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영화, 그리고 게임
스타쉽 트루퍼즈는 SF 소설가 로버트 A. 하인라인이 1959년 발표한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하인라인의 소설판 스타쉽 트루퍼즈는 청소년 취향의 스페이스 오페라로서 작가 특유의 디테일한 병기와 전투장면 묘사로 SF 팬들 사이에서 이름이 높지만, 전체주의적, 군국주의적 성향이 짙어 매우 불순하고 유치한 사상으로 점철된 골빈 통속 소설이라는 혹평도 받고 있다.
97년엔 로보캅, 토탈 리콜 등을 제작한 폴 버호벤 감독의 영화가 만들어져 전 세계적으로 스타쉽 트루퍼즈라는 이름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버호벤 감독의 스타쉽 트루퍼즈는 압도적인 CG 액션(개봉당시 기준으로)에도 불구하고 매우 우스꽝스럽게 표현된 연방군의 홍보 광고나 이해할 수 없는 어설픈 전술 등으로, 원작의 군국주의적인 면을 비틀어 풍자한 블랙 코미디로 평가되고 있다.
▲영화 '스타쉽 트루퍼즈 2'의 한 장면 |
어쨌든 이번 게임판이 나오게 된 계기도 철지난 영화의 유명세에 편승해 쉽게 주목을 받아 보자는 계산이 섞여 있었음에 틀림없다(왜냐하면 개발팀의 홈페이지에서도 그렇게 밝히고 있기 때문에!).
키워드는 학살
서론이 길었는데, 스토리상 게임판 스타쉽 트루퍼즈는 아쉽게도 조금이나마 생각할 거리를 주는 버호벤 판 영화가 아닌, TV용 영화 스타쉽 트루퍼즈 2를 계승하고 있다. 스타쉽 트루퍼즈 2는 사실 별 설명이 필요 없는 영화다. 벌레(적)들이 나타나 주인공들을 습격하고, 주인공들은 총을 쏜다. 적당히 스릴이 가미되었고 적당히 지루하다. 이런 점까지 계승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스토리는 물론 이런 대충 적당한 분위기까지 충실히 계승했다.
▲벌레를 잡자 |
▲적당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 |
일단 게임을 시작해 보면 끝도 없이 몰려나오는 엄청난 수의 벌레들에게 감동인지 공포인지 모를 압도적인 무언가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한히 솟아나는 총알들을 끝없이 발사하며 수백, 수천마리의 벌레들을 저 세상으로 보내게 될 것이다. 땀 때문에 손가락이 마우스 버튼에서 미끄러질 때 쯤, 드디어 증오스러운 벌레들은 모두 박멸될 것이고 우리의 주인공은 충실한 트루퍼들과 함께 다음 학살 장소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이 필요한가? |
아무 생각 없이 달려드는 적들을 한꺼번에 척살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면 이만한 게임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적들의 물량공세 하나 만큼은 지금까지 보아온 어떤 FPS보다도 스케일이 크다. 그러고 보면 스타쉽 트루퍼즈는 소설 속 연방군 기동보병의 전시 일상생활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병영체험 게임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청년들이여! 전장이 있고, 무기가 있고, 벌레가 있는 지구연방군에 입대하지 않겠나!
불안한 엔진과 쓸데없이 높은 사양
먼저 인스톨을 시작해 본다. 3기가 정도 되는 용량이니 꽤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나타나는 친절한 메시지. “업데이트를 확인하시겠습니까?” 마침 발매일에 등록된 패치가 보여서 업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약 4메가의 용량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주의하라. 이 패치는 DVD롬 드라이브의 디스크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버그를 유발할 수도 있다고 하니까 말이다.
▲버그는 게임 속에만 있는게 아니다! |
이번엔 그래픽의 이야기. 스타쉽 트루퍼즈의 최소사양은 2기가급 CPU와 지포스 FX5900, 또는 라데온 9800급 3D가속 카드이다. 그러나 정작 화면을 살펴보면, 대체 이런 높은 퍼포먼스를 어디에 쓰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요즘 게임 같지 않은 어설픈 모델링과 텍스처를 보며 5년 전 게임인 '에일리언 VS 프레데터'를 떠올린 것은 비단 필자뿐만이 아닐 터.
▲FPS가 아니라면 봐줄 수도 있지만... |
그렇다고 질감과 그림자 묘사를 향상시키기 위해 옵션을 상향 조정하면, 권장사양인 3기가급 CPU와 1기가 램, 지포스 6800 수준의 PC에서도 심하게 느려지는 현상을 보인다. 게다가 적이 없는 장소로 가도 별로 빨라지질 않는다. 정말 의문점이 많은 그래픽 엔진이다.
기대에 못 미치는 세부적 완성도
영화에서처럼 혜성의 궤도를 바꿔 지구를 직접 공격할 정도로 지능적인 벌레는 바라지 않겠다. 하지만 FPS의 적이라면 최소한 지적 생명체로 보일 정도의 AI는 갖추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스타쉽 트루퍼즈의 벌레들은 적의 좌표를 향해 돌진해 공격 이외의 AI는 갖추지 못한 듯 보인다. 심지어 부지런히 달리다가 지면에 튀어나 온 구조물에 걸려 꼼짝 못하게 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정도다.
▲가까이 와서 때린다. 적의 패턴은 단 한가지! |
그리고 동료들의 AI도 만만치 않다. 중요한 임무를 지니고 보호해야 하는 동료들은 반드시 적의 무리에게 달려가 자살을 기도한다. 시원하게 벌레들을 학살하다가 촘촘히 포위돼 장렬히 전사하는 경우가 잦은 것은 유저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스크립트 구성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믿음직한 친구인 퀵 로드가 있잖아!” 물론 맞는 소리다. 단, 그것이 확실하게 빠른(퀵) 로딩일 경우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게임오버를 당한 후 퀵 로드 버튼을 누르면 게임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영화의 동영상을 보여주는데, 이것을 위해 장장 30초 내외의 지루한 로딩을 해야 한다. 이유조차 모르고 황당하게 죽는 경우가 태반인 게임이라 로딩을 기다리고 있는 시간도 꽤나 길어질 것이다. 그나마 로딩화면에서 영화만으로는 알 수 없는 스타쉽 트루퍼즈의 무기에 대한 상세설정을 읽어볼 수 있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일 뿐이다.
해 볼만 한 FPS. 하지만...
원작의 설정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고, 영화에서 봤던 벌레 대군을 직접 학살해 볼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원작의 팬이나 단순 액션을 좋아하는 유저에게는 어필할 수 있다고 본다. 적어도 평범한 슈팅게임으로서의 외형은 충분히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 전투는 할 만하다! |
하지만 그것이 끝이다. 스타쉽 트루퍼즈에서는 독창적이거나 감탄을 자아낼 만한 부분이 전혀 없다. 게임 하는 내내 벌레 떼와 지루한 사투를 벌였을 뿐, 그 이상의 즐거움을 주기위한 어떠한 장치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벌레를 잡으며 시작해서 벌레를 다 잡고나면 끝나는 게임, 그것이 바로 스타쉽 트루퍼즈다.
▲벌레만 잡다 끝나는 게임! |
덤으로 유명세에 올라타서 판매량을 늘려보겠다는 속셈까지 훤히 보이니 스타쉽 트루퍼즈는 영화와 게임의 크로스오버에 있어서 안 좋은 선례마저 하나 더 추가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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