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몇 주간 ‘둥지짓는 드래곤’, ‘페이트’ 시리즈 등, 상당히 쎈(?) 작품으로 인사 드렸습니다. 두 작품 모두 판타지 세계에서 펼쳐지는 치열한 전투를 다루다보니 주인공과 히로인 사이의 미묘한 감정 변화보다는 세계의 위기라든지… 많이 심각한 내용이 더 부각되곤 하죠.
하지만 역시 미소녀게임 꽃은 로맨스가 아닐까 합니다. 선택지에 따라 달라지는 히로인과의 관계, 아슬아슬한 감정 교류. 거기에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순애 테마까지 더해진다면 한겨울 찬바람에 언 마음까지 사르르 녹아버리는 기분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겨울을 녹일 따스한 게임 ‘ef- 어 페어리 테일 오브 더 투(ef- A fairy tale of the two, 이하 ef)’를 준비했습니다. 메인 캐릭터는 물론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등장인물까지 모두 안타깝고, 힘겨운 사랑을 하고 있는 게 특징인데요. 마음이 울적해 한바탕 울고 싶은 날에 해보시길 권합니다. 하지만 청소년이용불가 게임이니 성인들만 플레이하시기를...
▲ 'ef - the first tale' 타이틀 이미지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 'ef - the first tale' 타이틀 이미지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오프닝 영상으로 마음을 사로잡다
‘ef’는 지난 2006년, 미노리(minori)라는 회사에서 출시한 미소녀게임입니다. 애초에 2부작으로 기획된 타이틀로 2006년에는 1부작 ‘the first tale’이, 2년 후인 2008년에는 ‘the latter tale’이 나왔죠. 당시 제작사 미노리는 유명한 회사가 아니라 게임 역시 '아웃오브안중'이었는데요, 처음으로 공개된 오프닝 영상 하나로 단숨에 기대작으로 떠올랐답니다. 얼마나 게이머들의 심금을 울리는지 일단 영상을 직접 보며 느껴보죠.
▲ 'ef - the first tale' 오프닝
▲ 'ef- the latter tale' 오프닝
‘ef’ 오프닝 영상은 ‘언어의 정원’, ‘초속 5cm’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애니메이션 감독 신카이 마코토가 제작했습니다. 신카이 감독은 ‘빛의 마술사’라는 별명처럼 빛의 움직임을 아름답게 묘사해 유려한 배경을 보여주는 걸로 유명한데요. 그 덕분에 ‘ef’ 영상은 출시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소녀게임 팬들 사이에서 인상적인 오프닝으로 손꼽히곤 합니다.
액자식 구성으로 짜여진 다섯 커플의 사연
‘ef’는 옴니버스 방식으로 다섯 커플의 에피소드를 보여줍니다. 다섯 커플 모두 아픈 사연이 있죠. 불의의 사고로 사별을 하거나, 둘 중 하나가 불치병을 갖고 있어서 이뤄질 수 없는가하면, 13시간 간격으로 기억을 잃어서 자기가 어떤 사람을 사랑했는지 잊어버리는 캐릭터도 있죠. 설정만 봐도 가슴이 먹먹합니다.
▲ 헤어져 있던 시간이 길어서인지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두 사람
▲ 헤어져 있던 시간이 길어서인지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두 사람
표면상 주인공은 아미미야 유우코와 히무라 유우 두 사람입니다. 오프닝 영상에 나오는 긴 머리 여성과 흰 머리 남자죠. 이 커플은 우여곡절 끝에 작은방을 얻어 함께 살아가는데 그 와중 불의의 사고로 둘은 영영 헤어지고 맙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유우는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고 유우코를 기리며 삶을 보내죠.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교회에서 유우코를 다시 만난 유우는 그간 마음에 담아줬던 못다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만나지 못했던 시간 동안 목격했던 커플들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는 거죠.
그 과정에서 다른 네 커플에 대한 이야기가 옴니버스 식으로 전개됩니다. 앞서 언급했듯 네 커플에게도 각자 나름의 사연이 있죠. 스토리는 다섯 가지지만 챕터별로 이야기가 종결되는 방식이라 히로인 여러 명을 공략하는 재미는 없습니다. 에피소드 하나에 커플 한 쌍의 이야기만 다루는데다가 주인공 모두 오로지 서로만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 'ef'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 히무라 유우: 마을의 교회에서 항상 볼 수 있는 청년. 겉보기에는 딱딱하고 말을 걸기 어려운 느낌이지만 의외로 먼저 다가가면 스스럼없이 받아준다. 보기보다 넓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신도 치히로의 보호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 아미미야 유우코: 정체불명의 소녀.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났다가 조용히 사라진다. 상냥한 누나라는 느낌으로 다른 주인공과 히로인들 앞에 나타나 인생이나 연애상담을 해준다. 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대낮에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지만 본인의 말로는 직업이 있다고 한다.
▲ 'ef'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독특한 연출로 미소녀게임의 한계를 뛰어넘다
대략적인 스토리라인만 보면 ‘ef’는 정말 정적인 게임입니다. ‘페이트’ 시리즈처럼 긴박한 전투 장면도 없고, ‘둥지짓는 드래곤’처럼 전투 시스템도 존재하지 않죠. 하지만 미노리는 발상의 전환으로 몰입감을 극대화시켰습니다.
미노리가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화면 연출입니다. 우선 다른 게임이 어떤지 볼까요. 일반적으로 미소녀게임은 배경 이미지 위에 캐릭터 CG를 올려놓고, 대사를 보여줍니다. 상황이 변하면 자세가 조금씩 다른 CG로 바꾸며 간단하게 감정표현을 나타내고, 중요한 장면에서는 아예 따로 그려진 CG를 보여주는 게 보통이죠.
그런데 ‘ef’의 화면 연출은 기존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캐릭터가 가만히 서 있으면서 대사만 바뀌는 방식이 아니라, 대부분을 상황 묘사 CG로 대체했습니다. 그러니까, 100미터 밖에 있던 히로인이 플레이어를 발견하고 달려올 때 일반적인 미소녀게임은 '그녀가 나에게 달려 온다'는 식의 지시문으로 상황 변화만 알려준다면, ‘ef’는 히로인이 멀리 서 있는 CG와 가까이 다가왔을 때 CG를 따로 넣었습니다. 여기에 눈을 깜빡이거나 입을 움직이고, 캐릭터가 이동할 때 배경을 움직이는 등 간단한 동작을 더하여 마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생생한 화면을 완성해냈습니다.
▲ 'ef' 화면 연출 장면
▲ 히로인이 대화하는 캐릭터와 마주보는 듯한 연출을 넣어 몰입도를 높였다
사실 ‘ef’에서 사용된 연출 방법이 아주 특별한 건 아닙니다. CG를 다양하게 넣으면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미소녀게임은 CG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수량을 늘리면 개발비가 어마어마하게 증가합니다. CG를 많이 쓰면 입체적인 연출이 가능하지만 비용 부담 때문에 많은 회사들이 알면서도 못하는 거죠. 보통 미소녀게임에 사용되는 CG가 평균 400개에서 600개 정도인데, ‘ef’에는 무려 1,800개나 됩니다.
그렇다면 미노리는 어떻게 ‘ef’에 그렇게 많은 CG를 넣을 수 있었을까요? 자본력이 빵빵한 거대회사도 아닌데 말입니다. 비결은 배경 이미지와 캐릭터 CG를 합성한 것입니다. 배경과 캐릭터를 따로 그리고, 필요에 따라 합성해 리소스를 절감한거죠. 예를 들어 동일한 캐릭터가 각기 다른 장소에 등장한다고 칩시다. 이 경우 원래는 새로운 그림 2장을 그려야 되는데, 캐릭터가 분리되어 있다면 배경만 2개 마련하고 캐릭터를 옮겨 놓으면 됩니다. 반대로 동일한 배경에 다른 캐릭터가 등장하는 경우도 그림을 2번 그릴 것 없이, 배경 위애 캐릭터만 바꾸면 되죠. 즉, 배경과 캐릭터를 따로 만들고 이를 상황에 맞개 배합하는 방식으로 많은 CG를 적은 리소스로 완성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완전히 새로 그려진 것 같지만, 배경 이미지 위에 작은 캐릭터 이미지를 합성한 것이다
▲ 정적인 배경 이미지 하나로 다양한 상황을 연출할 수 있다
감동을 극대화하고 싶다면 애니메이션도 함께
‘ef’는 훌륭한 연출과 분위기가 어우러진 타이틀입니다. 여기에 유명 애니메이션 감독 신카이 마코토가 만든 오프닝 영상까지 갖췄으니 눈과 귀가 매우 즐겨워 집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부작 ‘the first tale’은 그다지 평가가 좋지 않습니다. 다섯 커플이 등장하는 만큼 다양한 스토리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는데 메인 주인공 미야무라 미야코 루트에 두 번째 에피소드 히로인 신도 케이가 너무 깊게 관여하고 있었던 거죠. 그러다 보니 이어지는 두 번째 에피소드는 앞에서 본 내용이라 힘이 좀 빠집니다.
다행히 2부작 ‘the latter tale’가 출시되기 1년 전인 2007년에 ‘ef’ 애니메이션이 방영되어 1부작 내용이 갈무리됩니다. 여기에 애니메이션 자체 반응도 워낙 좋았던 편이라 ‘the latter tale’이 나오기 전에 유저들의 시선을 끄는데 성공했죠. 개인적으로도 1부작 시나리오는 게임보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해하는 것을 권하는 편입니다.
이후 출시된 후속작 ‘the latter tale’은 전작 연출 기법은 그대로 가져오는 동시에 미완성이었던 시나리오를 완성시켜 호평을 받았습니다. 시리즈 초반에 좀 삐걱거렸지만 역경을 극복하고 명작으로 남게 된 거죠. 어떻게 보면 역경을 딛는 게임 속 캐릭터와도 참 닮은 타이틀입니다.
▲ 아련미 넘치는 CG로 마무리합니다
▲ 아련미 넘치는 CG로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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