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레이지 1'과 '레이지 2' 스토리가 직접 언급됩니다
2011년 출시된 ‘레이지’는 여러 모로 안타까운 게임이었다. ‘둠’의 아버지로 유명한 존 카맥이 이드 소프트웨어의 차세대 프랜차이즈라며 대대적으로 소개해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지만, 정작 발매 이후에는 각종 버그와 아쉬운 스토리텔링으로 혹평을 받으며 부진한 성적을 거뒀다. 그 탓에 이드 소프트웨어 모기업 제니맥스는 미리 준비돼 있던 ‘레이지 2’ 팀을 해체시켰고, 존 카맥 본인 또한 사실상 이 게임을 마지막으로 게임 개발에서 손을 뗐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던 ‘레이지’ 프랜차이즈가 극적으로 소생했다. 전작으로부터 8년이 넘게 흐른 2019년 5월, 신작 ‘레이지 2’로 돌아온 것이다. 과연 ‘레이지 2’는 왜 지금 와서야 출시됐고, 전작의 이야기를 어떻게 계승하고 있을까? ‘레이지’ 프랜차이즈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되짚어 보자.
‘둠’의 아버지 존 카맥이 남긴 마지막 게임, ‘레이지’
비록 출시 후 많은 비판에 직면하고 부진에 시달리긴 했지만, 어쨌건 ‘레이지’는 세간의 큰 관심을 받은 기대작이었다. 그 이유는 ‘울펜슈타인’, ‘둠’, ‘퀘이크’ 등 유수의 게임을 제작한 스타 개발자 존 카맥이 직접 추진한 프로젝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기대에 훨씬 못 미친 성과를 거둔 ‘레이지’는 의도치 않게 존 카맥의 사실상 마지막 게임이 됐고, ‘레이지 2’도 전작 발매일로부터 8년이나 지나고서야 간신히 나올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이드 소프트웨어는 3D FPS게임 개발을 선두에서 이끌어온 명가였다. 하지만 2004년 들어 이드 소프트웨어는 점차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발매 연기를 거듭하다 2004년 발매된 ‘둠 3’ 부진이었다. 이어 존 카맥이 개발에 합류한 ‘퀘이크 4’, ‘오크스 앤 앨브즈’, ‘에너미 테리토리: 퀘이크 워즈’등이 연이어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내자, 이드 소프트웨어의 주가도 점점 하락세에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레이지’는 이드 소프트웨어가 내리막길에 접어든 2005년 처음 기획된 프로젝트였다. 2년 후 첫 공개 당시 이드 소프트웨어는 ‘레이지’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존 카맥 역시 ‘레이지’ 출시 직전 E3 게임쇼에서 ‘레이지가 흥행하면 바로 레이지 2 제작을 개시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언급할 정도였다.
그러나 2011년 10월 출시된 ‘레이지’는 기대 이하 성적을 거뒀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리 못 만든 게임은 아니었지만, 존 카맥 신작이라는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초기 기술적 오류도 치명적이었지만, 또 한 가지 약점은 스토리에 있었다. ‘헤일로’ 이후 게이머들은 FPS에도 훌륭한 스토리를 기대하기 시작했으나, 안타깝게도 ‘레이지’의 서사성은 취약 그 자체였다. 이는 비슷한 시기 출시된 ‘보더랜드’와 비교되며 더욱 부각됐다.
‘레이지’ 개발 당시 이드 소프트웨어는 베데스다 소프트웨어 모회사인 제니맥스 미디어에 인수됐다. 그러나 인수 후 큰 기대를 갖고 출시한 첫 작품이 시장에서 냉담한 반응을 받자, 제니맥스는 크게 실망했다. 결국 제니맥스는 이드 소프트웨어의 ‘레이지 2’ 팀을 해산시켜 다른 프로젝트에 할당했고, ‘레이지’ 프랜차이즈는 무기한 중단됐다.
이후 존 카맥은 ‘둠 3’ 그래픽과 오디오를 개량한 버전인 ‘둠 3 BFG’ 제작을 마지막으로 결국 2013년 이드 소프트웨어를 퇴사해 오큘러스로 이직, VR 기술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레이지’는 본의 아니게 전설적 개발자인 존 카맥의 마지막 게임이 되고 말았다.
배경 스토리만 있고 스토리텔링은 없다? 아쉬움만 남긴 ‘레이지’ 스토리
과거 존 카맥은 ‘게임 스토리는 포르노의 그것과 같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한 바 있다. 훗날 그는 이 이야기를 완곡히 철회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레이지’에도 그의 철학이 본의 아니게 반영되었던 모양이다. ‘레이지’ 또한 스토리텔링에서는 그리 높은 점수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레이지’는 ‘매드 맥스’나 ‘폴아웃’ 같이 인류 문명이 거대한 재앙으로 송두리째 파괴된 후 황무지에서 벌어지는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포스트 아포칼립스 게임이다. 다만 여기서 특이한 점이라면, 주인공의 능력이다. 일반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게임의 주인공은 적어도 시작 시점에선 보통 사람이다. 그러나 ‘레이지’ 주인공 ‘니콜라스 레인’은 처음부터 초인에 가까운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 게임의 주요 줄거리 또한 그가 지닌 초인적 특징과 무관하지 않다.
‘레이지’ 스토리는 실제로도 존재하는 거대한 소행성 99942 '아포피스’가 지구에 접근하며 시작된다. 실제로 아포피스는 2036년 지구 가까이를 지나갈 예정이기도 하다. ‘레이지’는 이 소행성 아포피스가 2029년 지구에 충돌해 세상이 쑥대밭이 된 상황을 가정했다. 소행성 궤도를 수정할 방법이 없었기에, ‘레이지’ 세계관에서 각국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소행성 충돌 이후를 대비한 계획 ‘에덴 프로젝트’를 도입했다.
‘에덴 프로젝트’란 유능한 인재를 냉동 가사상태로 지하의 ‘방주’ 시설에 보관해두었다가, 훗날 지상이 안전해지면 ‘방주’를 개방해 문명을 복원한다는 계획이었다. 또한 재앙 후의 험난한 세상에서 유능한 인재를 보호하기 위해 ‘방주’ 탑승자에게는 ‘나노트라이트’라는 나노머신 군체가 주입됐다. ‘나노트라이트’는 신체적 손상을 급속 재생하고,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전자기적 힘을 발산하는 등 생존과 호신 기능을 내재하고 있었다.
초기에 ‘에덴 프로젝트’는 극비리에 진행됐다. 하지만 어느 순간 계획이 대중에 공개되면서 엄청난 파국이 일어났다. 선택된 극소수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대중은 폭동을 일으켰고, 국가 간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아포피스가 지표면에 충돌하던 날 ‘마틴 크로스’라는 장군이 휘하 부대를 이끌고 ‘슈퍼 방주’를 탈취하는 일도 있었다.
해병대 출신 주인공 ‘니콜라스 레인’은 바로 이 '에덴 프로젝트'에 차출된 인물 중 하나였다. 사실 그는 원래 ‘방주’에 들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방주’에 군사 조언자로 들어갈 예정이었던 상관이 갑자기 발병한 암으로 부적합 판정을 받았고, 그 뒤를 이어 ‘레인’이 새 후보로 추천 받은 것이다. 그렇게 ‘레인’은 ‘방주’ 구성원이 돼 ‘나노트라이트’를 주입 받고 소행성이 지표면을 강타하던 순간 동료들과 함께 지하 ‘방주’의 극저온 생명유지장치 속에서 기나긴 잠에 들었다.
‘레이지’는 세상이 황무지가 된 후 ‘니콜라스 레인’이 잠들어있던 ‘방주’가 사고로 조금 일찍 개방되며 시작된다. ‘레인’이 들어있던 ‘방주’는 고장으로 인해 본래 예정보다 이른 시기인 2135년 개방됐다. 안타깝게도 생명유지장치 고장으로 다른 동료들은 모두 사망했다. 그렇게 ‘레인’은 홀로 멸망한 세상으로 나와 ‘매드 맥스’ 수준으로 야만과 무법이 판치는 시대를 온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앞서 방주를 탈취한 ‘마틴 크로스’ 휘하 군대는 억지로 방주를 탈취한 탓에 ‘나노트라이트’를 주입 받지 못했다. 이에, 이들은 해동 시기를 일부러 앞당겨 먼저 깨어난 후 다른 ‘방주’를 하나씩 강제 개방한 후 생존자를 포획해 생체실험으로 ‘나노트라이트’를 뽑아 자신들에게 이식하겠다는 정신 나간 야심을 품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레이지' 설정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나름 흥미로운 설정이지만, 실제 플레이에 들어가면 이러한 내용 대부분이 나오지 않는다. 게임이 진행됨에 따라 ‘마틴 크로스’ 휘하 군벌 조직 ‘당국’은 주인공을 추적하기 시작하고, 이에 ‘레인’은 이들 기지에 침입해 모든 ‘방주’를 개방시켜 ‘당국’의 야심을 저지한다. 그런데 게임이 딱 여기서 끝난다.
‘레이지’에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 부분도 바로 이 엔딩이었다. 계속 나타나는 적을 물리치다 보면 갑자기 게임이 끝나고 엔딩 영상이 나오는데, 갑자기 땅을 뚫고 ‘방주’가 올라오는 게 전부다. 악당 두목인 ‘마틴 크로스’는 끝까지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당국’의 음모는 저지됐는지, 사악한 ‘마틴 크로스’는 어떻게 됐는지는 일언반구 언급도 없다. 게임 내내 해온 일의 결말은 온데간데 없었다.
‘레이지’는 비평가들로부터 총싸움 액션은 나쁘지 않지만, 새로움이 없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 중에도 가장 문제는 스토리였다. 분명 흥미로운 배경 설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게임 내에서는 이를 활용하지 못했다. 부족한 스토리텔링이 의도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게이머의 흥미를 끌 만한 맥락과 서사를 부여하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어디서 많이 본 내용인데… 전작 구도 그대로 답습한 ‘레이지 2’
‘레이지’ 판매량은 약 300만 장 수준으로 알려졌다. 나쁘지는 않지만 AAA급 게임 치고는 아쉬움이 남는 성적이다. 6년이라는 긴 개발 기간과 걸린 기대를 감안한다면 사실상 흥행 실패로 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레이지 2’는 나오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러한 예상은 제니맥스가 ‘레이지 2’ 팀원들을 다른 프로젝트로 돌리고, 존 카맥이 이드 소프트웨어를 떠나며 기정사실화 됐다. 그런데 지난 2018년, 이드 소프트웨어가 돌연 ‘레이지 2’를 발표했다. 그리고 공개일로부터 정확히 365일이 지난 2019년 5월 14일, 드디어‘레이지 2’가 출시됐다.
전작 ‘레이지’는 인류 문명 멸망 이후 ‘방주’에 잠들어있던 ‘니콜라스 레인’이 깨어나 ‘나노트라이트’를 노리는 ‘당국’에 맞서 황무지를 구원한다는 이야기로 전개됐다. 최근 발매된 ‘레이지 2’는 이러한 결말로부터 30년 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방주인’과 ‘황무지인’ 연합에 패배한 줄 알았던 ‘당국’이 돌아오고, 그들의 사악한 야심에 맞서 또 다른 ‘방주인’ 혈통 주인공 ‘워커’가 나서 활약한다는 내용이다.
사실 방주 출신이라는 점과 나노트라이트 주입은 전작 ‘레이지’에서도 써먹은 설정이다. 워커의 경우에는 ‘방주’ 출신 부모를 둔 2세대로 체내에 ‘나노트라이트’가 미약하게나마 흐르며, 덕분에 ‘나노트라이트’를 응용한 각종 기술과 장비를 사용할 수 있다. 그 힘으로 ‘당국’이라는 무시무시한 적에 맞서는 것이다.
먼저, '레이지 2'는 전작에서 지적받았던 엔딩을 어떻게든 수습했다. ‘니콜라스 레인’이 ‘방주’에서 나온 구시대인과 황무지인 사이 동맹을 이끌어내 ‘마틴 크로스’를 패배시킨 것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 중요한 이야기는 전작 ‘레이지’에서도, 이번 ‘레이지 2’에서도 직접적으로 다뤄지지 않지만, 어쨌거나 배경 스토리에서는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승리의 중심에는 ‘나노트라이트’를 활용한 ‘방주’ 출신 특수부대 ‘레인저’가 있었다. 이들은 ‘나노트라이트’에 반응하는 특수한 장비와 기술을 활용해 ‘당국’의 정예를 압도할 수 있었다.
승리를 거둔 ‘방주’ 출신과 황무지인들은 언젠가‘당국’이 돌아올 것에 대비해 한동안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 동맹은 오래 가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자 ‘방주’ 출신사람들이 자신들만의 마을을 세우고 황무지인과의 관계를 단절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된 데는 ‘방주’ 출신 구시대인과 소행성 충돌 이후 태어난 황무지인 사이의 문화적인 차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황무지 출신 강도 떼와 돌연변이에 의한 피해가 속출하며 황무지인 전반에 대한 인식이 악화된 탓이 컸다.
하지만 ‘당국’은 전멸한 것이 아니었다. ‘마틴 크로스’는 전신을 사이보그로 개조해 살아있었고, 휘하 조직 또한 지하 비밀 기지에 숨어 사이보그 병사를 키우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마침내 ‘방주’ 출신 구시대인과 황무지인이 분열된 것을 확인한 ‘당국’은 지상으로 나가, ‘방주인’부터 말살에 나섰다. 주인공 ‘워커’가 살던 ‘바인랜드’ 마을이 바로 그 첫 번째 희생자였다.
오랜 세월 황무지인과 단절된 삶을 살아온 ‘바인랜드’는 결국 ‘당국’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방어선이 돌파되고 마을은 파괴되며, 모든 1세대 ‘방주인’은 실험체로 생포된다. 살아남은 이는 단 스무 명의 2세대뿐. 그마저도 대부분이 황무지인과 피가 섞인 탓에 체내에 ‘나노트라이트’가 흐르지 않았다. 그러나 오직 ‘워커’만은 양친 모두 ‘방주’ 출신이었던 덕분에 ‘나노트라이트’를 다룰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레이지 2’ 프롤로그다. 이제부터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질 차례인데, 막상 게임 내 스토리는 식상하기 그지없다. ‘레이지 2’ 주된 스토리는 ‘나노트라이트’가 주입된 사람만 입을 수 있는 강화복 ‘레인저 아머’를 착용한 ‘워커’가 차츰 힘을 기르고 초인이 돼, 고향을 파괴한 ‘당국’에 복수한다는 내용을 다룬다. 사실상 ‘나노트라이트’를 주입 받은 초인이 ‘당국’에 맞선다는 전작 구도를 그대로 따라간 셈이다. 게다가 게임 중간 몰입과 플레이 동기를 강화해줄 드라마도 적어 아쉬움이 남는다. 1편에서 혹평 받은 게임 내 스토리텔링 부분을 그대로 가져올 이유가 있었을까 싶다.
‘스토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던 이드 소프트웨어
배경 이야기는 전보다 더 흥미로워졌지만, 결국 ‘레이지 2’는 전작과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다. 그럴 듯한 설정은 있지만, 정작 게임을 시작하는 순간 이런 이야기는 별로 중요치 않다. 물론 폭력성 짙은 전투는 그 자체로 충분한 재미를 준다. 숙달될 수록 창의적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적을 쓰러뜨릴 수 있는 액션의 깊이도 좋다. 다만 이러한 전투에 동기를 부여할만한 스토리텔링이 부족하다는 점은 여전히 ‘레이지’ 시리즈의 약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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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메카 취재팀장을 맡고 있습니다jong31@gamemec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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