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외로운 존재다. 특히나 현대인들은 더욱 그렇다. 편지나 전보밖에 없던 과거와 비교하면 사람과 사람간의 의사소통 수단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시간과 공간의 제약조차 초월해 비약적 발전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서 행복이 실현되었을까?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인들은 여전히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 그것도 과거 그 어느 시대의 인간들보다 더욱 강하게 말이다.
정보화를 향한 사회 구조 변화와 기술의 발달은 사람들의 삶을 끊임없이 간접화시키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자신이 원하는 수준으로 손쉽게 제한될 수 있다. 매일같이 인터넷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보통 그 사람의 이름은커녕 나이나 성별조차 알 수 없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끊임없이 간접화 되고, 심지어는 집안이나 같은 사무실에서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음성 대신 메신저를 이용하여 대화하곤 한다(필자는 한때 TV에서 방영됐던 아들과 어머니가 메신저로 채팅하는 공익광고를 보며 혀를 찬적이 있다).
▶현대인은 외롭다
인간관계의 양적 팽창에서 오는 질적 저하라고 할까. 가끔 필자는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총 질량은 일정한데, 그 절대수가 증가하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질이 떨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인간관계의 인플레이션이라고 표현한다면 옳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 그 가치가 저평가되는 사회가 바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대의 모습인건 아닐까.
▶타이틀 화면
육성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는 어찌 보면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게임 내에 등장하는 모든 개체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하게 되어있다. 그것이 RPG에서의 레벨 업이던, 액션 게임에서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것이던, 혹은 테트리스 같은 퍼즐게임에서 게임의 난이도가 점점 증가하던, 게임에서 ‘성장’은 늘 일어난다. 게임에서 대체 플레이어가 전혀 성장하지 않는다면 무슨 재미로 게임을 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모든 게임에는 캐릭터의 성장, 즉 육성이라는 요소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대관절 육성 시뮬레이션은 뭐란 말인가? 게다가 시뮬레이션이라는 이름은 왜 갖다 붙였을까? 프린세스 메이커 리파인 2004를 살펴보면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게임의 주체가 되는 ‘딸’, 즉 육성의 대상은 명목상의 주인공인(오프닝에만 잠깐 등장하며 게임 플레이 중에는 그 존재를 느끼기조차 힘든) 아버지를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접촉하게끔 되어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기이한 구조다. 게이머가 직접 딸의 입장에서 플레이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아버지라는 매개물을 삽입하여 마치 플레이어와는 분리된 별개의 대상을 육성하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시뮬레이션이라는 간접적이고 가상적인 접근방법으로도 모자라, 육성의 대상을 게이머에게서 분리시킴으로써 플레이어는 ‘딸’이라는 육성의 대상에게 보다 방관자적이고 간접적인 위치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가끔은 바캉스도 좋겠지.. 'ㅁ`)y-~
결국 플레이어는 자신과 분리된 ‘딸’의 육성에 대해 플레이어의 분신 캐릭터를 육성하는 것 보다 훨씬 무덤덤하고 객관적인, 때로는 가학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다. ‘딸’은 얼마든지 생성시킬 수 있으며(마치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클론인간 아야나미 레이처럼), 그들 앞에 놓인 다양한 미래가 항시 밝은 것만도 아니다.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의 제목처럼, 플레이어는 ‘딸’을 공주나 그와 비슷한 급의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목표이긴 하지만, 그러한 엔딩을 몇 번 경험하다 보면 자연스레 술집 여급이나 창녀라는 미래를 향해 딸의 진로를 몰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과 아르바이트는 게임의 기본이 된다.
사실 프린세스 메이커 리파인 2004는 90년대 초반에 도스용으로 발매되었던 프린세스 메이커를 리메이크 한 게임이다. 라메이크라곤 해도, 당시의 16색이었던 그래픽을 트루컬러 수준으로 끌어올린 다음 약간의 성우 연기를 더한 수준이다. 게임의 시스템은 좋게 말해서 충실히 재현되었고, 정직히 말해 요즘 기준으론 너무 낡았다. 하지만 원작 게임이 워낙 훌륭했기 때문에 과거 프린세스 메이커 1탄을 즐겨보지 못한 신세대 게이머라면 역으로 신선한 느낌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게임의 전반적인 플롯은 상당히 단순하다. 어느 게임에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어중간한 환타지 세계관의 왕국에 마왕이 나타났다! 위기에 빠진 왕국을 용자인 주인공이 구해내고 나라의 영웅이 된다! 주인공은 왕이 내리는 온갖 보상을 사양하고 나라의 장래를 위해, 특히 나라의 장래는 아이들에게 달려있다고 판단하여 여자아이 한 명을 입양, 훌륭하게 키워내기로 결심한다는 것이 프린세스 메이커 리파인 2004의 배경 설정이다.
▶주인공(?)은 마왕의 손에서 왕국을 지킨 용사였다!?
게임 초반에 주인공의 성과 딸의 이름,(딸은 자연히 아버지의 성을 따르게 된다) 혈액형과 생일을 설정할 수 있으며 이는 딸의 성향에 일정부분 영향을 미친다. 게임은 딸의 10번째 맞는 생일부터 시작되며 이후로 한 달에 3번의 스케줄을 세워 딸을 육성하게 된다. 딸의 육성은 크게 나누어 일(노동)과 교육, 휴식으로 구분지을 수 있으며 일을 제외한 모든 행동에는 돈이 필요하다(무책임하게도 교육이나 휴식, 아이템 구입에 필요한 모든 돈은 열 살배기 딸이 벌어온 돈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딸은 체력이나 지력, 피로도, 도덕심 등의 각종 특성치를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일이나 교육을 통해 각 특성치가 개발된다. 각각의 교육은 관련된 특성치에 긍정적인 요소만을 미치지만, 일의 경우 특성치를 감소시키기도 한다.
▶매년 10월에는 미와 용맹을 가리는 축제가 열린다.
예를 들어 술집 아르바이트는 도덕심을 감소시킨다. 게이머는 교육과 일, 휴식(휴식을 제외한 모든 행동은 피로도를 증가시킨다)을 적절히 분배하여 딸을 키워나가야 한다. 딸의 특성치에 따라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증가되며, 여러 가지 이벤트도 발생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벌목 아르바이트를 많이 한 딸이라면 근력이 크게 발달되며, 이는 여전사가 되는 밑거름이 된다. 매년 10월에는 축제가 벌어지는데, 이를 통해 비슷한 나이대의 다른 여자아이들과 무술 실력, 그리고 미모를 두고 경쟁을 벌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단조로운 구조는 쉽게 질리게 마련이다. 때문에 게임에는 무사수행이라는 RPG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무사수행은 딸이 직접 필드를 돌아다니면서 몬스터와 전투를 벌이거나 각종 아이템을 습득할 수 있는 모드다. 무사수행 모드는 게임의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딸은 무사수행을 위해 마을로 나가 각종 아이템 (검이나 갑옷, 투구 등)을 상점에서 구입/ 장비할 수 있다. 이 외에 왕을 알현한다거나 동네 사람에게 평판을 듣는 것, 딸에게 훈계를 한다거나 하는 특수한 명령어가 존재하지만 큰 역할을 하진 않는다.
▶무사 수행과 전투장면
프린세스 메이커 리파인 2004의 최종목표는 딸을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내는 것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선 어려서부터 목표로 하는 분야를 확실히 공부시키고 관련된 아르바이트를 많이 시켜야 한다. 하지만 유혹은 언제나 있는 법. 술집 아르바이트나 그와 비슷한 위험한(?)일은 성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것보다 보수가 훨씬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위험한 일을 많이 시키다보면 결국 성인이 됐을 때 뒷골목에서 남자들을 상대하는 딸의 모습을 보게 되고 만다. 인생이란 늘 그런것이다. 뿌린대로 거두는 것.
▶딸의 모습은 나이에 따라 변화한다.
어떤 의미에서 프린세스 메이커 리파인 2004는 상반된 평가가 나올 여지가 많다. 게임 자체는 충분히 훌륭하지만 현재의 기준으로는 너무 단순하다는 느낌이 든다. 때문에 아직 프린세스 메이커를 플레이 해보지 못했거나 90년대의 감동을 다시금 느끼고 싶은 게이머에게만 조심스럽게 추천하고자 한다.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