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림자의 왕 바스티안 - 1장 앨먼딘(Almondine)
익셀이 키루를 지상에 내려앉게 한 것은 신전에서 한시간 가량 북서쪽으로 도망쳐 갔을 때의 일이었다. 새끼일 때부터 키워왔기 때문에 길이 잘 들은 익셀의 다이너스는 거부하는 기미도 없이 천천히 상회하며 지시대로 지면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신전에서 얼마 떨어진 것도 아니었는데 주변의 풍경은 많이 변해 있었다. 분지는 숲으로 바뀌어 있었고, 아에데스와는 다른 습한 공기가 느껴졌다. 키루가 내려 앉은 것은 숲의 공터. 매우 오래된 숲 특유의 푸근한 향이 코를 찔렀다. 여기저기 나무뿌리가 얽어져 바닥은 울퉁불퉁했지만 잔뜩 지면에 내리 깔린 부엽토가 내딛는 발을 포근히 감싸안았다.
“왜 여기서 내리는 거야? 아직 멀리 도망쳐 온 것도 아닌데….”
익셀은 샤레티가 내려올 수 있도록 손을 붙잡아 주었을 뿐,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대답정도는 해줘도 괜찮잖니?”
하늘엔 벌써 노을이 져 있었다. 나뭇가지들 틈으로 보이는 공간은 붉은 색을 띄었고, 곧 밤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익셀은 허리까지 자라있는 덤불과 풀숲을 헤치고 공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혼자만 무뚝뚝하게 걷는 것처럼 보였지만 샤레티는 곧 익셀에 그녀가 걷기 편하도록 일부러 길을 터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끔 그의 손은 빠르게 움직이곤 했다. 풀숲이나 어린 나무의 잎에서 무언가 빠르게 낚아채는 것이 작은 곤충을 잡는 것 같았다.
“뭘 잡은 거야?”
이번에도 익셀은 대답하지 않았다. 샤레티는 치마를 걷어올리고 걸었고, 그 뒤를 익셀의 다이너스 키루가 성큼성큼 따라왔다. 공터는 하나의 큰 요람 같았다. 나뭇가지들이 자연의 천장을 만들고 있었고, 잔디와 낙엽의 융단이 곱게 깔려 있었다. 간간이 지면에 반쯤 파묻힌 바위들이 눈에 띄었는데 그것은 자연과 동화되어 있었지만 자연의 것은 아니었다.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고, 읽지 못할 언어가 가득 박혀 있는 그것들은 대륙 어디에나 산재해 있는 오래된 고대의 유적들 가운데 하나였다.
“작은 홀(Hall) 같아.”
샤레티는 이곳이 마음에 들은 듯, 기둥과 기둥사이를 다니며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 동안 익셀은 두 개의 기둥이 서로 맞물려 지붕처럼 되어 있는 곳 아래에 자리를 잡고 불을 피울 준비를 했다. 쫓기는 와중에 불을 피우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지만 이곳이라면 안심할 수 있었다. 지형 상 위쪽으로 뻗어있는 구릉을 넘지 않는 한 아무 것도 발견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돌기둥 아래엔 예전에도 불을 지폈던 흔적이 있었다. 그것은 예전에 익셀이 다른 사냥감을 쫓을 때 이곳에 묵었다는 표식이었다. 둥글게 풀을 뽑고 주변을 돌로 감싼 자리에 잘 탈만한 잔가지들과 나뭇잎을 모아 놓고 부싯돌을 쳐서 불을 일으켰다. 그리고 방금 잡은 것을 꼬챙이에 꿰어 불 위에 올려놓았다.
“익셀, 이건 여기가 신전의 영내라는 표식 아니니? 추적자가 곧 따라 붙을 텐데 이런 데에 멈춰도 괜찮은 거야?”
샤레티가 가리킨 것은 신전의 문양이 새겨져있는 큰 기둥이었다. 많이 낡아있었지만 신전의 문양만은 선명해서 기둥의 나이보다 최근에 새겨진 것이 틀림없었다.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장소가 가장 안전한 장소”
익셀은 아랑곳없이 불길을 바로잡으며 대답했다.
“…라고 린다 누님이 가르쳐줬지. 아직 우리가 영내에 남아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거야. 어느 걸로 먹을래?”
그렇게 말하며 익셀이 가리킨 것을 보았던 샤레티는 기겁했다. 익셀이 굽고 있던 것은 개구리였다. 나무 꼬챙이에 꿰어져 비틀리고 있는 그것을 보자 샤레티는 금새 메스꺼운 표정을 지었다.
“윽, 됐어. 난 안 먹을 거야.”
“입에 안 맞아?”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야?’
라는 시선으로 샤레티가 바라보자 익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신관은 먹는 것도 다른 것일까? 그러고 보니 신관들이 개구리를 식사로 먹는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없었다. 역시 다른 거겠지?
“그럼 리플열매라도 먹어둬. 그건 먹을 수 있지? 껍질을 깎아줄게.”
익셀은 키루의 등에 얹어져있는 가방을 뒤적거렸다.
“추적자들의 허를 찌를 줄도 알다니 의외로 도망치는 데에 일가견이 있나보네. 린다 누님은 누구니?”
“키워준 어머니 같은 사람이야. 여러 가지 기술을 가르쳐 줬지. 전직이 도둑이었으니까 도망치는 데엔 선수였을 거야. 아, 제길.”
과일을 꺼내들고 껍질을 까기 위해 허리춤을 더듬거리던 익셀은 인상을 찌푸렸다.
“단검을 신전에 떨어뜨렸나 봐. 누님이 준 거였는데.”
마우로를 향해 들이대었을 때엔 분명히 단검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가지고 나온 기억은 없었다. 어디다 떨어뜨린 걸까? 아끼던 물건이었기 때문에 익셀은 굉장히 안타까웠다.
‘되찾는 것은 무리겠지?’
익셀은 포기하고 다른 여분의 칼을 찾기 시작했다. 분명 가방의 깊은 곳에 천으로 감싸둔 단검이 하나 챙겨져 있을 것이다.
‘여기쯤 있을 텐데…’
가방을 탈탈 털 듯이 뒤지고 있을 때였다.
“린다 누님처럼 너도 도둑이니?”
샤레티가 무릎을 모으고 불꽃 앞에 앉아서 물었다.
“아니. 도둑기술을 배우긴 했지만 도둑은 아니야. 내가 자란 마을은 레인저 촌이거든. 나도 레인저로 자랐어. 이래봬도 실력을 인정받은 레인저인걸? 지금은 현상금사냥꾼을 하고 있지만.”
“현상금사냥꾼?”
“현상금이 걸린 몬스터나 범죄자를 잡아서 돈을 받는 거야.”
“기껏해야 내 또래밖에 안된 것 같은데 그런 일을 하는 거야?”
“열 일곱이면 어리지 않아. 세크는 나보다 어린 데도 이미 훌륭한 레인저니까.”
그 말을 듣고 샤레티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어려. 나보다 두 살이나 늦게 태어났잖아.”
“사는 세계가 다르니까.”
스스로 대답하고 어쩐지 슬픈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그랬다. 샤레티의 볕이라고는 쬐어 본 일이 없는 것 같은 투명한 피부는 린다의 건강한 갈색 피부와는 전혀 달랐다. 긴 속눈썹과 석탄처럼 까만 머리카락은 항상 소중하게 손질되어 온 것. 익셀은 마을 최고의 미인이라고 불렸던 린다의 미모가 샤레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누님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당연하잖아. 저 애랑 우리는 전혀 다른 걸.’
험한 일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겠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거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 할 거야. 함께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 익셀은 찾아낸 칼로 열매 껍질을 벗기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서 나무 껍질을 그릇 삼아 샤레티에게 건네주었다. 그녀가 받아서 입으로 가져가는 것을 보고 자신도 불에 굽고 있던 꼬챙이 하나를 집어 입에 물었다.
“날이 밝으면 넌 신전으로 돌아가.”
“싫어. 돌아가지 않을 거야.”
샤레티의 대답은 익셀이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신전에서 샤레티를 데리고 나온 것은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일단 신전에서 빠져 나온 지금 위험을 무릎 쓰며 그녀를 데려가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신전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옳았다.
“어째서 신전에서 나오려고 하는 거야? 신전에서도 꽤 높은 직위였던 것 같던데. 그 사람들 모두 널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잖아.”
그 말에 갑자기 샤레티는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 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샤레티 파리사가 아니야. 신의 조각인 앨먼딘으로서의 샤레티 파리사지. 나라와 인류를 구할 구원자로서만 나를 보고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신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아예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앨먼딘이라고만 부르는 거 아니겠어? 돌아가면 난 나라를 위해서 원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약혼해야해. 너 같으면 그런 게 좋겠니?”
샤레티의 말은 전혀 다른 대답을 가져왔다.
“신의 조각… 앨먼딘?”
익셀의 손에서 나무 꼬챙이가 툭 떨어졌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앨먼딘, 앨먼딘이라니!
앨먼딘이라는 이름이 머릿속을 때리는 것 같았다. 맙소사! 아무리 무지한 자라도 그 이름만은 알고 있었다. 대지에 잠든 여신의 다섯 조각가운데 하나인 앨먼딘!
익셀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땅에 닿도록 머리를 깊이 숙였다.
“요, 용서를!”
“응?”
“난 네가…아니, 당신이 앨먼딘님인줄 모르고… 무례를 부디 용서해 줘! 아니, 주세요!”
목소리가 떨려서 도저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써본 적도 없는 존대어를 쓰려니 혀가 꼬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빌고 있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소녀가 앨먼딘이라고?’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지금쯤 신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어째서 아에데스의 사람들이 모두 그녀의 안위를 걱정했던 것인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신을 유괴한 거란 말이야?’
엄연히 말하면 유괴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것은 신성모독보다도, 살인보다도 더 무거운 죄였다.
“제발…!”
익셀은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기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샤레티가 다음 순간 짓궂은 미소를 짓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그건 좀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 걸? 넌 신전을 더럽힌 살인자이기도 하잖아.”
반쯤 놀리는 투로 한 말이었지만 충격으로 정신이 없는 익셀에게는 그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고 외쳤다.
“그건 내가 한 게 아닙니다. 사람을 찾으려 갔던 거였는데 그 사람이 이미 죽어있었고, 주변엔 아무도 없었던 것뿐이라고! 그걸 신관병사들에게 들켜서… 아, 대체 마우로는 왜 그렇게 사원 깊은 곳까지 들어가서 죽어있었던 거야?”
빛깔 좋은 금발머리를 쥐어뜯던 익셀은 그렇게 횡설수설하다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마우로가 왜 그런 곳에서 죽어있었지?’
그곳은 일반인이 출입하기 힘든 깊은 기도실이었다. 범죄자가 일반 신도로 가장하여 신전의 영내에 숨어드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아에데스 신전 본관, 그 중에서도 그렇게 깊은 예배실까지 그가 들어갈 이유가 있었을까? 그리고 그 의문스러운 죽음. 공포에 질린 표정과 내부에서 폭발한 듯한 혈흔들.
“맞아.”
신관병사들에게 쫓길 때엔 너무나 급했기 때문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익셀에게 그것은 아주 낯선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인간이 그런 식으로 죽은 것을 처음 보았을 뿐이었다. 내부에서 폭발하듯이 죽은 동물을 익셀은 이전에 본 일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현상금 사냥꾼을 하면서 어떤 특별한 것을 사냥할 때에 마주친 죽음의 양상이었다.
“난…죽이지 않았어.”
실타에서 가축을 죽이는 몬스터를 잡으러 갔을 때, 몬스터가 죽인 짐승들은 모두 마우로와 같았다. 남쪽의 아룬 지방에서 짐승을 물어 죽이던 몬스터도 있었다. 그때도 같은 양상으로 가축들이 죽어있었다. 이 사건들은 모두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스트….”
익셀은 그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은 익셀 만이 아니었다. 이 엘마이어, 아니 알리어스 대륙 전체를 걸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그 이름에 숨겨진 두려움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과 가축을 습격하여 죽이고, 살아남은 이들을 자신과 같은 괴물로 변화시키는 끔찍한 괴물. 익셀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돌아가야 해. 누명을 벗을 수 있어. 내가 한 일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으니까.”
마우로를 죽인 것은 미스트이다. 인간인 익셀에게 그런 식으로의 살인은 불가능했다. 익셀은 살인자도 아니었고, 성전을 더럽히지도 않았다. 마우로가 미스트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은 이미 신전의 사람들도 알고 있을 터. 익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잠깐….”
신이 난 듯, 도로 가방을 챙기던 익셀은 아직 한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샤레티가 어두운 얼굴로 그렇게 말을 꺼냈을 때에야 익셀은 ‘아!’하며 그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 내었다.
신성모독죄와 살인죄가 해결이 된다고 해도 샤레티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허사였다. 앨먼딘의 유괴라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죄였으므로. 하지만 익셀은 샤레티를 유괴하려는 마음은 추호에도 없었고, 샤레티를 잘 설득하여 데려간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가볍게 단정짓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역시 이런 것은 안 좋다고 생각해…요. 밖의 세상은 신전과는 너무 다르고, 그러니까…”
어색한 존대어를 섞은 말에 샤레티가 실망한 듯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마음 한구석이 찔려왔다. 하지만 익셀은 ‘앨먼딘은 신전에 있어야 한다’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샤레티의 어깨에 지워져 있는 짐이 어떠한지 알 수 없었기에 오히려 더더욱 그 사실을 굳게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신전까지 데려다줄게요.”
기가 살은 익셀과는 달리 샤레티는 맥이 풀린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팔목에 걸린 팔찌를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한 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그렇다면 잠깐 이것 좀 봐줄래?”
샤레티는 가볍게 손을 내밀었고, 익셀이 의아해하며 그녀에게 다가섰을 때였다.
철컥!
“어?”
익셀이 피할 틈도 없이 금속 팔찌위로 가느다란 고리 하나가 갑자기 채워졌다. 그리고 샤레티는 조용한 목소리로 재빠르게 알 수 없는 말을 외웠다.
-피르마 인페르마 정해진 규율에 따라
에사
라이마 그 힘을 개방하라. 계약의 고리여.
고리는 한번 반짝 빛을 발하고는 마치 맞춘 것처럼 익셀의 손목에 들러붙어 버렸다. 고리를 채우는 이음새는 사라지고 없었고, 고리는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 진 듯, 매끈한 선을 자랑하고 있었다.
“뭐, 뭐야?”
“우리 집안의 가보야. 여신의 이뎀(Idem)이자 대마법사였던 아마타가 만든 것이라고 하지. 이뎀들의 유산은 아무나 쓸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것은 다행히도 일반 마법사들도 쓸 수 있는 종류거든. 내가 신전으로 떠날 때, 오라버니께서 내게 주셨어.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상위의 고리, 그쪽이 하위의 고리.”
“그런 것을 왜 나에게?”
어쩐지 불안한 느낌에 익셀은 자신도 모르게 고리를 벗기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샤레티가 말했다.
“나를 북쪽의 벨룸 요새(Fort Bellum)까지 데려다 줘.”
“그건 무리야. 그렇게 부탁해도 난 누명을 벗어야…!”
그 때였다.
“부탁이 아니야. 명령이지.”
샤레티의 말이 차갑게 떨어졌고, 그와 동시에 익셀의 손목에 화끈한 고통이 훑고 지나갔다.
“으윽!”
타오르는 듯한 괴로움은 샤레티가 채운 고리를 시작으로 삽시간에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머리가 어찔하고 현기증이 났다. 숨을 막힐 것 같이 괴로운 감각! 익셀은 바닥을 뒹굴며 자신의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내려고 미친 듯이 팔을 긁어내렸다. 하지만 불에 달군 듯이 붉은 빛을 내며 고리는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내릴 뿐이었다.
“참고로 말해두자면 그건 내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절대로 안 벗겨져.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넌 신전으로 돌아가려고 할 테니까.”
‘이 계집애가 정말로 앨먼딘님인 거야?’
익셀은 믿을 수가 없었다. 여신의 조각이 정말로 이런 일을 해도 되는 것인가? 그러나 샤레티는 안됐다는 듯한 눈초리로 익셀을 내려다볼 뿐.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고통에 미쳐버릴지도 몰라.”
그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파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익셀은 정말로 자신이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알았어. 약속할게… 그러니까 이건 풀어…줘.”
그러나 이 약속은 고리를 풀어줄 때까지만이다. 이따위 약속, 절대 안 지켜! 그는 속으로 이를 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맹세해. 내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겠다고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않으면 풀어 줄 수 없어.”
주도면밀한 샤레티의 말에 익셀의 입에서 욕지기가 새어 나왔다.
“제길…!”
알리어스의 사람이며 여신의 백성이라면 누구라도 함부로 맹세해서는 안되었다. 그것은 그 자신의 명예를 넘어서서 생명과도 관계되는 것이었다. 특히 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는 맹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었다.
성직(聖職)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한다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그런데 신관을 상대로 한다면야 더 말할 것 없었다.
“약속은 해도 맹세는 할 수 없는 거니?”
익셀은 이를 악물었다. 이미 눈앞이 노랗다 못해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맹세할게. 신의 이름을 걸고 네 말에 따르겠어!”
눈을 꼭 감고 그렇게 외친 순간이었다. 거짓말처럼 온 몸을 괴롭히던 고통이 사라졌고, 고리도 본래의 구릿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익셀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하지만 샤레티에게 덤벼들 자신은 없었다. 손목에 채워진 고리의 맛은 이미 톡톡히 본 셈이었으므로.
‘역시 누님 말대로 여자들은 여러 가지 의미로 강해.’
익셀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 그럼 정확하게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려줄게.”
샤레티가 자신의 치맛단을 정리하며 다시 자리에 앉자 익셀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샤레티를 바라보았다.
“이것부터 풀어주는 것 아니었어?”
분명히 약속하면 풀어준다고 했었지 않았던가?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어두웠다.
“당분간 그대로 둘 거야. 아직은 믿을 수 없으니까.”
‘믿을 수 없다고? 맹세까지 시켜놨으면서!’
익셀은 속으로 경악하며 외치곤 기운이 빠져서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말해야 저 소녀의 기를 꺾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해 머리를 쥐어짠 말.
“쳇, 앨먼딘이 약혼하기 싫어서 도망치는 이런 계집애인줄은 몰랐어.”
그나마도 진심으로 상대를 마음 아프게 할 의도는 담아있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막강한 누님의 슬하에서 자라는 동안 뼛속까지 여자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그런 건 아냐. 앨먼딘의 의무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그렇지만….”
“또 무슨 문제라도?”
샤레티는 시선을 돌렸다.
“그런 건 네가 알 필요 없어. 어쨌건 추적자를 따돌리는 것은 네게 맡길게. 명심해둬, 추적자들에게 잡히면 네가 가장 좋지 않은 꼴을 당하게 된다는 것.”
여부가 있겠는가? 익셀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가 너무나 울적해하자 샤레티가 그의 등을 다독였다.
“너무 상심하지는 마. 용무가 끝나면 내가 신전 측에 너의 무고함을 증언해줄 테니까.”
그러나 그것은 익셀에게 있어서 언제가 될 지 아직은 기약할 수 없는 훗날의 일이었다.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