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플레이스테이션(이하 PS)과 더불어 차세대 게임기로서 한창 주가를 날리던 세가 새턴(이하 SS)이라는 하드웨어가 있었다. 하드웨어 자체의 성능은 PS와 그다지 차이가 없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소비자 점유율에서 점차 PS에게 밀렸던 SS의 발매 스케쥴에 ‘컬드셉트’라는 게임이 올라왔다. 잡지의 신작 소개란에 ‘전략 보드 게임’이라는 문구가 필자의 눈길을 순간 잡아끌었지만 이내 “보드 게임은 CPU가 결정하는 주사위 숫자에 의해 진행되고 CPU 맘대로 일어나는 랜덤 이벤트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는 우연성이 짙은 게임일뿐”이라는 사고를 갖고 있던 필자에게 큰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또한 저물어가는 게임기, 즉 SS으로 출시되는 게임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보드 게임을 즐겼다. 그 옛날의 뱀주사위 놀이부터 시작해 시대를 풍미했던 부루마블, 인생 게임을 비롯해 성인이 된 최근에는 영어로 된 모노폴리까지. 또한 게임기로 출시되는 보드 게임 중 일정 수준 이상의 재미를 보장하는 시리즈물은 다 한 번씩 즐겨보았다. 이 게임들을 해보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게임을 하는 사람들의 개인차가 무시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규칙만 알면 5살 아이부터 80살 어르신까지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지만 실력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오직 주사위를 굴렸을 때 눈이 몇이 나왔는지에 의해서만 결과가 결정되는 보드 게임은 점차 나이를 먹게 되자 더 이상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 언제 나왔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뱀주사위 놀이. 20년도 더 된 작품으로 기억된다. 당시 가격은 30원이었다 |
▲ 대략 20년 전쯤에 등장한 부루마블. 블루마블(blue marble)이 어째서 부루마블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
▲ 말판 보드 게임의 원조 모노폴리. 지금까지도 다양한 버전으로 계속 출시되고 있다 |
컬드셉트에 대한 첫 기사를 본 후 몇 달이 지났을까, 후배 녀석이
저녁 때 집으로 놀러오면서 게임을 하나 가져왔다. 필자랑 함께 하고 싶었다나? 무슨
게임인가 싶어 물어보았더니 “현존하는 최고의 보드 게임”이라며 나랑 꼭 한 번
플레이를 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막 출시된 컬드셉트를 들고 온 것이다.
게임의
규칙은 매우 간단하다. 부루마블은 정해진 맵 위를 주사위를 굴리며 이동하다가 빈
땅이 있으면 거기에 건물을 짓는데, 컬드셉트는 건물 대신 자기 카드에 있는 몬스터를
배치한다. 만약 상대편 땅에 멈추면 정해진 통행료를 지불하거나 자기 카드를 이용해
배치된 몬스터를 물리쳐 땅을 빼앗으면 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정해진 마나(통행료
개념)를 채우면 그 맵에서 승리자가 되는 시스템이다. 어떤가, 간단하지 않은가?
필자는 후배와 게임을 하면서 상대편 땅에 멈췄을 때 무조건
통행료를 지불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선택에 따라 그 땅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선택지가 있다는 점에 크게 놀랐다. 이전까지는 CPU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 게임이
진행되었는데 비해 컬드셉트는 플레이어에게 그 선택권이 돌아온 것이다. 그 땅을
빼앗을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자신의 카드를 이용해 싸움을 붙이고, 통행료가 저렴해
굳이 지금 싸울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면 그냥 통행료를 지불하고 지나가면 된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자기가 들고 있는 카드 중에는 몬스터 카드(게임에서는
크리처 카드라고 부름)만 있는 게 아니라 공격력, 방어력, 각종 특수능력을 몬스터에게
부여해주는 아이템 카드라는 게 있어 전투시 몬스터 카드와 아이템 카드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전투의 승패가 결정된다는 점이다. 상대편 땅에 멈췄을 때 그
땅을 지키고 있는 상대편 몬스터의 능력과 상대편이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아이템을
가정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몬스터와 아이템으로 물리칠 수 있는지 파악,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면 공격하는 시스템. 이것이 바로 컬드셉트의 최대 백미인 카드
배틀이다.
컬드셉트의 또 다른 특징은 몇 백가지나 되는 다양한 카드들이다. 최신작인 ‘컬드셉트 세컨드 익스팬션’에서는 약 500 종류나 되는 카드가 등장하는데, 그 능력들이 천차만별이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전략이 가능하다. 철벽의 수비형 전법도, 맹렬한 공격형 전법도 모두 플레이어 마음대로다. 또한 카드들이 갖고 있는 각각의 특화된 성능에 맞춰 아이템 카드를 조합하면 일격사 공격, 2배로 돈 뜯어내기 등 엽기적인 플레이법도 가능하니….
▲ 이 녀석한테는 무슨 아이템을 사용할지 고민하는 그 재미가 이 게임의 백미 |
▲ 전투의 흥을 돋워주는 화려한 효과도 빼놓을 수 없다 |
▲ 스테이지마다 정해진 마나량을 가장 먼저 채우면 승리 |
▲ 경기가 끝난 후에는 전체적인 진행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
플레이어에게 게임의 주도권이 돌아온 점, 풍부한 전략성, 카드
조합에 의한 다양한 플레이법 등 컬드셉트에는 많은 장점이 있지만, 필자가 컬드셉트에
빠져들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바로 게임의 밸런싱 부분이다.
수많은
카드가 있다보니 그 중에는 약한 카드, 강력한 카드가 있게 마련이고 이럴 경우 사람들은
대부분 강력한 카드만을 사용한다. 거의 철칙과도 같다. 그러나 컬드셉트에는 이
철칙이 통용되지 않는다. 공격력과 방어력이 높아 소위 좋은 카드로 평가받는 몬스터
카드는 사용비용이 높거나, 사용하기 위해서는 해당속성의 토지를 몇 개 이상 가지고
있어야 하는 등 다양한 제한조건이 붙기 때문에 쉽사리 사용할 수가 없다. 반면에
능력치가 조금 떨어지는 몬스터 카드들은 사용비용이 낮아서 초반에 마나가 부족할
때 마음놓고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전략에 따라 능력치가 낮은 몬스터 카드만을
사용해도 충분히 승리가 가능하다.
또한 컬드셉트에는 소위 무적의 카드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최강의 조합을 준비해두어도 이를 이길 수 있는 카드 조합이 반드시
존재한다. 물론 아까 이겼던 카드 조합을 다시 이기는 조합이 또 얼마든지 존재한다.
즉, 아무 생각없이 강력한 카드만 준비하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떤 상황에서
그 카드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언제나 다양한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이로 인해 전략적인 사고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 경기가 끝나 새롭게 입수한 카드를 확인하는 장면. 가장 뿌듯한 순간이다 |
▲ 컬드셉트 세컨드 익스팬션에서 새롭게 도입된 메달 요소. 경기 중에 특정 조건을 만족시켰을 때 얻을 수 있다 |
게임에는 장점과 단점이 함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CPU의 사고에 의해 진행되는 게임은 더욱 그렇다. 컬드셉트에도 그런 부분이 없지 않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속칭 ‘컴 사기’라고 불리는 CPU의 환상적인 플레이법이다. 플레이어의 주사위는 굴릴 때마다 상대편 땅에 멈추고, 아이템이 없어 싸울 때마다 전투는 패배해 통행료를 지불한다. 반면 상대편은 비싼 필자의 땅을 용케도 계속 피해다니는 상황.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제아무리 날고 기는 전략이 있어도 속수무책이리라. 그런데 사실 이런 경우를 회피하는 방법도 있긴 하다. 주사위의 눈을 강제로 특정 숫자로 고정시키는 카드도 있고, 통행료를 반으로 낮추는 카드도 존재하므로 이런 상황에서 적절하게 써준다면 천하무적 ‘컴 사기’에도 대처할 수 있는 것. 물론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카드가 있어야하는 전제조건이 붙지만….
컬드셉터 세컨드 익스팬션은 시리즈의 최신작이니만큼 등장하는
카드도 많아지고 게임 밸런스도 더욱 다듬어졌다. 또한 영지 능력이라는 시스템이
추가되어 전략의 폭이 더욱 넓어졌다. 게임성에서만 보면 필자는 이 작품보다 뛰어난
작품을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물론 개인적인 차이가 있을테니 다른 사람에게까지
이 의견을 강요하진 않지만, 그래도 얼마나 훌륭한 작품인지에 대한 기준은 제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좋은 게임이 국내에 정식으로 발매되어 진심으로
기쁘다. 혹시나 필자가 지금 쓴 이 글로 인해 컬드셉트에 대해 호기심이 생겨난 분이
있다면 바로 컬드셉트를 구입해 플레이해보기 바란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즐겨보기
바란다. 게임의 재미에 혼자 중독되어 폐인이 되는 것보다는 친구와 함께 중독되어
폐인 동지가 늘어나는 게 위안이 될테니 말이다.
▲ 이 게임의 국내 정식 발매는 역사적인 위업이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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