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
받은 게임
해가 거듭될수록 다양한 게임들이 나오고 있다. 과연 게임의 끝은 어디일까? 게임 개발자들은 과거에는 없었던, 생각은 있었지만 기술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보류시켰던 작품들을 새롭게 다듬어 우리들에게 계속 선보이고 있다. 그 중에는 ‘헉’하고 놀랄 정도로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작품이 있는가 하면, 재미는 있지만 그다지 ‘필’이 오지 않는 작품도 있다. 오리지널 작품보다 일정 이상의 판매량을 보장하는 속편이 더 많이 등장하는 요즘 게임시장을 보면서 제대로 된 ‘필’을 느껴본 적이 오래되었다고 생각한 건 필자 혼자일까?
“게임을 처음 접했을 때 강렬한 ‘필’을 느꼈던 작품이 있습니까?”라고 누가 내게 물어 보면 필자는 몇 개의 작품을 예로 들며 설명할텐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와일드 암즈」다. 어떤 요소 때문에 ‘필’이 왔느냐고? 바로 게임의 로딩 시스템이다.
PS가 등장하면서 많은 게임들이 CD의 대용량을 이용해 만들어졌다. 롤플레잉게임 역시 그랬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장소가 바뀌거나 화면이 바뀔 때마다 데이터를 읽어들이는 시간, 바로 로딩시간이 걸린다는 점이었다. 카트리지 방식의 게임에 익숙했던 게이머에게는 비록 얼마 되지 않는 로딩시간도 불편함을 주는 요소다. 특히 이 던전에서 저 던전으로 옮길 때, 마을에서 누군가의 집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계속 발생하는 로딩시간은 상당한 불편함을 주었다. 하지만 「와일드 암즈」는 틀렸다. 해당 던전이나 건물의 데이터만 읽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갈 수 있는 옆 장소의 데이터까지 미리 함께 읽어 플레이어가 장소를 이동하면 데이터를 처리, 즉시 화면상에 구현시켜 로딩시간을 최소한으로 막은 것이다. 게임 초반에 주인공을 조작하다 옆 던전으로 이동하는 순간, 거의 느껴지지 않는 로딩시간 때문에 필자는 큰 감동을 받았다. 즉, ‘필’을 받은 것이다.
▲ '필'을 받았기에 별 생각도 안 해보고 마구 구입했던 관련 상품. 왼쪽이 마우스 패드, 오른쪽이 시계다 |
핵심 코드는
쥬브나일
‘필’을 받았기 때문인지 필자는 가장 좋아하는 롤플레잉게임 중 하나로 「와일드 암즈 2nd 이그니션」을 꼽는다. 뛰어난 시나리오와 독특한 연출, 명곡으로 가득한 음악 등 시리즈를 통틀어 매력들이 가장 많이 응축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와일드 암즈」에 큰 ‘필’을 받은 필자지만 솔직히 PS로 등장한 초대 「와일드 암즈」는 클리어하지 못했다. “시리즈의 원점격인 작품인만큼 언젠가는 꼭 클리어해야지”라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기회가 없었다. 뭐, 한 번 시기를 놓치자 날로 발달해가는 게임 덕분에 눈이 높아져 PS로 등장한 초기작을 플레이하기 꺼려했던 것도 인정한다.
어쨌거나 그러던 때에 초대 「와일드 암즈」의 스토리는 그대로 유지한 채 그래픽과 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한 리메이크 작품 「와일드 암즈 얼터 코드: F(이하 얼터 코드 F)」가 발매됐다. 물론 옳다구나 하며 구입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게임을 클리어한 지금, 왜 필자가 이 시리즈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지 그 이유를 확실히 이해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말해 ‘친숙함’이었다. 「얼터 코드 F」를 플레이하면 쥬브나일(juvenile. ※1)에 빠져 정신없이 읽고 있던 때와 같은,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친숙한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과거의 「십오소년 표류기」, 최근에는 「해리 포터」 등 누구나 소년, 소녀 시대에 모험담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활약할 때나 위기에 빠졌을 때 두근두근 가슴을 졸였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필자가 특히 쥬브나일적이라고 느꼈던 점은 인물묘사였다. ‘ARM’이라 불리는 강대한 힘을 지녔기에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았던 소년 로디. 공녀로서의 역할과 진짜 자신과의 괴리에 괴로워했던 소녀 세실리아. 복수를 이루기 위해 ‘절대적인 힘’을 찾아 떠도는 철새(게임 내에서 모험자를 부르는 속칭) 잭. 「얼터 코드 F」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각자 괴로움을 지니고 있지만 그곳에 ‘전설의 용사’나 ‘결정된 운명’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는 세계를 구하게 되지만 끝까지 개인적인 갈등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그들은 거대한 야망과 싸우기 전에 일단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갖고 있는 고민, 슬픔 등을 극복해간다. 「얼터 코드 F」는 흔히 다른 게임에서 볼 수 있는 허황될 정도의 장대한 스토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이야기, 즉 ‘등신대의 모험’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등신대’라는 요소가 쥬브나일 느낌을 강하게 주고 쉽게 감정을 이입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또한 메인 주인공인 로디가 이벤트 신에서 일체 말을 하지 않는 연출도 플레이어로 하여금 일체감을 느끼게 하고 보다 감정이입도를 높이는 도우미 역할을 한다. 깊은 감정이입 없이는 그 두근거림이 생겨나지 않는다. 「얼터 코드 F」를 플레이하고 시리즈를 좋아하게 된 이유를 다시 깨달을 수 있었던 건 이렇게 첫 작품의 심플하고 직선적인 설정과 연출에 끌렸기 때문이리라.
▲ 3명의 주인공. 왼쪽부터 잭 반 브레이즈(과 햄펜), 로디 라그나이트, 세실리아 레인 아델하이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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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uvenile
사전적인 의미는 ‘소년[소녀]의, 어린이다운,
소년[소녀]에 알맞은, 아동을 위한 책’이라는 의미지만 보통 ‘우정과 모험을 주내용으로
하며 저연령층도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의 의미로 많이 쓰인다.
통(通)하였느냐?
“쥬브나일적인 요소는 다른 롤플레잉게임에도 존재한다”며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필자도 동의한다. 아니, 오히려 쥬브나일적인 모험 스토리를 게임으로 재현한 것이 롤플레잉 게임의 기원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가? 요 수년 동안 기술과 하드웨어 성능의 비약적인 진보는 다양한 롤플레잉 게임을 만들어냈다. 이제는 쥬브나일이라는 수준이 아니라 아름다운 무비와 장대한 스토리로 풍성하게 포장한, 영화나 애니메이션 작품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의 대작도 최근에는 그리 드물지 않다. 이런 작품에선 등장인물이 쥬브나일적인 설정을 연기하는 배우다. 반면 플레이어는 어디까지나 관객으로서 작품을 즐기는 입장으로 바뀌어버렸다. 「와일드 암즈」가 출시된 건 벌써 8년 전.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다른 롤플레잉 게임 시리즈가 점점 대작화를 추구하는 가운데, 이번 리메이크를 통해 대작 풍으로 만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필자는 쥬브나일의 전통을 지키려하는 제작자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작품의 방향성이 다르다고 말하면 그뿐이겠지만, 바로 이런 점이야말로 이 시리즈가 두터운 팬들을 갖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 물론 7년의 세월이 흘렀던만큼 변한 부분도 있다. 3명의 주인공 외에 엠마 헤필드(왼쪽), 제인 맥스웰(오른쪽) 등 3명이 「얼터?코드 F」에 새롭게 동료로 등장한다 |
끌리는가? 그럼 해보라
지금까지 쥬브나일이라는 단어를 이용해 「얼터 코드 F」의 매력들을 이야기해보았다. 소년용이라는 말에 「얼터 코드 F」가 유치하고 레벨 낮은 작품이라 치부해버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선입견이다. 본래 쥬브나일은 저연령층도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그리고 마지막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또한 다양한 교훈과 인생을 시사해주는 경우도 많다(「얼터 코드 F」에서 로디가 목숨을 걸고 구해준 여자 모험자 제인이 “목숨은 돈으로 살 수 없지만,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얼마든지 있어”라고 말한 대사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품질은 보증한다. 「얼터 코드 F」는 세대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 단언한다(참고로 「얼터 코드 F」에는 특촬 히어로나 애니메이션 요소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이쪽에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바라건대 최대한 많은 게이머들이 이 작품을 즐겨봤으면 한다.
▲ 개발이 진행 중인 얼터 코드 F의 후속작 「어나더 코드: F」. 전작의 데이터가 계승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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