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하는 누구나 깊은 심해와 같은 십이지장 한구석엔 나름의 로망이 있다. 어떤 이는 서버 내의 시세를 좌지우지하는 거상의 모습, 누군가는 기득권에 맞서 정의를 불 싸지르는 진검 기사의 모습 또는 게임 내에서 커플이 되어 함께 사냥하며 다굴도 당하고 그러다 누울 때도 손 꼬옥 잡고 함께 눕는 꼬소한 모습... (후후-) 이렇듯 누구나 하나 정도 가슴에 품은 캐릭터에 대한 폭풍 같은 로망!
나도 나름 게임인생 10년차 올드 유저, 누군가는 그럴 것이다. 게임 그만큼 했으면 할 건 다 해봤을 텐데 무얼 또 바라느냐고. 그렇다. 할만한 건 다 해봤다. PK가 유행일 땐 하루에 10번 이상 누워드렸고 모든 게임이 사기로 몸살을 앓을 땐 꼬박꼬박 알뜰살뜰 꾼님들 주머니에 골고루 상납도 해드렸다. 그뿐이랴, 피 터지는 문파 간의 전투 때는 이 목숨 버리는 셈치고 쎄가 빠지게 물약 배달도 했더랬다. 가끔 괜히 기웃거리다 상대 문파 지존 기사님께 누워서 무기도 떨궈 보고... 이 뭐 병... -_-
▲ 이러니 원...
그렇게 10년 세월을 보내고 남들은 묵혀둔 계정 안에 지존 캐릭터 하나쯤은 있다던데 난 어째 게임 하나하나 이리도 상콤하게 개털인지. 그러다 보니 나의 75A 아담한 슴가속에는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한 목마름 같은 것이 서서히 커 나가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폭.풍.간.지!
그렇다. 내가 바란 건 큰 게 아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야, 그런데 왠지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우수가 느껴져. 그리고 남들과 똑같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해도 그 '안녕하세요.' 속에 뭔가 깊은 뜻이 담긴 듯 보여. 똑같이 물약 마시며 칼질을 해도 검기가 좔좔 흐르고 더 명예로워 보이는....그!!! 그 폭풍 간지!! 정말 소박한 소망 아니냐 이 말이지, 내 말은.
십이지천2의 폭풍 간지를 위하여!
우연히 ‘십이지천1’ 홈페이지에 들렀다가 ‘십이지천2’가 오픈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간 잊고 지냈던 십이지천에 대한 애정이 물컹 샘솟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는 구라고.
사실 십이지천1에서 108성까지 찍고 나니 손가락이 웬수라고 이미 내 캐릭터는 웃찾사 '귀여워'의 진상 언니가 되어버려 이미지 수습이 불가능한 상태. 세력 창으로 인사하면 웃겨보라고 하질 않나, 좀 진지하게 검기 날리며 사냥이라도 할라치면 지나가다 이유 없이 '풉!'하고 지나가는 분들까지 있으니 이거야 원 나의 간지는 이미 텔레토비 언덕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 결국, 쥐도 새도 모르게 과거의 진상 언니 이미지를 벗어보려‘십이지천2’에 발을 내밀어 본 것이다.
▲ 저 노파가 여자라는 사실을 홈페이지 보고서야 알았다. 아니 대체 어딜 봐서????
!!! 황야의 노숙자 !!!
원래 '님 좀 짱인듯' 소리 듣는 사람들은 겉으론 평범한 척 뭇 사람들이 편히 대할 수 있는 소시민적인 매력이 있지 않은가. 나 또한 훗날 나를 존경할 어린 새싹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다가와 동경의 표현을 할 수 있도록 소박하지만 '쫌 짱인' 아이디를 만들었다. 캬~ 황야의 노숙자. 거친 모래바람 일렁이는 황야에서 집도 절도 없이 떠돌며 정의를 위해 온몸 불 싸지를 것 같은 포스가 느껴지지 않는가. 후후.
▲ 넌 대체 뭐하는 짐승이냐, 쥐스럽게 생긴 녀석!
그리고 더 이상 주책 맞은 손가락의 배신으로 인한 개그 캐릭화를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카리스마 작렬, 사파에 몸담기로 했다. 십이지천1 정파에서 강호의 정의를 위해 앞장...은 아니고 그냥 끄트머리에 몸만 담았던 의리 따윈 이미 아웃 오브 안중, 시꺼먼 포스 담뿍 풍기는 사파의 노숙자가 되려고 마음을 굳혔다고나 할까. 의리고 뭐고 일단 잃어버린 내 간지 좀 찾고 쫌!
↓ 페이지 이동은 이쪽입니다 ↓
황야의 노숙자, 동행을 만나다.
패왕파천련의 본거지 패도성에 들어서니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깃발 달고 장사하는 우리 사파 형제들. 먹고살아 보겠다고 바글바글 장사하는 건 사파나 정파나 다를 바가 없네, 그려. 오픈베타 시작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만년이가 올라오질 않나, 105성 아이템을 구하질 않나. 이 사람들 독하네, 독해.
뭐 순간 이미 지존 간지 대열에 끼긴 늦은 게 아닐까 라는 불안함이 엄습하기도 했지만 원래 히어로는 막판에 짜잔~ 등장해야 제 맛이지. 그날을 위해 태도 황야의 노숙자, 긴 칼 등짝에 올려붙이고 미련 없이 마을을 떠나 본격적인 사냥에 돌입하기로 했다.
▲ 이 유행지난 혹성 원숭이 같으니라고!
뭐 마을도 둘러보고 NPC 위치 확인도 하고 그러지 않느냐고? 후후- 머째이들에게 그런 사소한 위치 확인 따윈 피하고 싶은 번거로움이지. 주인공이 길 묻는 거 봤나? 일단 손에 칼이 쥐어진 이상, 중요한 건 괴수를 섬멸하는 고난의 행군일 뿐! 상점 따윈 어디에 있어도 상관없단 말이지.
주절대며 마을 입구로 나가 구부정한 독문무사를 족치고 있으려니 칼질이 어찌나 호쾌한지 금방 11성에 도달했다. 102성만 더 올리면 1갑! 지존 반열에 성큼 다가섰다는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흥얼흥얼~
"노숙자님, 동행하실래요?"
음? 나보단 좀 덜하지만 나름 총기 어린 눈동자를 반짝이는 비파소녀가 다가와 동행을 제의했다. 역시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나의 매력에 길 가던 소녀들까지 급반응 하는구나.
"후후, 그러도록 하지요."
동행을 수락하자 발그레 얼굴을 붉히며 나를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는 10성 비파소녀.
"아, 이.. 이러시면.. 어디로 가시는지.. 단둘이 어딜.. *-_-*"
"따라오세요~ 우리 강한 몬스터 잡으러 가요."
아~ 비파소녀는 자신보다 강한 나와 함께 좀 더 무서운 괴수와 싸워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바람직한 도전정신인가. 후후.. 그래, 소녀. 소녀의 뒤에는 내가 지키고 있으니 걱정 말고 비파를 튕기렴. 비파 소녀의 서툰 튕김질을 보며 내 가슴엔 마치 제자라도 얻은 듯 뿌듯함이 샘솟아 흘렀다.
물론 -_-... 다음에 벌어질 참혹한 사건을 그땐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생선에게 패하다.
"저거에요! 금골어!"
비파소녀는 흥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오호, 비파소녀가 간절히 원하던 '강한 몬스터'라는 것은 바로 생선! 십이지천1에서는 보지 못했던 해괴한 몰골의 넘실대는 생선이었다.
"소녀, 소녀가 그토록 처치하고자 했던 녀석이 이 생선들이요?"
"예! 저 생선의 살을 발라 주세요!"
훗, 역시 소녀는 소녀. 겨우 밥상에도 오르지 못할 뼈만 남은 생선 따위에게 두려움을 느끼다니. 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생선들에게 분노의 칼질을 가하기 시작했다. 십이지천의 묘미는 무엇인가, 바로 몰이사냥! 바글대는 금골어를 몰아 소녀 앞으로 달려갔다.
"우와! 노숙자님, 멋져요!"
"잘 보세요, 제가..."
보란듯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영역 무공이 지정된 F6을 눌러댔다. 다 죽여버릴 테다!
▲ 그 시작은 미비하였으나...
......음? ...헉!
나의 단축키 창 어디에도 영역 무공 따윈 없었다. 당연하지! 무공 따윈 배우지도 않았잖아! 십이지천1에서의 단축키 창이 손에 익었던 탓에 당연히 누르면 시전 될 걸로 생각했던 것. 쭉쭉 빠지는 피, 이 놈의 생선들은 여린 노숙자의 몸을 콕콕 찔러댔다.
"헉, 노숙자님! 영역! 영역!"
"도오ㅓ주세료"
"예?"
"ㅊㅊㅊㅊㅊㅊㅊ"
정말 마지막까지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으나 산목숨 죽일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헬프를 요청했다. 그러나 야들야들한 레벨 10 노숙자의 몸은 이미 생선에게 발려져 너덜너덜, 결국, 차디찬 바닥에 자빠져버린다.
▲ 그 끝도 굴욕이리라.
"믿으라면서요.. -_-.."
"아니 그게..."
- 3초 후에 부활합니다.
- 2초 후에 부활합니다.
"제가 영역을 치려고 했는데요."
"-_- 리스."
얄짤없이 마을에 떨궈진 노숙자. 하아... 어쩔거야, 나의 간지, 나의 포스!
(귓말) 노숙자님, 아직 금골어는 무리이신 것 같네요. 전 다른 분과 동행할 테니 어서 레벨업 하세요. 수고.
... 잔인한 소녀, 냉정한 소녀. 내 그래도 없는 실력에 너를 위해 이 한 몸 바쳤거늘, 네가 나를 이렇게 내동댕이치는구나.
(귓말) 노숙자님.
왜! 또 뭐!
(귓말) 그리고 어서 무공이나 배우세요. 임무도 꼭 하시고요. 차근차근하세요. 아셨죠?
황야의 노숙자의 십이지천2 첫날, 내 비록 굴욕을 겪었으나 노장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 (누가 노장이라는 거냐.. -_-) 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일 뿐! (거창하게 끼워 맞추지 마라.. -_-)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