아약스의 성공을 이끌었다. 당시 반 바스텐은 1983-84시즌부터 86-87시즌까지 112경기 117골을 넣었고, 4시즌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다. 이러한 활약에 AC 밀란은 반 바스텐를 영입하며 세계 축구팬들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이적 후에도 그의 활약은 계속됐다. 현대 압박 축구를 탄생시킨 아리고 사키의 팀에서 반 바스텐은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와 함께 에이스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그의 활약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상대 팀 선수들의 거친 견제와 압박으로 인해 20대 후반 들어 끊임 없는 부상에 신음했다. 그 결과 반 베스텐의 발목은 시즌 내내 정상이 아니었고, 결국 1995년 8월에 은퇴를 선언했다. 서른살을 겨우 넘긴, 아직 앞날이 창창한 선수가 너무 빨리 그라운드를 떠난 것이다.

은퇴 이후 반 바스텐은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자신이 프로 생활을 시작한 아약스를 비롯해 SC 헤이렌베인, AZ 알크마르(이상 네덜란드 팀)에서 지휘봉을 쥐었으며,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 반 바스텐에 대한 말.말.말


"반 바스텐은 모든 공격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나에게 조차도 그랬고 모두가 그와 닮기를 원할 정도였다." - 조지 웨아 (아프리카의 축구 레전드)


"현역 시절의 그와 비교될 실력은 갖춘 선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유로 88에서 넣었던 그의 골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 반 니스텔루이


"난 10개의 평범한 골과 9개의 아름다운 골 중 10개의 평범한 골이 좋다. 공격수는 골이 모든 것이니까." - 반 바스텐


"축구계는 그들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잃었다." - 아드리아노 갈리아니 AC 밀란 부구단주


▲ 피파온라인3에 구현된 마르코 반 바스텐의 인게임 외형



'전천후 미드필더' 로타어 마테우스


독일의 전설적인 축구 선수 로타어 마테우스는 1979년 분데스리가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프로로 데뷔했다. 데뷔하자마자 주전자리를 꿰찼고, 소속팀이 UEFA컵과 포칼컵 준우승을 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이후 1984년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해 4시즌을 보냈고, 매 시즌마다 최소 10골 이상을 터트리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주 포지션이 스워퍼나 수비형 미드필더인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적이다. 1988년에는 인테르로 이적해 그 해 이탈리아 수페르컵에서 우승했고, 1991년에는 다시 한 번 UEFA컵을 거머쥐었다. 

1990년 월드컵에서는 마라도나가 뛰는 아르헨티나를 물리치고 월드컵 우승을 쟁취했다. 그리고 그해 마테우스는 발롱도르를 수상했고, 1991년에는 FIFA 올해의 선수 초대 수상자에 선정됐다. 

▲ 발롱도르 수상 당시 마테우스의 모습 (이미지 출처: FIFA.com)


마테우스는 넓은 시야와 패싱 능력, 태클, 정확한 중거리 슈팅 등 미드필더에게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춘 선수였다. 전성기 시절에는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 활약했고, 말년에는 스위퍼 위치에서 경기를 조율했다.

이와 같은 활약상을 남긴 마테우스는 1992년 바이에른 뮌헨으로 복귀 후 슬럼프를 겪었고 2000년 미국의 메트로스타즈로 이적했다. 이곳에서 1시즌을 소화한 마테우스는 마지막 독일 대표팀 옷을 입은 유로 2000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 마테우스에 대한 말.말.말


"그 동안 같이 뛰어본 선수 중 '로타어 마테우스'가 제일 두렵고 강한 라이벌이었다." - 디에고 마라도나


▲ 피파온라인3에 구현된 마테우스의 인게임 외형


▲ 피파온라인3 World Legend 선수 실제 플레이 영상


'원더보이' 마이클 오언

마이클 오언은 2000년대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공격수다. 대표팀 역사상 4번째로 많은 득점을 기록한 그는 2001년에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 어린 나이에 발롱도르를 수상한 마이클 오언


1979년에 태어난 오언은 레전드로 꼽기에는 다소 젊은 선수다. 그와 같은 나이의 선수로는 피를로, 세자르, 팀 하워드, 디에고 포를란 등이 있으며 이들 모두 아직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이른 나이에 은퇴한 오웬은 전성기 시절 눈에 띄는 활약상을 남겼다. 리버풀 유소년팀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1996년 리버풀 성인팀에 입단해 19세의 나이로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을 2회 연속 차지했다. 그리고 00-01 시즌 소속팀의 '미니 트레블(FA컵, 리그컵, UEFA컵 우승)을 이끄는데 성공, 라울 곤잘레스와 올리버 칸을 제치고 발롱도르를 거머쥐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20세 초반에 불과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꾸준히 활약한 오언은 2004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고, 이 때부터 하락세가 시작됐다. 레알의 유니폼을 입은 오언은 당시 주전 스트라이커였던 호나우두, 라울과의 경쟁을 이겨내지 못했다. 두자릿수 이상 득점을 기록했으나 결국 1년 만에 뉴캐슬로 적을 옮겼고, 지긋지긋한 부상과의 악연을 떨쳐내지 못했다. 이 때 오언은 4년간 출장 횟수가 약 70번에 불과했을 정도로 몸상태는 심각했다.

결국 2009년, 자유 이적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오언은 주전 선수들의 체력 안배를 위한 '교체 카드'로 자주 활용됐다. 하지만, 자신과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한 치차리토가 팀에 합류한 이후 입지가 많이 줄어들었고, 12-13 시즌 스토크 시티로 다시 한 번 소속팀을 옮겼다. 이적 후 리그 8경기에 출전해 1골을 넣은 오언은 2013년 3월 은퇴를 선언하며 자신의 커리어를 마감했다.

전성기 시절 오언은 폭발적인 스피드를 앞세운 돌파로 많은 골을 양산했다. 화려한 플레이보다는 간결한 터치와 드리블로 수비수를 따돌렸고, 득점 상황에서의 정확한 슈팅으로 좀처럼 찬스를 놓치지 않았다.

※ 마이클 오언에 대한 말.말.말


"그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선수다." - 베켄바우어


"그는 리버풀의 전설이다." - 페르난도 토레스


▲ 피파온라인3에 구현된 오언의 인게임 외형


'2개의 심장' 파벨 네드베드

파벨 네드베드는 2000년대 유벤투스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본래 포지션은 레프트윙이지만, 중앙 미드필더와 공격수까지 소화할 수 있는 선수였다. 

네드베드는 지금도 유벤투스의 레전드로 추앙받고 있지만, 이적 당시에는 큰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동료들과 호흡이 맞지 않아 경기에서 겉도는 장면이 자주 나왔고, 전임자 지네딘 지단과 많은 비교를 당했다. 그러나 적응을 마친 그는 팀 공격을 진두지휘해 스쿠데토(이탈리아 리그 우승 트로피) 획득에 크게 일조했다. 또한, 02-03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 레알 마드리드전에서는 승리를 확정짓는 쐐기골을 넣어 팬들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 유벤투스의 아이콘 파벨 네드베드

네드베드가 유벤투스에 속해 있을 당시 팀은 '승부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홍역을 치뤘다. 이로 인해 유벤투스는 우승 박탈과 2부 리그 강등이라는 중징계를 받았고,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를 비롯한 주전급 선수들이 대부분 팀을 떠났다. 

이 때 네드베드에게도 수많은 오퍼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유벤투스 팬들이 준 사랑에 보답할 필요가 있다. 이제부터 세리에B(2부 리그)는 나의 챔피언스리그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잔류했다. 이후 네드베드는 델 피에로, 부폰과 함께 1년 만에 팀을 승격시켰으며, 2시즌을 더 뛰어 유벤투스를 챔피언스리그로 이끌었다.

네드베드의 플레이 스타일은 '헌신'과 '체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양발을 자유자재로 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일화는 축구팬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그리고 팀 훈련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선수로도 알려져 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네드베드는 90분 내내 지치지 않고 열정적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다. 여기에 정확한 크로스 능력을 갖췄고, 프리킥과 중거리 슈팅까지 가능해 어느 포지션에 두어도 상대를 위협할 수 있는 선수로 평가됐다. 

※ 파벨 네드베드에 대한 말.말.말


"그는 축구선수로서의 꿈을 키우게 해준 나의 우상이다." - 마렉 함식


"나는 녹색 잔디만 있다면 세리에A든 B든 상관없다. 이제부터 세리에 B는 나의 챔피언스리그가 될 것이다." - 파벨 네드베드 (승부조작 사건 이후)


"현대 축구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선수는 다름아닌 네드베드다. 그와 같은 선수는 없다. 그는 절대 멈추는 법이 없다." - 마르셀로 리피


"제가 최고라구요? 글쎄요. 네드베드가 은퇴했던가요?" - 카카 (2007년 발롱도르 수상 직후 기자들이 '당신이 세계 최고다'라고 말하자)


▲ 피파온라인3에 구현된 네드베드의 인게임 외형


'무결점 스트라이커' 안드리 셰브첸코

셰브첸코는 우크라이나와 AC 밀란의 레전드로 불리우는 선수다. 2000년대 초중반 호나우두, 티에리 앙리, 루드 반 니스텔루이와 함께 '세계 4대 스트라이커'로 꼽혔으며, 축구 변방국이었던 우크라이나를 월드컵 8강으로 이끌었다.

셰브첸코가 주목을 받은 것은 바르셀로나와의 97-98 챔피언스리그 예선전이다. 당시 바르셀로나는 최고의 전력을 보유했고, 우승 1순위로 평가된 강호 중의 강호였다. 이에 반해 셰브첸코의 소속팀 디나모 키예프는 상대적으로 무명에 가까웠다. 모든 축구팬들이 바르셀로나의 손쉬운 승리를 예상했지만, 셰브첸코는 누캄프 원정에서 헤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4:0 대승을 주도했다. 이듬해 챔피언스리그 득점왕과 최우수 공격수를 수상한 셰브첸코는 AC 밀란으로 이적하며 본격적인 활약을 시작했다.


▲ 무결점 스트라이커로 이름을 날린 안드리 셰브첸코

밀란에 입성한 셰브첸코는 데뷔 시즌 득점왕을 비롯해 수 많은 기록을 남겼다. 02-03 시즌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부진했지만, 그 외 시즌에서는 모두 두자릿수 득점을 넣으며 공격 본능을 뽐냈다. 특히 03-04 시즌 셰브첸코는 리그 득점왕과 발롱도르를 동시에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와 같은 활약을 이어온 셰브첸코는 2006년 신흥 강호로 떠오른 첼시로 이적했다. 그러나 새로운 리그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피지컬과 멘탈 문제로 인한 기량 저하 현상이 나타났다. 결국 2009년까지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셰브첸코는 AC 밀란을 거쳐 2009년 친정팀 디나모 키예프로 복귀했다. 본국으로 돌아온 그는 나름의 활약을 펼쳤으며, 지난 2012년 은퇴를 선언한 뒤 정계 진출을 예고했다.

셰브첸코는 잉글랜드 무대 입성 이후 내리막을 걸었지만, 우크라이나와 이탈리아 리그에서 보여준 활약은 전세계 축구팬들의 환호를 받기 충분했다. 특히, 셰브첸코의 위치 선정과 공을 잡지 않았을 때의 움직임, 문전 앞에서의 침착함은 지금도 많은 공격수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 안드리 셰브첸코에 대한 말.말.말


"우린 한 명에게 당했다." - 루이스 피구 (1997년 우크라이나 vs 포르투갈 전 패배 후)


" 셰브첸코가 출전하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겐 공포다." - 루디 펠러


"나보다 뛰어난 스트라이커가 있냐고요? 셰브첸코라면..." - 호나우두


▲ 피파온라인3에 구현된 셰브첸코의 인게임 외형


'베를린의 장벽' 파비오 칸나바로


발롱도르를 수비수가 수상한 사례는 많지 않다. 베켄바우어와 마티아스 잠머를 '수비수'로 본다면 발롱도르 역사상 수비수가 수상한 것은 칸나바로를 포함해 3명 뿐이다. 이 중 칸나바로는 유일한 '전문 수비수'다.


▲ 세계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지금도 회자되는 파비오 칸나바로 (이미지 출처: FIFA.com)

파비오 칸나바로가 두각을 나타낸 건 파르마 시절이다. 소속팀의 코파 이탈리아, UEFA컵 우승을 주도했고, 이후 유벤투스로 이적해 변함없는 활약을 펼쳤다. 대표팀 선수로는 2006 월드컵의 주인공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당시 이탈리아는 승부조작 등 내부적인 문제가 많았지만, 상대 공격을 모두 차단하는 그가 있어 우승컵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

2006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칸나바로는 2년 간 팀의 수비를 이끌었고, 유벤투스로 복귀해 1시즌을 소화했다. 이후 그에게 노쇠화로 인한 기량 저하 현상이 나타났고, 중동 리그로 떠나 수 년간 현역 생활을 이어오다 지난 2011년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이후 칸나바로는 인도 슈퍼리그 실리구리에 입단하며 잠시 선수로 복귀했으며, 2014년 광저우 리피 감독의 후임으로 지휘봉을 잡게 됐다.

칸나바로는 중앙 수비수치고는 작은 키(176cm)를 지녔다. 하지만, 수비수로서의 위치 선정 능력과 뛰어난 점프력 덕분에 상대 공격수와의 경합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특히, 2006년 월드컵에서 활약이 돋보였다. 칸나바로는 네스타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철벽 수비진을 구축해 '이탈리아의 골문 앞에는 베를린 장벽이 세워져 있었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 파비오 칸나바로에 대한 말.말.말


"칸나바로만큼 큰 수비수는 본 적이 없다." - 비에리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가장 강력한 세계 1위의 수비수다." - 마르첼로 리피


"이탈리아의 골문 앞에는 베를린 장벽(칸나바로)이 세워져 있었다." - 월드컵 이후 독일 언론


"공은 내 앞에서 멈춘다." - 파비오 칸나바로

 


▲ 피파온라인3에 구현된 칸나바로의 인게임 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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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온라인 3'는 차세대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향상된 전략플레이와 생생한 그래픽을 지원하며, 이를 통해 한층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게임 플레이 경험을 제공할 예정이다. 전세계 40개 국가 대표팀과 30개 ...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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