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서브컬처 커뮤니티에서 입소문을 타고 흥행 중인 모바일게임이 있다. 바로 스마트조이의 라스트 오리진이다. 이 게임은 서비스 초반 구글과 애플 검열 논란에 휩싸이며 눈길을 끌었고, 이후 특유의 글래머 캐릭터들로 확고한 컬트 팬덤을 구축하고 연일 명성을 높여가는 중이다. 아무래도 화제가 된 부분들이 그쪽에 몰려있다 보니 일각에서는 그저 노출도 높은 미소녀 캐릭터만 앞세운 게임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라스트 오리진에도 나름 탄탄한 세계관이 있다. 실제로 자세히 뜯어보면 크툴루 신화 등 의외로 흥미롭고 예상치 못한 설정들이 존재한다. 과연 라스트 오리진의 글래머 미소녀 뒤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나 혼자 남자, 하렘 포스트 아포칼립스
라스트 오리진의 기본 세계관 설정은 대단히 간결하고 명확하다. 주인공 빼고 인간이 전부 죽은 미래에, 인공지능 미소녀들의 섬김을 받는 유일무이한 주인이 된다는 내용이다. 이는 플레이어가 수많은 미소녀를 거느리는 이유를 꽤나 노골적이고 단편적으로 설명한다.
라스트 오리진 개발사인 스마트조이 복규동 대표의 2019년 강연에 따르면, 스마트조이는 처음부터 19금 포스트 아포칼립스 미소녀 캐릭터 수집 게임을 개발할 예정이었다. 다만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개발 시점에 미소녀 수집 게임 시장이 이미 과포화 상태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스마트조이는 미소녀 캐릭터 수집 게임에도 나름의 장르적 분화가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즉, 레드오션인 미소녀 캐릭터 수집 게임 속 틈새시장을 노리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 게임은 국내에 흔치 않다는 점, 그리고 게임 속 주인공이 미소녀 캐릭터를 주인으로서 소유하는 노골적인 관계도 드물었다는 점에 착안했다.
그렇다면 라스트 오리진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하렘이라는 소재를 어떻게 조합했을까? 그 대답은 다소 통속적일 수도 있는 외계질병이다. 이로 인해 인간은 이미 과거에 멸종했고, 주인공은 모종의 실험 끝에 내성을 얻은 후 냉각돼 있던 프로토타입이라는 것이다.
라스트 오리진의 이야기는 2052년, 인간이 일종의 강화 인조인간인 바이오로이드를 개발하며 시작된다. 바이오로이드는 완전한 인공지능 로봇 안드로이드도 아니고, 그렇다고 복제인간도 아닌 중간적 존재다.
본래 바이오로이드는 남성과 양성 두 버전으로 제작됐지만, 그중 남성 버전은 호전성 오류로 돌발적 살인 및 폭행 사건을 일으킨 끝에 폐기됐다. 그렇기에 이후 모든 바이오로이드는 여성 버전으로만 제작됐다.
그런데, 바이오로이드 상용화 후 큰 재앙이 발생한다. 운석과 함께 나타난 외계 존재가 지구에 번식하며 인간을 적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생물은 벌레를 닮았고, 기계에 기생해 이를 자기 숙주로 삼는 기묘한 존재였다. 그 모습과 습성이 기생충을 닮았기에, 이들은 곧 ‘철충’으로 명명됐다. 철충은 기계의 인공지능 코어에 기생해 통제권을 빼앗고 기체에 변이를 일으키는 특성을 지닌 탓에, 첨단 인공지능 기기에 의존하고 있던 인간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철충은 처음부터 인간에 적대적이었다. 처음 사단은 포획된 철충을 연구하던 연구소가 사고로 통째로 감염된 것이었다. 이후 철충 감염은 겉잡을 수 없이 확산돼, 사회 곳곳의 시설과 로봇을 감염시키고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인간은 세계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조직적으로 사냥당한 끝에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다. 그 와중 철충이 물을 무서워한다는 약점을 파악한 생존자 소수가 해상으로 대피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그렇게 해상으로 대피한 생존자들이 반격을 도모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재앙이 도래했다. 이번에는 원인불명의 질병이 지구를 휩쓴 것이다. 전파를 통해 전염되는 이 기묘한 질병은 사람을 계속 잠들게 하다, 이내 끔찍한 악몽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에 이르게 만든다.
그리스 신화 속 잠의 신 이름을 따 ‘휘프노스 병’으로 명명된 이 병으로, 철충과 싸워 살아남았던 소수 생존자들은 모두 사망했다. 기술개발용 바이오로이드가 신경계 사이버네틱스 시술이나 뇌를 적출해 의체에 옮기는 방법으로 병을 피할 방법을 뒤늦게 고안했지만, 이미 생존자가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철충 침략으로 쇠락해 있던 인간이 휘프노스 병으로 멸종하자, 그 유산인 바이오로이드는 홀로 지상에 남겨졌다. 그러나 일부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이 멸종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특히 높은 지성의 연산모듈이 탑재되고 충성심도 강한 고급 기종들은 더욱 그랬다. 이에 바이오로이드는 몇몇 고급 기체들의 지휘 아래 연대해 무리를 이루고, 인간 생존자를 찾거나 재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모종의 과정으로 뇌를 적출해 의체에 옮긴 후 동면해 있던 인간이다. 어떻게 휘프노스 병에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아 시술을 완료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바이오로이드들에 의해 발견되고 회수된 주인공은 이후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는 바이오로이드들과 여행을 하게 된다.
바이오로이드들이 볼 때 주인공은 세상에 남은 유일한 인간이다. 그렇기에 유일한 절대 충성과 애정의 대상이기도 하다. 게임 내 설명에 따르면 하급 기체는 아예 주인공의 말을 거스를 수 없으며, 상급 기체도 반발하는 정도만 가능할 뿐 대놓고 부정하거나 적대할 수는 없는 듯하다.
이렇듯 라스트 오리진은 외계생물의 침입과 정체불명의 질병으로 인간이 멸종한 후, 동면해 있던 최후의 인간 주인공이 깨어나 미소녀 바이오로이드의 섬김을 받으며 인류 재건을 위해 여행한다는 내용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하렘물이라 할 수 있다.
로봇인가 인간인가, 기능성 하렘을 구성하는 바이오로이드
개발사 스마트조이는 라스트 오리진의 특징 중 하나로 경쟁 없이 구축할 수 있는 하렘이라는 설정을 중시했다고 설명했다. 경쟁이 없는 부분은 최후의 인간이라는 설정으로 해결했다. 그리고 하렘 부분을 채우는 것이 바이오로이드 설정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이오로이드는 인간도 아니고 로봇도 아니지만, 인간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존재다. 덕분에 주인공은 별 특징이나 노력 없이도 존재 자체로 뭇 바이오로이드로부터 사랑과 충성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게임 내 수집(주로 지상을 떠돌다 회수되거나 복원) 대상이 되는 미소녀 캐릭터 바이오로이드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일까? 우선 바이오로이드란 생물학적 안드로이드(Biological Android)의 준말로, 인위적으로 제작한 인공생물체다. 다만 인간처럼 행동할 수 있는 로봇 안드로이드와 달리 유기물로 구성된 생물이다. 2009년 개봉한 공포 영화 스플라이스에 나온 인공생물체와도 비슷해 보인다.
라스트 오리진의 바이오로이드는 생체 모듈이 탑재된 강화 골격 프레임에 유전자 씨앗을 심고 배양해 만든 일종의 강화 인조인간이다. 정신적인 제약이 있고 인간을 상회하는 힘과 연산기능을 갖기는 하나, 생체 구조는 인간과 같다. 기계에 기생하는 철충에 감염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독특한 점은 바이오로이드가 인간 육체를 토대로 제작된 인공생물이기에, 인간과의 생식행위를 통한 재생산이 가능하다는 설정이다. 즉 성관계를 하고 번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태어나는 존재는 설정상 제 3의 종이 아닌 인간이 된다.
그렇기에 바이오로이드들은 유일한 인간인 주인공에게 끈적한 접근을 해올 명분이 있다. 번식을 통해 인간의 수를 늘리고 문명을 재건하는 것이 곧 자신들의 존재 목적과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게임에 나오는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는 인류 재건이라는 대의를 위해, 혹은 개인적인 이유로 주인공에게 집착한다. 게임상 대사를 봐도 바이오로이드끼리 이러한 사실을 대놓고 긍정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모든 바이오로이드가 전투용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일부 바이오로이드는 본래 전투용으로 개발된 덕에 제식화기 다루는 법과 전술적 사고가 처음부터 가능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바이오로이드는 민간용으로, 보통 생산 및 서비스에 투입되던 기종이다.
그렇기에 게임상에 나오는 많은 바이오로이드는 본래 전투용이 아닌 기능을 전투에 억지로 사용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어 퍼블릭 서비스 라인 커넥터 유미라는 모델은 본래 전파망이 닿지 않는 오지에 통신기지국을 수리 및 설치하거나, 자신이 직접 임시로 중계기 역할을 하던 바이오로이드다. 그 외에는 기본적인 전투기술조차 없다. 그렇기에 게임상 기술 또한 이동형 기지국을 설치하고 통신병 역할을 해 아군에게 강화 효과를 제공하는, 일종의 지원병 역할을 맡는다.
그 외에도 바이오로이드에는 공공 서비스에 종사하던 모델,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쓰이던 모델, 산업에 투입되던 모델 등 다양한 기종이 있다. 그렇기에 본래 어떤 바이오로이드가 제작돼 소비됐고,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에서는 어떻게 살아남아 적응했는지 구경하는 재미가 나름 쏠쏠하다.
이렇듯 라스트 오리진은 미소녀 캐릭터 수집 요소를 인간 멸망 후 떠돌고 있는 바이오로이드 회수 및 복원이라는 설정으로 설명했다. 이로서 모든 미소녀 캐릭터가 주인공에 붙어있을 이유를 제공함과 동시에, 다양한 측면에서 전문성을 지닌 기능성 하렘 또한 가능해진 셈이다.
어찌됐건, 주인공은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바이오로이드들로 구성된 기능성 하렘을 이끌고 인류 재건을 위한 보금자리를 찾아 여행을 한다. 그 과정 중 주인공의 정체, 철충의 기원, 몇몇 고위 바이오로이드의 숨겨진 의도와 목적 등 깊이 파고드는 밀도 있는 플롯도 전개 중이다. 이러한 스토리는 지속적인 업데이트 및 이벤트를 통해 계속 진행되고 있다.
크툴루 형이 왜 거기서 나와?
유일한 인간인 주인공을 섬기는 여성 바이오로이드 하렘이 라스트 오리진의 핵심이기는 하나, 어쨌든 포스트 아포칼립스 배경인 만큼 멸망을 불러온 원인도 세계관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철충과 휘프노스 병 말이다.
얼핏 둘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별개의 재난처럼 보인다. 그러나 스토리를 진행하다 보면 둘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구체적으로는 철충이 휘프노스 병을 발현시킨 존재들을 피해 지구로 온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휘프노스 병은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아니라 우주에서 어떤 존재들이 쏘아 보낸 전파이기 때문이다.
사실 철충은 실은 지성이 있는 존재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게임 내에서 주인공 휘하 바이오로이드들은 VR 공간에서 데이터를 다운로드 하던 중 추적해 온 철충 접속자들과 싸우게 되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철충 아바타는 인간과 흡사하게 생겼다. 철충들은 의외로 자신을 벌레가 아니라 인간과 흡사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그들의 데이터 교신 분석 결과 나름의 종교적 위계와 신앙도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대체 왜 나름의 지성과 문화를 지닌 철충들이 무차별적으로 지구를 침략했을까? 그 이유는 다른 적 때문이다. ‘외신’, ‘별의 아이’ 등으로 불리는 그 적들은 이미 지구에 와 있고, 바다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게임 초기에 철충은 물을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이며, 인류 생존자 및 주인공은 이 약점을 이용해 바다로 피신해 철충을 피한다. 그러나 사실 철충이 물을 피하는 이유는 물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바다 속에 있는 별의 아이들을 무서워했기 때문이라는 점이 게임 중반부에 드러난다.
작중 철충 대사에 따르면, 휘프노스 병은 ‘외신’이 투사한 전파의 영향이라고 한다. 또한 ‘별의 아이’는 ‘외신’과 관계된 초월적인 괴물들인데, 그들 하나 하나가 최상위급 철충보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별의 아이’는 게임 중 약한 개체 하나가 잠시 모습을 드러내 철충 상급 개체와 전투를 벌이는 것으로 등장하는데, 여러 촉수를 지닌 이질적인 생물로 묘사된다.
이 ‘외신’과 ‘별의 아이’는 노골적으로 크툴루 신화를 염두에 둔 듯하다. 왜냐하면 크툴루 신화에도 외신(Outer God)과 크툴루의 별아이(Star-spawnof Cthulhu)라는 존재가 이미 등장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름부터 오마주임이 확실히 드러난다.
크툴루 신화 속 외신은 우주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이계의 신들로, 인간은 이를 인지하는 것만으로 정신이 파괴돼 미치거나 변이되고 만다. 크툴루의 별아이는 해저에 사는 촉수 달린 괴물이다. 둘 다 라스트 오리진 속 존재와 내러티브나 묘사가 비슷하다.
또한, 게임 세계관의 한 축을 담당하는 휘프노스 병은 희생자가 죽음과 같은 잠에 빠져 악몽을 꾸다 사망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 역시 크툴루 신화 원작자 하워드 필립 러브크래프트가 소설에서 묘사한 크툴루의 권능과 유사하다. 크툴루에 의한 현대 문명의 멸망을 다룬 찰스 스트로스의 소설 ‘또 다른 냉전(A Colder War)’ 등이 이미 출간됐던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라스트 오리진 역시 러브크래프트적 공포에 세계가 멸망한 이후를 다룬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지향하는 듯 하다.
이렇듯 라스트 오리진은 기본적으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하렘물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크툴루 신화의 요소를 일부 차용한 초자연적 요소가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 소재는 가슴 큰 미소녀 바이오로이드 하렘이지만, 플롯 자체는 나름 깊은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크툴루와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결합물은 앞서 말한 ‘또 다른 냉전’ 외에도 ‘크툴루 아포칼립스(Cthulhu Apocalypse)’, ‘크툴루 아마게돈(Cthulhu Armageddon)’ 등의 작품으로 나름 개척된 분야다. 물론 크툴루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미소녀 바이오로이드 하렘을 접목한 작품은 어쩌면 라스트 오리진이 최초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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