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노조’는 삼성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한국 IT업계에서는 ‘무노조’가 상식이다. IT업계의 노동 강도는 이미 유머로 희화돼 회자 될 만큼 세다. 일주일 연속 야근한 것은 불평거리도 되지 않는다. 주변을 찾아보면 세 달 연속 야근 및 주말 출근의 ‘대기록’ 보유자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이 바닥이다. IT중에서도 게임업계의 노동 강도는 남다르다. 개발실에 간이 침대를 놓고 숙식을 해결하며 몇 달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은 사례는 이제 전설 축에도 끼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T 특히 게임업계 종사자들은 왜 노조를 조직하지 않을까? 중소 개발사는 물론 엔씨소프트, NHN, 네오위즈, 넷마블 등 대기업에 속하는 게임업체들도 근로자의 권익을 보장하는 기본 교섭단체인 노조가 없다. 일부 기업들은 직원들로 구성된 협의체를 가지고 있지만 이를 노조로 보기는 힘들다. 노조가 없으면 근로자들은 사용자 측에 대해 단체교섭권을 가질 수 없다. 연봉, 근로환경 등 노동 조건의 핵심사안에서 열쇠를 쥐고 있는 쪽은 사용자 측이다. 힘이 없는 개인 근로자들은 뭉침으로서 사용자 측과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물론 노조 없이 사용자 측과 근로자 측이 합의 하에 모두가 만족하는 근로환경을 만들어 나간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많게는 천 명이 넘는 인원들이 대다수가 만족하는 안이 도출되기란 현실적으로 힘들다. 때문에 태생적으로 근로자와 상반되는 입장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사용자 측에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조직화 된 힘이 필수적이다. 이 대목에서 오래된 격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당하기 쉽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가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IT 특히 게임업계 종사자들은 왜 노조를 조직하지 않을까?
좋아서 하는 일이라 이 악물고 버틴다
게임업계서 일하는 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좋아서 이 일을 택한 경우가 많다. 이는 특히 기획이나 프로그래머 직군에서 두드러진다. 직업 자체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것은 주변 환경이 열악하더라도 ‘참고 버티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영화 제작 스텝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도제(徒弟)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영화 스텝의 경우 대다수가 적은 급여에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지만, 쉽사리 그 판을 뜨지 못한다. 게임업계의 경우 열정 하나로 버티는 이 같은 현상은 1세대에서 두드러졌다. 현재는 기업화 된 조직이 많아진 관계로 이러한 경향은 덜 하지만, 여전히 게임이 좋다는 이유 하나로 업계로 투신하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개인주의적 성향과 자유로운 근무환경도 한 몫
IT종사자 특유의 개인적인 성향과 타 업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근무환경도 게임업계 근로자들의 ‘조직화’를 어렵게 하는 요소다. 일단 게임업계를 비롯한 IT회사의 근로자의 평균 연령은 30대 중 초반으로 타 업종에 비해 젊다. 근로자의 대부분이 사회활동이나 조직화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는 세대이기 때문에 집단행동에 대해 소극적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또 제조업 위주의 기업에 비해 IT근로자들은 개인적이고 자유로운 근무 환경을 가지고 있다. 게임개발사 중에는 개발 직군에 한 해 탄력 근무제를 도입하는 곳이 많다. 출퇴근 시간이 완벽하게 자유로운 경우는 없지만 근무 시간을 채우면 크게 근태에 대해 문제 삼지 않는다. 자유로운 근무 환경은 근로자들을 흩어 놓는 동시에 근무 조건 대한 불만을 완화 시키는 효과가 있다.
개발자들이 이른바 패밀리로 묶여있다는 점도 전체 ‘조직화’의 장애요소다. ‘패밀리’는 특히 중소형 규모의 업체에서 자주 보이는데, 서로 잘 아는 사람들끼리 팀을 이루고 있는 경우를 일컫는다. 패밀리는 이직 등 근무 외적인 조건에 있어서도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개발자들 스스로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여기고 있다. 사실상 게임업계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정치’도 이 패밀리와 무관하지 않다. 현직 게임 개발자 박 모 씨는 ”(패밀리는)소속 근로자끼리 갈등을 야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자기 사람이 아니다 싶으면 바로 배척 되기 때문에 함부로 불만을 드러내기 힘들다.”고 말했다.
▲ 2003년 IT개발자들이 주축이 된 노조(http://it.nodong.net/)가 설립되기도 했으나, 참여는 저조하다
저항보다는 이직으로 불만 표출
이런 이유로 게임업계 근로자는 회사에 불만이 있을 경우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보다는 회사를 떠나버리는 방법을 선택한다. 가장 최근에는 엔씨소프트에서 ‘리니지3’ 개발하던 팀이 집단 이탈한 사례도 이에 속한다. ‘리니지3’ 사태는 회사 처우에 불만을 품은 핵심 개발자들이 비공개 자료를 가지고 일본의 경쟁업체와 접촉하면서 시작됐다. 사태를 주도한 핵심 개발자들은 회사가 이를 문제 삼기 시작하자 퇴사를 했고 이후 ‘리니지3’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휘하 개발자들과 함께 다른 게임 개발사를 설립했다. ‘리니지3’ 사태의 핵심개발자들은 당시 엔씨소프트 측에 당시 회사에서 영입했던 해외 유명 개발자만큼의 대우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최근에는 한 중소 개발사 A에서 프로젝트를 담당하던 팀장이 B사로 이직 후 남아 있던 팀원들이 모두 B사로 옮기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위의 두 사례는 패밀리로 묶여진 개발자 조직이 회사에 불만이 있을 경우 대처하는 방식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규모 인원이 근무해 조직화된 힘을 보여주기 쉬운 대기업의 경우 상대적으로 ‘좋은 직장’이란 이유로 근로자들이 만족하는 경우도 종종 나타난다. 대기업으로 분류되는 게임업체에서 기획자로 일하는 이 모씨는 “중소 개발사에서 오랜 기간 힘든 시간을 보내고 경력직으로 입사했다.”며 “근로 시간이나 급여를 객관적인 잣대로 봤을 때 환경이 좋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개인적으로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 모씨는 이어 “회사에 불만을 표시하기 보다는 이 조직 안에서 오랫동안 하고 싶은 것을 해보는 것이 목표.”라고 덧붙였다.
비조직화는 운영자 등 비정규직 근로자에게 직격탄
게임업계 근로자들의 비조직화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처우개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 정규직 근로자들이 단체행동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는데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공간은 아예 없다.
게임업계의 경우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CS 직군에 특히 몰려있다. 몇몇 게임의 경우 운영자를 정규직으로 고용해 게임을 서비스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게임들 특히 대형 게임은 관리자급 운영자를 빼고는 대부분 파견이나 비정규직으로 운영자를 고용한다. 이들 운영자 대부분이 한 달에 채 100만 원이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며 하루 12시간씩 근무를 한다.
문제는 이런 파견 시스템이나 비정규직에 대한 문제의식 결여가 이미 만성화 됐다는 점이다. 대기업에 속하는 게임업체의 경우도 초기부터 이어져 온 CS 업무의 파견직 시스템 고수하고 있다. CS직군의 경우 단체행동을 한다면 당장 게임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어떠한 ‘스트라이크’도 보고된 바 없다. 비정규직 특히 운영자에 대한 처우 문제는 게임메카와 한겨레 등 일부 매체에서 제기한 바 있지만 아직까지 개선되고 있지 않다. 오랫동안 별다른 이의 없이 이어져 온 시스템이, 비정규직의 권리를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한 중견업체에서 비정규직 운영 및 QA로 1년 이상 근무하다 그만둔 조 모씨는 “비정규직의 경우 정규직이 되겠다는 목표 하나만 보고 일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쉽사리 조직적인 행동을 하기는 힘든 일.” 이라며 “정규직 선배들의 경우도 비정규직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승자이기 때문에 그런 방식을 통해 (정규직으로) 올라오길 원한다.” 고 말했다.
2009년 국내 온라인게임 시장은 3조4171억원 수준으로 전년대비 26.9% 성장했다.(한국 콘텐츠 진흥원 발표) 각 기업들은 최근 앞다투어 실적 발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사상최대의 실적을 내놓고 있는 한국 게임업계는 이제 그 성과에 헌신한 근로자들에게 정당한 보상을 돌려줘야 할 때다. 그리고 그 열쇠는 근로자 스스로가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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