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녀게임을 이야기하다보면 일본 게임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래도 미소녀 콘텐츠가 가장 발달한 곳이 일본이고, 국내에 잘 알려진 타이틀도 일본 작품이 많기 때문이죠. 실제로 그 동안 [미소녀메카]를 통해 소개한 게임도 대부분 일본에서 왔죠.
[미소녀메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테마를 앞세운 미소녀게임에 그 게임으로 애니메이션까지 뚝딱뚝딱 만드는 일본을 유의 깊게 지켜보게 되었는데요. 그 중에는 ‘왜 한국에는 저런 게임이 없을까...’ 라며 아쉬워하시는 분도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국에도 미소녀게임과 만화를 엮은 작품이 있었습니다. ‘프로젝트 제로’라는 이름으로요. 2000년 미소녀게임 불모지에 가까웠던 한국에서 게임은 물론 같은 IP를 활용한 소설, 만화, 화보집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나름 ‘블록버스터' 프로젝트였죠. 90년대와 2000년대 청소년기를 보낸 독자 분들이라면 박성우 작가의 '제로'를 아시리라 예상하는데요, 이 '제로'가 사실 이번에 소개할 미소녀게임 '제로 흐름의 원'을 기반으로 한 만화였습니다.
▲ '제로 흐름의 원' 오프닝 영상
▲ '제로 흐름의 원' 오프닝 영상
한국 미소녀게임사에 큰 획을 그을… 뻔 했던 ‘아트림미디어아트림 미디어’
게임과 만화, 소설을 하나로 묶어 내는 것은 지금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즘이야 출판 만화에 비해 제작 기간이 짧은 웹툰이 있어서 두 가지를 병행하기 쉬워졌지만, 출판 만화가 대부분이었던 2000년에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이러한 와중 '미소녀게임'을 내고 이를 소재로 한 만화, 소설을 같이 낸다는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를 기획한 한국 회사가 나타났습니다. 현재 웹툰 전문 플랫폼 '코믹GT'를 서비스 중인 '아트림미디어'가 그 주인공입니다.
아트림미디어는 국내 업계에서도 파격적인 시도를 많이 했던 회사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그 '파격적인 시도' 중 대표적인 것이 지금 소개 중인 '프로젝트 제로'죠. '프로젝트 제로'는 앞서 소개했듯이 동일한 IP를 가지고 미소녀게임도 만들고, 만화도 출간하고, 소설과 화보집까지 동원됐습니다. '미소녀'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다했다고 봐도 무방하죠. 특히 최상위 인기 만화가로 평가받았던 박성우 작가가 참여해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요, 박성우 작가는 게임 내용을 다룬 만화 단행본 ‘제로 흐름의 원’을 맡았습니다. 여기에 게임 스토리 과거를 다룬 만화 ‘제로 시작의 관’을 연재하기도 했죠.
▲ 사실 게임보다 만화가 더 유명합니다
게임도 단순 비주얼노벨이 아니라 스토리 진행에 핵심을 맞춘 어드벤처에 전투를 결합한 게임성을 앞세웠습니다. 여기에 캐릭터마다 스킬 영상을 따로 넣고, CG도 완성도 높게 뽑아내 보는 맛을 살렸죠.
여기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임달영 작가가 담당했습니다. 임달영 작가는 한국 미소녀 콘텐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이름일 텐데요, 1994년 ‘레기오스’라는 소설로 데뷔했습니다. 이후 ‘마이트전기’, ‘플러스 내 기억속의 이름’ 등을 작업했죠. 그렇지만 작업물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프로젝트가 ‘제로 흐름의 원’이다 보니 이 작품으로 많이 알려진 사람입니다.
임달영 작가는 굉장히 뚜렷한 작품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공 주변에는 언제나 그를 받아주는 캐릭터가 있고, 히로인이 모종의 이유로 주인공과 엮이며 괴롭힘을 당하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윤회와 초능력이 키워드인 ‘제로 흐름의 원’에서도 그런 경향이 고스란히 드러나죠. '제로 흐름의 원'은 한국의 '미소녀게임 드림팀'이 참가한 프로젝트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요. 이러한 세밀한 과정을 거쳐 출시된 게임은 과연 어땠을지 지금부터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 임달영 작가의 작품
▲ 임달영 작가의 작품
‘제로 흐름의 원’의 테마 ‘윤회’
▲ '제로 흐름의 원' 시작 화면
앞서 언급했듯 ‘제로 흐름의 원’ 테마는 윤회와 초능력입니다. 게임은 크게 3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초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1부 ‘남매의 관’, 그보다 과거 이야기를 다룬 2부 ‘속박의 관’, 그리고 1부 세계관으로 다시 돌아와 스토리에 종지부를 찍는 3부 ‘해방의 관’으로 구분되죠. 1부 세계관이 3부에 다시 돌아온다는 부분은 핵심 테마 '윤회'와 연결됩니다. ‘사람에게는 전생이 있고, 전생의 업보를 환생한 후에 갚는다’는 전제가 스토리 중심을 이루죠.
▲ 가족간의 따뜻한 사랑을 다룬 게임(?)
▲ 현생 주인공 '유기'의 꿈에 계속 나오는 여인
실제로 주인공은 전생과 현생을 반복하며 이야기르 풀어나갑니다. 주인공은 고등학생 ‘유기’이며 학교를 다니고 친구를 만나는 일상 속에서 새로운 히로인을 만나게 됩니다.그리고 여러 히로인을 만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피소드들을 통해 '유기'의 전생을 엿볼 수 있죠. 게임 시나리오 역시 '유기'가 본인의 전생을 알아가는 동시에, 과거의 기억을 기반으로 현생에서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파악하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죠.
▲ 유기: '제로 흐름의 원' 주인공. 권위적인 스타일이지만, 주변 여자에게는 잘합니다. 싸움을 잘하는 고등학생이라 주변 불량배들에게 '사신'이라는 예명으로 불립니다. 누님 캐릭터 '유이리'를 짝사랑하고 있습니다.
▲ 유영시: '유기'의 여동생. 오빠를 상당히 좋아하는 '브라더 콤플렉스' 캐릭터입니다. 무조건 오빠에게 매달리고, 모든 생활의 중심에 오빠가 있는 여동생 타입. '제로 흐름의 원' 캐릭터 중 가장 많은 변화를 겪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 유이리: 조용한 누님 계열 캐릭터로, 주인공과 같은 성을 쓰지만 친남매는 아닙니다. 부드러운 성격으로, '유기'와 '유영시' 보호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유기'를 좋아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짝사랑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속박의 관'에서 밝혀집니다.
▲ 진격언 (아사카와 케이이치): 침착하고 냉정한 악역 캐릭터입니다. 주인공 '유기'와 전생과 현생에서 모두 악연으로 맺어져 있습니다. 플레이 중에는 자주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 하나: 행동력 있는 부잣집 아가씨. '유기'에게 한눈에 반해서 따라붙는 엑스트라 같아 보이지만, 현재와 전생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가시현: '유기'의 전생. 전생에서는 '고족'의 귀족으로, 어린 나이에 전사가 됩니다. 여러모로 완벽한 캐릭터이지만, 너무 완벽했던 나머지 본인은 물론 주변까지 불행하게 만들어버리죠.
▲ 가의: 어릴 적 '가시현'에게 구해져 아내가 되는 소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으로 '가시현'에게 항상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가시현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지 못합니다.
▲ 지하나: 전생에 대한 비밀을 간직한 '영족'의 마지막 생존자로 감정 표현이 거의 없습니다. 주인공의 전생 캐릭터 '가시현'의 후처이기도 합니다. 현생에서는 '유기'의 꿈에 등장합니다.
▲ 센풍: '가시현'의 부족인 '고족' 왕자로 호탕하고 성격이 좋습니다. '가시현'보다는 못하지만 나름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데, 한 여자에 대한 집착과 주인공에 대한 질투심을 숨기지 못해 모든 비극의 원인이 됩니다.
‘제로 흐름의 원’에서는 여러 여성 캐릭터를 공략하지 않습니다.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지만, 히로인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스토리도 거의 한 방향으로 진행되죠. 엔딩이 3가지지만 내용이 거의 비슷합니다.
가지처럼 갈라지는 다양한 엔딩 대신 핵심 재미 요소로 집어넣은 것이 '전투'입니다. 맵을 이동하는 도중에 '이벤트 전투'가 발생하고, 전투를 하나씩 마무리해가며 메인 스토리에 다가가는 방식이죠. 다만 '이벤트'라고 하기에는 전투가 너무 자주 발생해 메인 스토리를 즐기는 것에 방해가 될 정도라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 옛날 게임이긴 하지만 전투는 정말 힘듭니다...
▲ 옛날 게임이긴 하지만 전투는 정말 힘듭니다...
초능력과 근미래를 소재로 독창적인 전투 시스템도 뽑아냈죠. 일반 기술과 콤비네이션 포인트를 조합해 사용하는 특수 기술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문제는 완성도가 너무 낮습니다. 스킬에 일일히 영상을 넣고 목소리까지 녹음해 입힌 세심한 연출은 좋지만 반복전투와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캐릭터별 옵션, 불편한 시스템, 여기에 시나리오에 집중하던 중 펼쳐지는 반 강제적인 전투 때문에 집중도가 떨어져 버립니다.
여기에 자유롭지 않은 세이브와 전투 시 가끔씩 이유 없이 튕기는 버그는 덤이죠. 차라리 전투 스킵 기능이 있었으면 스토리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으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토리 보기에 집중한 비주얼노벨보다 조금 더 '게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전투'와 '스토리'가 차지하는 비중에 균형을 맞추지 못한 것 같은데요. 개인적으로는 시나리오에 조금 더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어쨌거나 의미있는 시도였다
앞서 소개한 부분에서 예상하셨겠지만 ‘제로 흐름의 원’은 성과가 좋지 못했습니다. 판매량과 인기 면에서 처참한 성적표를 받았죠. 게임보다 박성우 작가가 그린 만화 '제로'가 더 유명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게임이 메인이고 만화는 이를 뒷받치는 관계였는데 주객이 전도된 셈이죠.
미소녀게임을 종종 즐기는 필자는 ‘제로 흐름의 원’의 뼈 아픈 실패에 큰 아쉬움을 느낍니다. 불편한 전투 시스템이나 불안정한 최적화, 버그 등이 발목을 잡긴 했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쉽게 나오지 않을 '대형 미소녀게임 프로젝트'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작품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면 한국 미소녀게임 시장도 지금보다는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제로 흐름의 원’ 3부 ‘해방의 관’ 이야기를 다룬 웹툰이 코믹GT에서 연재 중이라는 겁니다. 앞서 말했듯이 '코믹GT'는 아트림미디어가 운영 중인 웹툰 플랫폼인데요, 출시된 지 16년이 지난 게임을 소재로 한 웹툰을 내놓을 정도로 '제로 흐름의 원’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고 생각되네요.
▲ 그래도 언젠가는 페이트처럼 많은 팬을 가진 한국 게임이 나오길 바라면서 물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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