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에 경험한 카스: 컨디션제로 한글판의 느낌은 “낭패로군…”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었다. 오뉴월에 엿가락 늘어지듯 지지부진하게 출시연기를 거듭하고 있다는 점은 둘째치더라도 그렇게 오랜 기간동안 도대체 무슨 일을 했을까 싶을 정도로 게임은 조악한 수준의 발전에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 카스 골수매니아들에겐 다소 익숙치 않은 모습들이다 |
2003년 9월 발매가 미끄러진 이후 컨디션제로의 개발사는 ‘터틀락스튜디오’로 또 한번 바뀌었다. 마스터버전에 가까운 컨디션제로의 복사본이 인터넷에 유출된 시점이었다. 미완성된 유출버전에 불과하지만 컨디션제로의 싱글플레이를 접해본 게이머들은 각종 포럼에 혹평을 쏟아놓으며 하프라이프 2 유출사건으로 진퇴양난에 빠진 밸브소프트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6개월이 지난 지금, 밸브소프트는 컨디션제로의 2004년 3월 발매를 목표로 막바지 작업에 돌입했다. 직접 플레이해보고 느낀 컨디션제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롭게 단장한 모습. 김이 빠질대로 빠진 상황에서 삐딱한 자세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던 필자는 곧 키보드와 마우스를 잡은 손놀림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 클릭&플레이 형식으로 진행되는 싱글플레이 |
무엇이 추가되고, 무엇이 바뀌었는가
터틀락스튜디오
버전(?) 컨디션제로는 멀티플레이 입문을 위한 일종의 커스텀모드인 튜어 오브 듀티(Tour
of Duty)와 이전에 유출된 싱글플레이 버전으로 게임이 구성됐다.
발매 후에도 이러한 명칭이 쓰일지는 미지수이지만 싱글플레이 버전의 경우 삭제장면(Delete Scene)이라는 이름이 첫 화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버리긴 아깝고 살리자니 게임성을 떨어뜨릴 것만 같은’ 삭제장면 싱글플레이는 이전의 18개 미션에서 6개가 줄어든 12개의 미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싱글플레이는 이전에 공개된 버전과 마찬가지로 특정장소에서 테러범을 소탕하거나 인질, 요인 등을 구출하는 미션이 주를 이룬다. 게임이 시작되면 임무의 목적이 나열된 후 그것을 따라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는 식으로 진행되는데, 요즘에 나오는 드라마틱한 구성의 완성도 높은 액션게임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나름대로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영화적 연출 등은 칭찬할만하다. 가끔 M4A1을 지니고 있는 대원들을 향해 시미터나 일본도 따위를 들고 달려드는 적들이 황당할 때가 있지만 싱글플레이의 재미는 과거 레인보우식스 시리즈에 못지않은 긴장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미션은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거나 이전의 임무가 후일에 영향을 미치는 연관성은 지니고 있지 않다. 그저 특정 장소의 미션을 해결할 때 세계지도에 표기된 다른 지역이 열리는 식으로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다. 3년전 ‘최상의 싱글플레이’를 선사하겠다며 컨디션제로의 제작을 기획한 기어박스의 아이디어는 새로운 엔진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는지, 그 아이디어를 헤일로로 옮기기 위한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삭제장면’이라는 이름과 함께 일종의 서비스팩으로 전락하는 운명을 맞은 셈이다. 컨디션제로에서 제공되는 이러한 싱글플레이는 카운터스트라이크를 줄곧 즐겨온 게이머라면 6~8시간의 플레이타임으로 클리어가 가능한 수준이다.
▶ 튜어 오브 듀티의 맵선택과 동료구입(?) 화면 |
또 하나의 모드인 튜어 오브 듀티는 인공지능을 지닌 봇(Bot)과 함께 전투를 벌이는 일종의 멀티플레이 입문서와 같은 구성을 보여준다. 단순히 멀티플레이 맵에 봇을 집어넣고 게임을 즐기는 것이 아닌, ‘일정시간 내에 인질을 구출한다’거나 ‘스나이퍼 라이플만을 가지고 테러리스트를 사살’하는 식의 일종의 목적성을 띰으로서 게이머의 흥미를 유도한다.
▶ 캐릭터모델 선택과 무기구입화면 |
각각의 맵은 빨간색 자물쇠로 잠겨진 상태로, 게이머가 하나의 맵을 클리어할 때마다 활성화된다. 이렇게 제공되는 맵은 모두 18개. 재미있는 것은 미션을 클리어할 때마다 얻는 포인트를 이용해 동료를 구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동료는 각각 기술, 협동, 용기라는 능력치를 가지고 게이머의 선택을 받게 되는데, 높은 능력치를 지닌 동료일수록 더 많은 포인트가 필요하게 된다. 낮은 능력치의 캐릭터를 여러명 구입하든 정예요원을 높은 포인트로 한명 구입하든 게이머의 선택에 따른 문제지만 현재까지 개발된 버전은 경험상 다다익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 주어진 도전과제를 클리어해야만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갈 수 있다 |
무엇보다 튜어 오브 듀티나 커스텀게임처럼 컴퓨터를 상대로 게임을 플레이할 때 놀랄만한 점은 이전의 봇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뛰어난 인공지능이다. 컨디션제로의 봇은 맵의 지형지물을 완전하게 파악하고 게이머의 행동을 예측하는가 하면 기도비닉(적과 대치하거나 침투할 때 발각되지 않게 조용히 움직이는 것)을 구사하는 수준에 이른다.
적당한 레벨로 난이도를 올려둔다면 실전플레이를 위한 더할 나위없는 상대가 될 정도로 봇의 수준은 상당하다. 동료의 인공지능 역시 게이머의 라디오지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심지어 게이머에게 명령까지 하는 수준에 이르지만 적으로 출현하는 상대에 비하면 답답한 때가 많은 편이다. 물론 다른 게임의 인공지능과 비교하자면 훌륭한 수준이지만 말이다.
▶ 더스트(Dust) 맵의 변화. 카스 플레이어라면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
컨디션제로를 처음 접하고 놀란 점은 익숙하지만 새로운 느낌이 드는 그래픽의 변화였다. 마치 오래된 집에 도배를 새로 한 느낌이랄까? 컨디션제로에서는 카운터스트라이크에서 제공되던 기존의 맵 역시 모두 새로운 공정(?)을 거쳐 깔끔한 모습으로 태어났다.
▶ 더스트2. 천막과 바닥을 보니 왠지 다른 장소 같지 않은가? |
더스트 맵에서 테러리스트가 폭탄을 설치하기 위해 나오는 입구에 설치된 천막과 같은 물건이 바로 그것인데, 단순한 변화라고 하기엔 새롭게 입혀진 텍스처의 수준이 최근 출시된 액션게임에도 결코 뒤쳐지지 않는 상당한 퀄리티를 자랑한다. 잘 살펴보자면 몇 개의 오브젝트가 추가되고 텍스처가 정교하게 새로이 입혀진 것뿐이지만 기존의 카스를 즐겨온 게이머가 생소함을 느낄 만큼 비약적인 향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업그레이드된 오피스(Office)의 전경 |
▶ 이태리(Italy) 역시 확연히 다른 느낌을 풍긴다 |
단순히 맵의 모습만 변형시킨 것이 아닌, 전략의 변화를 꾀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을 보여주는 업그레이드맵이라고 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캐릭터 모델이 전혀 추가되지 않고 단지 텍스처의 변화만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밸브소프트의 설명에 의하면 정식서비스와 함께 모델이 2~3개 이상 추가될 계획이라고 하니 기다려볼 문제다.
컨디션제로가 기존의 카스와 비교될 만한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추가된 맵이다. 이전에 제작된 싱글플레이용 미션이 18개에서 12개로 삭제됐다지만 이는 모두 튜어 오브 듀티와 멀티플레이를 위한 맵으로 제공된다.
이렇게 멀티플레이용으로 컨디션제로에 포함된 맵은 카스용 25개, 컨디션제로 전용 18개를 합쳐 모두 43개다. 컨디션제로 전용으로 나오는 맵이 모두 새로운 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폭포가 흐르는 계곡 맵인 다운(cs_downed_cz)을 비롯해 활주로(de_airstrip_cz), 도쿄의 지하철인 패스트라인(de_fastline_cz), 스타디움 등 앞으로 몇 년은 울궈먹을만한 숫자가 포함됐다.
* 추가된 맵
▶ Silo |
▶ Alamo |
▶ Downed |
▶ Tides |
▶ Stadium |
▶ Fastline |
▶ Airstrip |
▶ Piranesi |
▶ Recoil |
▶ Motor |
▶ Chateau |
▶ Havana |
▶ Lostcause |
▶ Hankagai |
한글화의 수준 역시 상당하다. 물론 지금껏 카운터스트라이크를 즐겨온 게이머들에겐 거추장스러운 변화로 느낄 수도 있겠지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원문을 최대한 유지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진 한글화는 꽤 구미를 당기는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 적의 숫자나 아군의 숫자, 폭탄소지 유무 등을 알려주는 정보창이 한글로 계속 나타나는 것은 게임의 전세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초보자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멀티플레이를 위한 교향곡
싱글플레이를
위해 컨디션제로를 구입하는 것은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말릴 일이다. 냉정하게
판단해보자면 컨디션제로는 카스에 처음 입문하는 게이머나 기존의 카스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재미를 안겨다 주기 위한 잘 만들어진 서비스팩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추가된 튜어 오브 듀티와 싱글플레이는 분명 매력적인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단지 이를 위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낼만한 동기는 부여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새롭게 추가된 맵과 무기 그리고 그래픽의 비약적인 향상은 기존의 카스유저를 현혹시킬만한 매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당연할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를 위해 밸브소프트는 컨디션제로의 유저는 기존의 카스플레이어와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하되, 카스만을 즐기던 유저가 컨디션제로에 업그레이드되거나 추가된 맵을 즐기는 것을 막는 방법으로 컨디션제로로의 유입을 유도할 방침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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