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라 크로프트’의 어둠과 야만성을 다룬 ‘섀도우 오브 더 툼 레이더’ (사진출처: 스팀)
오는 15일 발매될 ‘섀도우 오브 더 툼 레이더’는 유독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유는 개선된 그래픽, 강화된 퍼즐 요소, 암살과 플랫 포밍 시스템 추가 등 여러 가지가 있겠다. 하지만 그 중에 딱 한 가지만 꼽으라면 단연 주인공 ‘라라 크로프트’를 택하겠다는 사람이 비단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툼 레이더’는 곧‘라라 크로프트’에 대한 이야기이고, 특히나 이번 작품은 ‘라라 크로프트’의 ‘어둠’에 대해 다룬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게임 내적으로 ‘라라 크로프트’의 ‘어둠’은 그 자신의 야만성이겠지만, 게임 외적으로 볼 때 진정한 ‘어둠’은 따로 있다. 바로 성상품화다. 디자이너가 성적 대상에서 벗어난 캐릭터로 만들기 위해서 애썼음에도, ‘라라 크로프트’는 오랜 세월 성상품화 논란에 휩싸여왔다. 결국엔 이로 인해 프랜차이즈 자체가 흔들릴 뻔한 적도 있었다. 오죽하면 유통사에서 성인잡지 플레이보이를 상대로 ‘라라 크로프트를 사용하지 말라’는 법정 분쟁을 벌였을 정도다.
그렇다면 ‘툼 레이더’와 ‘라라 크로프트’는 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성상품화 늪에 빠진 걸까? 그리고 어떻게 그 늪에서 나와 새로운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을까? 이번 주에는 ‘툼 레이더’ 주인공 ‘라라 크로프트’ 탄생과 변천에 대해 알아본다.
독립적 여성 그리려 했던, 초창기 ‘라라 크로프트’
▲ 초안만 해도 성상품화와는 거리가 있던 ‘라라 크로프트’ (사진출처: First Versions)
‘툼 레이더’ 인기는 게임 자체의 재미 외에도 시리즈 주인공 ‘라라 크로프트’라는 캐릭터에 힘입은 면이 크다. 하지만 ‘라라 크로프트’ 탄생과 발전이 처음부터 수월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캐릭터는 성상품화 논란으로 인한 디자이너 퇴사, 성인물로의 악용, 프랜차이즈 몰락 등 다사다난한 사건으로 얼룩진 20년을 보낸 끝에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
‘라라 크로프트’는 1996년, 영국의 작은 게임 개발업체 코어 디자인에 의해 탄생했다. 코어 디자인은 1988년 창립 이래 ‘몬티 파이톤의 비행 서커스’, ‘아스테릭스와 신들의 힘’ 등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게임들을 제작해온 소규모 회사였다. ‘툼 레이더’ 이전에는 썩 인지도 있던 개발사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 회사가 1993년 게임업계를 강타한 대작으로 인해 운명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1993년 발매된 문제의 작품은 이드 소프트웨어의 ‘둠’이었다. ‘둠’은 당시 기준 첨단 3D 그래픽을 바탕으로 뛰어난 공간감과 박진감 넘치는 전투를 선보였다. ‘둠’에 이어 1994년 발매된 ‘둠 2’도 상업적 성공을 거두자 그 뒤를 이어 수많은 개발업체가 앞다투어 3D 게임 개발에 뛰어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코어 디자인도 이처럼 이드 소프트웨어를 따라 3D 게임 개발을 시작한 회사 중 하나였는데, 당시 이들이 준비한 작품이 바로 ‘툼 레이더’였다.
▲ ‘라라 크로프트’의 전신 ‘라라 크루즈’ (사진출처: 더 파이널 아워즈 오브 툼 레이더)
1996년 발매된 ‘툼 레이더’는 기본적으로 ‘둠 2’와 ‘퀘이크’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품이었다. 3D 공간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미궁을 탐험하고 적과 싸우는 것이 메인 콘텐츠였던 것이다. 다만 이 작품에는 이드 소프트웨어 게임과 차별화되는 요소가 한 가지 있었으니, 바로 어드벤처였다. 기존에 2D 어드벤처 게임을 많이 만들어본 가락을 바탕으로, 탐험과 퍼즐 요소를 추가해 전설 속 유적을 탐험하고 수호자들과 싸우는 ‘인디아나 존스’ 같은 게임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주인공이었다. ‘툼 레이더’ 디자이너 토비 가드는 초기에 ‘인디아나 존스’를 닮은 남자 주인공을 구상했다. 하지만 코어 디자인 사장인 애이드리언 스미스는 자사 캐릭터가 유명 영화의 주인공과 너무 비슷하다며 보다 고유한 개성을 요구했다. 몇 번 퇴짜 후, 가드는 아예 주인공 성별을 바꾸기로 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라라 크로프트’ 전신인 라틴계 도굴꾼 ‘라라 크루즈’였다.
주목할 점은 ‘라라 크루즈’가 세간의 오해와 달리 성상품화를 노린 캐릭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2007년, 게임전문매체 게임 데일리 인터뷰에서 가드는 당시를 회상하며 ‘당시 게임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는 머리가 빈 섹시한 여자(bimbos)와 강압적으로 성행위를 주도하는 여주인(dominatrix)이 대부분이었다’며 ‘이처럼 진부한 부류에 속하지 않는 주도적인 여성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즉, 성상품화에 반기를 드는 캐릭터로 구상됐던 셈이다.
▲ ‘라라 크로프트’를 디자인한 토비 가드 (사진출처: 크리티컬 패스 공식 홈페이지)
본래 가드가 기획한 캐릭터는 ‘섹시하면서도 그게 전부는 아닌’ 인물이었다. 1997년 라이프스타일 잡지 컨데나스트 인터뷰에서 그는 ‘라라 크루즈’가 페미니스트 아이콘도, 섹스 판타지 대상도 아니라고 언급했다. 그가 구상했던 ‘라라 크루즈’는 섹시한 동시에 힘 있고, 주체적이며, 도전적인 인물이었다. 남성 게이머에게 말초적인 성적 자극을 주거나, 반대로 페미니즘 상징으로 내세울 의도로 만든 캐릭터는 아니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가드의 초기 기획이 그대로 통과되지는 않았다. 유통사 에이도스는 영국 게이머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오기 위해 라틴계 성인 ‘크루즈’ 대신 ‘영국적인 성’을 쓸 것을 요구했고, 이에 코어 디자인 측은 캐릭터 성을 ‘크로프트’로 바꾸면서 설정 상당부분을 수정했다. ‘라라 크루즈’는 지적이고 예의 바르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가차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싸이코패스 도굴꾼이었지만, 수정 이후 귀족 출신 고고학자 ‘라라 크로프트’가 된 것이다.
그렇게 1996년 출시된 ‘툼 레이더’는 코어 디자인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게임 자체도 뛰어난 공간감, 자유로운 조작, 긴장감 넘치는 진행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그보다 화제가 된 것은 단연 주인공 ‘라라 크로프트’였다. 3D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섹시한 쌍권총 여전사 이미지는 당시 게이머들에게 한 번도 보지 못 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덕분에 ‘툼 레이더’는 발매 첫 해에만 1,450만 달러(2018년 가치 환산 259억 5,550만 원)라는 어마어마한 수익을 거뒀다.
이러한 ‘툼 레이더’ 성공은 곧 ‘라라 크로프트’라는 캐릭터 인지도 상승과 직결됐다. 그러나 ‘라라 크로프트’가 유명해지면서 회사가 본래 기획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주체적인 여성 탐험가가 아닌, 단순한 성적 판타지의 대상으로 인식된 것이다.
성상품화로 정체된 프랜차이즈, 해결책은 ‘리부트’ 뿐이었다
▲ 기획 의도와 달리 ‘툼 레이더’는 발매 직후부터 성상품화가 시작됐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시리즈 첫 작품 ‘툼 레이더’에 등장한 ‘라라 크로프트’는 오늘날과는 조금 다른 설정의 캐릭터였다. 2018년 현재 ‘라라 크로프트’는 고명한 고고학자인 아버지 뒤를 이어서 탐험가가 됐다는 설정으로, 이는 게임과 영화 양쪽 모두에 적용 중이다. 그러나 첫 작품에서 ‘라라 크로프트’는 귀족 출신임에도 부모님이 정해준 약혼을 거부하고 가문과 연을 끊은 프리랜서 모험가로 등장했다. 자신의 꿈과 야심을 위해 가족마저 등진 독립적인 인물로 묘사됐던 셈이다.
‘툼 레이더’의 개략적인 이야기는 이러하다. 도전적 여류 모험가 ‘라라 크로프트’는 거물 사업가 ‘재클린 나틀라’로부터 전설 속 유물 ‘아틀란티언 사이언’을 찾아달라는 미심쩍은 의뢰를 받는다. 그런데 의뢰에 착수해서 유물 조각을 찾을수록 ‘라라 크로프트’는 점점 기이한 환각을 보게되고, 고용주 ’재클린 나틀라’는 ‘라라 크로프트’를 제거하고 유물을 빼앗기 위해 암살자를 보내기 시작한다. 게임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유물을 모아 ‘나틀라’의 음모를 막는 내용으로 진행됐다.
‘툼 레이더’는 최초의 3D 어드벤처 게임이라는 점에 더해 매혹적인 주인공을 내세워 매우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에 에이도스는 매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새로운 ‘툼 레이더’를 출시할 것을 요구했고, 코어 디자인은 1997년부터 2003년까지 해마다 ‘툼 레이더’를 내놓았다. 하지만 두 번째 작품 이후 ‘툼 레이더’는 금새 밑천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래픽 향상을 제외하면 계속 비슷한 콘텐츠와 스토리의 반복이었고, 팬들은 금새 지루함을 느끼게 됐다.
▲악명 높은 1997년 ‘툼 레이더 2’ TV 광고 (영상출처: 유튜브 채널 RetroCommercial)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남은 건 주인공 ‘라라 크로프트’를 활용한 마케팅 뿐이었다. 다만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들이 내놓은 해답이 성상품화였다는 것이었다. 사실 1996년 첫 작품부터 성상품화 시도가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1997년 두 번째 작품 이후로는 그 행보가 점점 노골적이 되어갔다. 게임업체 측에서 스스로 성상품화에 불을 붙인 것이다.
실제로 1997년 ‘툼 레이더 2’ TV 광고는 기묘한 성상품화로 화제가 됐다.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갔나’라는 제목의 이 광고는 ‘남자가 라라 크로프트를 보러 가서 스트립 클럽에 손님이 없다’는 내용을 담아, 스스로 ‘라라 크로프트’를 성적 상품과 동일시되도록 만들었다. 에이도스는 그러한 의도로 만든 광고가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이 광고는 여성 캐릭터가 남성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소비되도록 유도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오래도록 자주 거론됐다.
그런가 하면 ‘툼 레이더’ 개발에 프로그래머로 참여한 폴 더글라스는 1998년 가마수트라 인터뷰 중 ‘사장이 라라 크로프트를 누드 상태로 만들어주는 치트 코드를 삽입해달라고 요청하길래 거절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는데, 이는 개발업체인 코어 디자인 측에서도 ‘라라 크로프트’ 성상품화를 어느 정도로 노골적으로 추진했는지 보여주는 일화다. 이에 ‘라라 크로프트’를 디자인한 가드는 ‘캐릭터 관리에 내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1997년 코어 디자인에서 퇴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사실 ‘라라 크로프트’가 기본적으로 성적 대상화 당할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가드의 의도가 무엇이었건 간에 대부분의 게이머가 ‘라라 크로프트’를 두고 먼저 반응한 것은 가느다란 허리와 과도하게 풍만한 가슴이었고, 대중은 이 캐릭터를 성적 판타지의 대상으로만 소비했다. 가드는 섹시함을 강하고 자신감 있는 캐릭터를 표현할 수단으로 선택했지만, 정작 소비자들은 디자이너 의도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 논란을 일으킨 ‘라라 크로프트’의 극단적 몸매 (사진출처: 더 파이널 아워즈 오브 툼 레이더)
1997년 이후 ‘라라 크로프트’는 완전히 디지털 섹스 심볼로 자리매김했다. 많은 성인 잡지가 ‘라라 크로프트’ 테마 포르노그래피를 실었고, 이는 곧 더욱 큰 사회적 논란을 불러왔다. 여러 언론이 ‘라라 크로프트’로 인해 ‘사이버베이비(성적 판타지를 디지털 캐릭터에서 찾는 문화)’가 시작됐다며 게임산업을 비난한 것이다. 1999년에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에이도스가 플레이보이와 법정 다툼을 벌이면서 사태가 잠시 진화되는 듯 보이기도 했으나, 2001년 개봉한 게임 원작 영화 ‘툼 레이더’ 마저 성상품화 논란에 휩싸이며 비판은 더욱 세지기만 했다.
문제가 계속되자 ‘라라 크로프트’ 성상품화는 에이도스에도 안 좋은 결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성상품화 논란이 가열될수록 캐릭터 가치가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안 그래도 ‘툼 레이더’라는 게임 자체도 변화 없이 정체된 상태였는데, 마지막 보루인 ‘라라 크로프트’마저 깊이 없는 천박한 캐릭터로 인식되자 프랜차이즈는 빠르게 힘을 잃어갔다. 이로 인해 ‘툼 레이더’ 시리즈는 1998년 ‘툼 레이더 3’부터 쇠퇴하기 시작해, 2004년 ‘툼 레이더 6: 디 앤젤 오브 다크니스’에 이르러서는 대규모 마케팅에도 불구하고 125만 장이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친 판매량을 기록했다. 이는 ‘툼 레이더 2’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적이었다.
‘툼 레이더’라는 프랜차이즈가 재기불능에 빠질까 걱정된 에이도스는 결국 ‘툼 레이더’ 개발을 코어 디자인에서 다른 개발업체 크리스탈 다이나믹스로 이관했다. 이후 2006년부터 2008년까지 크리스탈 다이나믹스는 기존 스토리를 개선하고 캐릭터를 보강한 리메이크 버전 ‘레전드’ 시리즈를 발매하여 프랜차이즈 재기를 꾀했다. 그러나 훗날 크리스탈 다이나믹스가 공개한 바에 따르면, 이 ‘레전드’ 시리즈도 당초 에이도스가 기대한 판매량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
▲ ‘툼 레이더 2’ 이후 판매량이 점점 감소한 ‘툼 레이더’ 시리즈 (사진출처: VGchartz)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결국 에이도스는 마지막 수단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해답은 바로 리부트였다.
‘라라 크로프트’, 리부트로 ‘얼음 여왕’에서 살아있는 캐릭터 되다
‘툼 레이더’ 개발을 맡은 순간부터 크리스탈 다이나믹스는 반드시 이 프랜차이즈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부담을 지고 있었다. 훗날 저널리스트 제프 케일리가 개발진 인터뷰를 통해 쓴 ‘더 파이널 아워즈 오브 툼 레이더’에 따르면, 당시 크리스탈 다이나믹스는 에이도스에게 엄청난 압박을 받고 있었다. 특히 ‘툼 레이더: 언더월드’ 아트 디렉터였던 대럴 갤러거는 사장에게 작품이 메타크리틱 리뷰 80점을 넘기지 못하면 회사를 떠나야 할 거라는 으름장까지 받았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2008년에 발매된 ‘툼 레이더: 언더월드’는 끝내 80점을 넘지 못했다. 그에 따라 크리스탈 다이나믹스에는 대규모 구조조정의 피바람이 불었다. 갤러거를 비롯한 일부 직원들만이 ‘어떻게든 툼 레이더 프랜차이즈를 부활시키겠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그 후 남은 직원들에게는 게임을 리부트 시켜 바닥부터 다시 쌓아 올리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이 들어왔다.
▲ 섹스 어필만 있고 감정이 없어 ‘아이스 퀸’으로 불린 옛 ‘라라 크로프트’ (사진출처: 더 파이널 아워즈 오브 툼 레이더)
하지만 ‘툼 레이더’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이 프랜차이즈가 처한 정확한 상태부터 파악해야 했다. 이를 위해 크리스탈 다이나믹스는 2008년 미국 신시내티에서 포커스 테스트를 진행했는데,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더 이상 ‘툼 레이더’에 만족하는 게이머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게임 시스템이 전반적으로 구식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가장 큰 불만은 ‘라라 크로프트’에 있었다. 흥미는 고사하고 반감만 드는 캐릭터라는 것이었다.
이 포커스 테스트에서 한 참가자는 ‘라라 크로프트’에 대해 ‘썩 흥미롭거나 좋아할 만한 캐릭터가 아니다’라며 ‘몸매 말고는 볼 것도 없는 얼음 여왕 같은 캐릭터’라고도 밝혔다. 예쁘지만 인간적인 감정을 찾아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가 하면 ‘억지로 들이미는 바비 인형 같다’거나, ‘섹스 어필 말고는 캐릭터가 모호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참가자들은 ‘라라 크로프트’에 만족스러운 개성과 드라마가 없다고 느꼈고, 그에 따라 전반적인 만족도는 매우 낮게 나타났다.
이 테스트 결과가 의미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게임 시스템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 ‘라라 크로프트’까지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몇 번의 테스트를 더 거친 후 크리스탈 다이나믹스는 당시 거의 완성 단계까지 개발한 상태였던 ‘툼 레이더: 어센션’ 프로젝트를 완전히 취소했다. 게임 시스템과 캐릭터 양쪽 모두 조금 손대는 정도로는 프랜차이즈를 살릴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대신 개발진은 테스트 결과를 반영해 아예 프랜차이즈를 재설계하기로 했다.
크리스탈 다이나믹스가 리부트에서 초점을 맞춘 부분은 ‘라라 크로프트’라는 캐릭터를 게이머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사실 기존 ‘라라 크로프트’는 쿨하고 섹시하긴 해도 쉽게 공감되는 인물은 아니었다.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데다,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일도 거의 없는 얼음공주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개발진은 게이머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라라 크로프트’의 인간적인 면모와, 성장하는 과정을 직접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 실제 모델을 바탕으로 제작해 사실성을 추구한 새로운 ‘라라 크로프트’ (사진출처: 더 파이널 아워즈 오브 툼 레이더)
그 시작은 우선 ‘사실적인 캐릭터’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초기 ‘라라 크로프트’는 실존할 수 없는 수준의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허리는 개미처럼 잘록하고, 가슴은 허리 두 배에 달할 정도로 비대했다. 이처럼 비현실적인 몸매야 말로 ‘라라 크로프트’를 중심으로 한 성상품화 논란과 야유의 핵심 문제였다. 이에 크리스탈 다이나믹스는 실제 모델을 활용했다. 20대 초반의 모델 두 명을 고용해 각각 ‘라라 크로프트’ 얼굴과 신체를 본 딴 것이다.
두 번째는 캐릭터가 강인한 모습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약하고 겁에 질린 모습부터 천천히 변화해가는 과정을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개발진은 리부트 첫 작품은 ‘생존’에 중점을 두고, 조난 당한 21살 ‘라라 크로프트’가 온갖 공포와 위험 속에 성장해 ‘생존자’에서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기로 했다. 이를 위해 개발진은 게임을 세 파트로 나누고 각 파트에서 일어날 사건을 통해 ‘라라 크로프트’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날 것 그대로 상세히 묘사했다.
이러한 두 가지 변화 속에서 다시 태어난 ‘라라 크로프트’는 전작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전 ‘라라 크로프트’와의 가장 큰 차이는 우선 외모였다. 여전히 예쁘지만, 비현실적인 신체와 과도한 노출은 없었다. 핫 팬츠는 의도적으로 배제됐다. 또한 캐릭터는 전에 비해 유약하고 쉽게 겁 먹거나 분노했지만, 덕분에 캐릭터에 보다 쉽게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변신은 기존 ‘라라 크로프트’의 식상함에 질린 게이머들에게 큰 호감과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 상처 입고 겁먹은 어린 ‘라라 크로프트’를 내세운 리부트 (사진출처: 게임 내 영상 갈무리)
그렇게 2013년 출시된 리부트 ‘툼 레이더(2013)’은 메타크리틱 리뷰 기준 86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그리고 이러한 회생 이면에는 물론 치밀한 고민 끝에 기획된 새로운 ‘라라 크로프트’가 있었다. 수많은 게임전문매체들이 이 게임의 훌륭힌 점으로 ‘라라 크로프트’가 보여주는 다채롭고 사실적인 반응을 꼽았다. 단순히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섹스 심볼보다는, 드라마 속에서 변화하는 깊이 있는 인물이 게이머들을 더욱 강하게 사로잡은 것이다.
새로운 테마는 집요함과 야먄성? 한층 더 어두워지는 ‘라라 크로프트’
▲ 냉혹한 인간 사냥꾼으로 변모한 ‘라라 크로프트’ (영상출처: ‘툼 레이더’ 공식 유튜브 채널)
이렇듯 과거 성상품화로 흥망성쇠를 겪은 ‘툼 레이더’는, 리부트 이후 성적 요소를 배제한 채 ‘라라 크로프트’라는 캐릭터를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리는 시간을 가졌다. ‘툼 레이더(2013)’과 2015년 발매된 그 후속작 ‘라이즈 오브 더 툼 레이더’는 사실상 새로운 ‘라라 크로프트’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오는 9월 15일 발매될 리부트 시리즈 세 번째 작품 ‘섀도우 오브 더 툼 레이더’는 이렇게 완성된 ‘라라 크로프트’의 진면목을 보여줄 작품이다.
특이하게도 ‘섀도우 오브 더 툼 레이더’는 제목처럼 ‘라라 크로프트’의 어두운 면을 보여줄 예정이라고 한다. 전작들이 ‘라라 크로프트’가 어떤 사건들 속에서 감정적인 변화를 겪으며 성장했는지 다뤘다면, 이번에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로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는 죄책감을 맛보고 극도의 분노 속에 타인을 해치는 등, 극한 고난 속에서 차츰 집요하고 어두운 인물이 되어가는 ‘라라 크로프트’의 변화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과연 ‘섀도우 오브 더 툼 레이더’는 ‘라라 크로프트’ 성장 스토리를 넘어 보다 깊이 있는 드라마를 보여줄 수 있을까? 역대 시리즈 중 가장 어둡고 야만적인 ‘라라 크로프트’가 등장한다는 ‘섀도우 오브 더 툼 레이더’가 단순히 잔인한 자극성만 추구했는지, 시리즈를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킬 발판이 되어줄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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