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까지도 학계에서 가장 치열한 논쟁이 펼쳐지는 영역 중 하나는 ‘찰스 다윈’으로부터 시작된 진화론이다. 진화론은 이미 수백 년간 학계의 인정을 받아오고 있지만, 진화의 속도와 양상에 대해서는 학자와 학계마다 주장이 엇갈리며 수백 년이 넘도록 끝나지 않는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IT시장도 진화론과 비슷한 느낌이다. 비슷한 기기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더 우월한 기기가 출현해 시장을 완전히 평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또 다른 진화를 이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피처폰은 분명 꾸준히 진화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카메라 기능을 내장하더니, 빨라진 프로세서와 개선된 소프트웨어를 바탕으로 스케쥴 관리와 알람 등 다양한 기능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종래엔 mp3 플레이어 기능까지 내장하며 소비자들이 원하는 모든 기능을 집약한 것으로만 여겨졌다.
그런데, 이런 시장 환경은 ‘아이폰’이란 더 우월한 존재의 등장과 함께 부정되기에 이르렀다. 아이폰의 등장과 함께 시장은 급격히 스마트폰 중심으로 재편됐고, 휴대폰은 이후 스마트폰을 기점으로 다시 진화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어떤 진화는 점진적인 것과, 어느 순간 그것을 모두 받아들인 우월적인 것 사이의 경쟁에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것이 자연계에서 생물의 진화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이 같은 흐름은 어쩌면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지구상에서 숨쉬고 있는 모든 유기체가 가져왔던 진화의 과정 어딘가에서 모두가 한 번쯤 겪었던 일일지도 모를 일이다.
■ 태블릿의 등장, 컨버터블로 더 우월한 기기가 돼라!
스마트폰은 등장하자마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기존 휴대폰 시장을 집어삼켰다. 뒤이어 등장한 태블릿은 모바일 시스템의 대명사와 같았던 노트북 시장을 슬금슬금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되짚어보면, 스마트폰은 시장 자체를 완전히 뒤집을 만큼 우월한 기기였던 셈이고, 태블릿은 새롭긴 하지만 시장을 집어삼킬 만큼 우월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세상은 이 같은 신제품의 등장을 바라보며, 조만간 태블릿 역시 모바일 시장 전체를 집어삼킬 것이란 전망들을 앞다퉈 내놓기에 바빴다. 일견 시장의 흐름 또한 그래 보였다. 그런데, 순식간에 적을 제압할 만큼 강력하지 못했던 탓일까? 작금에 와서는 오히려 노트북이 새로운 ‘진화’를 무기로 태블릿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압도적인 진화가 아니었던 태블릿으로서는 새로운 진화의 형태로 맞서는 노트북이 오히려 부담스러운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현재의 노트북은 과거의 형태를 따르되 강력한 성능을 제공하는 제품, 태블릿 만큼이나 얇고 가벼워 들고 다니는 데 부담이 없는 울트라북, 그리고 상황에 따라 노트북과 태블릿 형태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컨버터블 등으로 진화하고 있다.
역시 태블릿에 가장 위협이 되는 제품은 최근 여러 제조사들의 집중적인 제품 출시와 더불어 급격히 시장을 넓히고 있는 컨버터블 노트북이다. 이 제품은 태블릿 만큼이나 얇고 가볍지만, 상황에 따라 두 개의 OS를 번갈아 사용하거나, 환경에 따라 태블릿 형태로 변환해 사용할 수 있는 등 기존 태블릿을 능가하는 사용성으로 다시금 모바일 시장의 중심을 빼앗아 올 기세다.
■ 태블릿을 ‘심심하게’ 만드는 컨버터블의 재주
컨버터블 노트북은 한마디로 재미있다. 다양한 아이디어와 활용성이 결합된 덕분에 상황에 따라 여러 형태로 응용이 가능하다. 때로는 그 독특한 외관과 휙휙 돌아가는 디스플레이 형태만으로도 주변의 시선을 끌어 모으는 데 성공한다. 주변의 시선이 모인다는 의미는 소비자들이 제품에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이 제품은 그만큼의 시장을 확보할 가능성을 가졌다는 의미가 된다.
▲ msi s20
msi가 발표한 ‘s20’은 노트북이 기존의 패러다임만 벗어던지면 얼마나 다양한 형태로 변신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제품이다. 본체를 따라 슬라이딩되는 디스플레이를 탑재해 상황에 따라 노트북으로, 또는 태블릿으로 형태를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재주를 부린다.
디스플레이를 위로 당겨 세우면 노트북 형태가 되며, 가볍게 키패드 쪽으로 밀면 자연스레 디스플레이가 접히며 태블릿과 같은 형태로 변신한다. 태블릿과 비교해 약간의 무게 증가는 불가피하지만, 문자의 입력에 더없이 편리한 키보드를 내장하고 있다는 큰 장점을 가졌다.
성능 역시 빼어나다. 인텔의 3세대 코어 i5/i7 프로세서와 SSD 장착으로 태블릿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수준의 성능을 발휘한다. 인텔 4세대 코어 프로세서가 발표됐으니, 조만간 이를 탑재한 s20 시리즈를 만나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에이수스(ASUS) 타히치(TAICHI) 31
에이수스의 타히치는 볼 때마다 ‘콜럼버스의 계란’이 연상된다. 계란을 탁자 위에 세우지 못한다는 세상의 인식에 대한 통쾌하고 시원한 조롱. 바로 그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어떻게 하면 태블릿과 노트북, 이 이질적인 요소를 하나로 끌어안을 것인가? 온갖 아이디어가 난무하는 세상에 에이수스는 가장 단순한, 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앞뒤에 모두 디스플레이 패널을 달아 열면 노트북, 닫으면 태블릿이 되게 하면 그뿐. 이처럼 단순하고 명료한 해결책을 또 본 일이 없는 느낌이다. 비록 두 개의 디스플레이 채용으로 가격은 상승할 지언정, 기존의 노트북이 가진 모든 생산성을 그대로 유지하며 태블릿 형태로 변환되는 최상의 유틸리티를 손에 넣었다.
현재의 타히치는 한쪽 디스플레이만 터치를 지원한다. 하지만 에이수스는 차기 타히치에서 양쪽의 디스플레이에 모두 터치패널을 탑재하고도 더욱 얇고 가벼운 제품으로 다시 한번 진화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3세대 코어 i5/i7 역시 자연스럽게 4세대 코어 프로세서로 업그레이드 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타히치의 진화가 더욱 기다려진다.
▲ 에이서(Acer) R7
이번엔 에이서(Acer)의 R7을 주목하자. 에이수스의 타히치가 ‘쾌도난마(快刀亂麻)’식 해법의 진수를 보여주었다면, 에이서의 R7은 이를 가장 우아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미학을 우리 앞에 선보였다.
R7은 시스템과 디스플레이를 두 개의 힌지로 연결하는 새로운 디스플레이 장착법 ‘이젤(Ezel)’을 적용했다. 덕분에 노트북 형태로 사용할 때에도 디스플레이의 각도를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으며, 키보드 위쪽에 터치패드까지 빠트리지 않고 장착할 공간을 확보했다.
터치패드를 사용하지 않을 땐 디스플레이를 당겨와 사용할 수 있고, 이를 사용해야 할 땐 필요한 만큼 뒤로 밀면 그만이다. 태블릿 형태가 필요하다면? 디스플레이를 맨 앞으로 당겨와 눕히면 그만이다. 역시 인텔 코어 i5가 사용되고 있으며, SSHD와 SSD의 조합으로 성능과 용량 모두를 사용자에게 제공한다.
▲ 삼성 아티브 Q(ATIV Q)
삼성이 최근 선보인 ‘아티브 Q’도 에이서 R7과 비슷한 콘셉트를 보여주는 제품. 혁신적인 힌지 디자인으로 키보드를 이용하는 ‘타이핑 모드’, 일체형 기기로 변신하는 ‘태블릿 모드’, 디스플레이를 공중에 띄운 듯한 ‘플로팅 모드’를 사용할 수 있다. 여기에 독특한 힌지 시스템을 이용, 디스플레이를 반대편으로 180도 회전시켜 사용하는 ‘스탠드 모드’로도 활용할 수 있다.
아티브 Q는 가장 최근에 발표된 제품답게 인텔 4세대 코어 프로세서 ‘하스웰’을 탑재했다. 빠른 성능과 넉넉한 저장공간의 제공을 위해 SSD도 기본사양으로 택했다. 9시간을 사용할 수 있는 넉넉한 배터리는 노트북이 사용시간에서 태블릿에 뒤진다는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하다.
아티브 Q는 재미있는 특징을 한 가지 더 숨기고 있다. 형태만 노트북과 태블릿을 넘나드는 데서 벗어나, OS도 상황에 따라 ‘윈도8’과 ‘안드로이드’를 넘나들며 사용할 수 있는 것. 두 가지 OS를 탑재한 덕분에 상황에 따라 더 적합한 OS를 선택해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은 이 제품을 컨버터블 중의 컨버터블로 만들어준다.
▲ 소니(SONY) 바이오 듀오 13(VAIO Duo 13)
소니 ‘바이오 듀오 13’은 보는 순간 갖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다. 에이서 R7, 삼성 아티브 Q와 비슷한 힌지 시스템을 장착했지만, 노트북과 태블릿 형태로의 변환이 매우 빠르고 간단하다.
여기에 삼성 갤럭시 노트 시리즈를 통해 이미 그 사용성을 인정받은 스타일러스가 포함돼 있다. 이미지 작업 등에 활용할 경우 키보드와 마우스보다 더욱 빠르고 정밀한 작업을 가능케 해 준다.
소니의 바이오 듀오 13은 노트북과 태블릿 형태를 넘나드는 컨버터블 노트북이면서도, 그것도 13인치 디스플레이를 탑재하고도 크기와 두께, 무게가 혁신적으로 줄었다. 얇고 가벼우면서 강한 탄소섬유를 적극 채용한 결과. 덕분에 태블릿보다 우월한 성능을 확보하고도 능히 경쟁 가능한 무게와 사용시간을 확보했다. 4세대 코어 i5 프로세서와 SSD를 기반으로 발휘되는 성능은 한마디로 발군이다.
■ 이번엔 태블릿의 역습?
노트북이 이처럼 진화하기 시작한 데에는 태블릿이라는 무시하기 힘든 경쟁자의 출현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익히 예상할 수 있다. 만일, 태블릿이란 경쟁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뻔한 형태의 뻔한 노트북만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태블릿은 기존의 노트북 시장 전체를 휘어잡을 만큼 강력하고 우월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노트북들이 능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약한 상대도 아니었다. 그것이 휴대폰 시장과 달리 아직도 모바일 시장에서 노트북과 태블릿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주된 원인이다.
애초에 변화의 가능성이 크지 않았던 태블릿과 달리, 노트북은 살아남기 위해 ‘진화’를 선택했다. 지금껏 살펴본 노트북들은 노트북이라 부를 수도, 또 태블릿이라 부를 수도 있는 두 가지 이질적인 콘셉트를 하나의 기기에 잘 녹여낸 제품들이다. 태블릿과의 정면 승부를 위해 진화한 노트북의 현재형인 것이다.
자, 그렇다면 변화의 가능성이 크지 않아 보이는 태블릿은 이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노트북처럼 빠른 하드웨어를 탑재해 성능으로 경쟁할까? 스타일러스와 분리형 키보드 등으로 생산성을 극대화 할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지금보다 훨씬 얇고 가벼워 노트북과는 휴대성에서 경쟁이 되지 않을 만큼 날렵한 형태로 진화할 것인가?
업계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노트북은 분명 태블릿에 대응해 진화했다. 태블릿이 이에 대응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재미있는 제품을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지켜보자, 노트북과 태블릿의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오국환 기자 sadcafe@i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