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게임의 성숙기였던 1990년대를 기억하십니까? 잡지에 나온 광고만 봐도 설렜던 그때 그 시절의 추억. '게임챔프'와 'PC챔프', 'PC 파워진', '넷파워' 등으로 여러분과 함께 했던 게임메카가 당시 게임광고를 재조명하는 [90년대 게임광고] 코너를 연재합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90년대 게임 광고의 세계로, 지금 함께 떠나 보시죠
얼마 전 한국기원 주최 145회 입단대회에서 인공지능을 통해 원격 컨닝을 하려던 부정행위자가 적발돼 실격 처리됐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이세돌과 알파고 대결 이후 딥 러닝 기반 바둑 AI가 인간의 실력을 뛰어넘는 것이 확실시되며 벌어진 사건인데요, 바둑에 비해 경우의 수가 적은 체스에서는 이미 80년대부터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 역시 시대의 흐름인 것 같습니다.
사실 20년 전만 해도 바둑 AI가 프로기사를 위협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바둑 인기가 높은 한, 중, 일에서는 컴퓨터 게임이 등장한 직후부터 바둑 AI 개발에 한창이었는데요, 딥 러닝 기술이 적용되기 전 AI는 기껏해야 아마 초보~중수 정도 실력이었습니다. 이유는 체스와는 달리 바둑은 경우의 수가 거의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다양해 당시 컴퓨터에서 계산하기 어려웠기 때문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계산을 통해 바둑 AI를 고도화하고자 하는 시도는 계속됐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년 전, 제우미디어 PC파워진 2000년 1월호에 실린 바둑 AI 프로그램 광고입니다. 이름은 ‘천하수담’으로,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수의 이야기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토속적 이름답게 광고도 정겨운 콘셉트인데요, 전통의복을 입으신 할아버지가 일체헝 PC 앞에 앉아 “허~ 고놈 참 야무지게 두네!”라는 멘트와 함께 천하수담과 대결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컴퓨터가 익숙치 않은 기성세대나 노년층도 빠져들 만큼 잘 만든 바둑 AI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듯 합니다.
광고를 보면 ‘세계 컴퓨터 바둑 대회 출전, 우승 8회, 준우승 2회’라고 쓰여 있습니다. 대회명이 없어서 검색해 보니, 응씨배 세계 컴퓨터 바둑 대회와 FOST배 세계 컴퓨터 바둑 대회 등에서 수 차례 우승했다고 합니다. 응씨배 대회는 중국에서 열리는 세계적 바둑 기전으로 ‘바둑 올림픽’으로도 불리는데, 컴퓨터 바둑 대회도 연 듯 하네요. FOST배 세계 컴퓨터 바둑 대회는 처음 들어보는 대회이긴 한데, 1998년 북한에서 개발한 바둑 프로그램 ‘은별’이 우승을 거뒀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아마도 천하수담이 은별에게 밀려 우승 행진을 멈춘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광고에 나온 버전은 2000인데, 97 버전에 이어 실력을 더욱 향상시켰다고 합니다. 광고 아래쪽에는 지난 3년간 정체된 바둑 소프트웨어의 기력을 2급 이상 올렸다고 명시돼 있는데요, 이후 프리웨어로 출시된 천하수담 2001이 후하게 쳐도 8급 정도의 실력이라는 평가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실력자 이상은 인공지능 프로그램과 대전을 하더라도 딱히 재미를 느끼기가 힘들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이 당시 바둑 프로그램들이 크게 흥행하지 못 한 이유이기도 하죠.
어쨌든 위 광고에 있던 천하수담은 2001년 프리웨어 형태로 제품을 풀어버린 후 후속작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뉴스기사를 보면 개발사인 세주씨엔씨는 바둑 프로그램보다는 인터넷폰 등 통신장비 제조쪽이 주 사업이었던 회사인데, 천하수담 2000 이후 이쪽 분야에서 손을 뗀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래도 인터넷 바둑이 활성화되며 패키지 형태 AI 프로그램의 경쟁력이 하락한 점이 결정타였겠죠. 지금은 고전 바둑 프로그램으로만 이름이 남은 천하수담이지만, 알파고가 등장하기 한참 전부터 바둑 AI의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벼이 다룰 수 없는 이름입니다.
*덤으로 보는 게임 광고
오늘의 덤으로 보는 광고는 롤러코스터 타이쿤 확장팩 및 디자인 경진대회입니다. 국내 유통사인 애니미디어에서 확장팩 발매를 기념해 경진대회를 연 건데요, 당시엔 아마도 정상적이고 재미있는 테마 놀이공원이 출품되고 상을 받는 건전한 행사였을 겁니다.
다만, 2020년 게이머의 눈으로 롤러코스터 타이쿤 경진대회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순간적으로 걱정이 앞섭니다. 지금 롤러코스터 타이쿤은 일명 ‘고인물 게임’으로 불리는데, 이제는 놀이동산 운영이 아니라 손님 괴롭히기에 집중하는 모습으로 변질되어 버렸죠. 탈출하는 데 수백 년이 걸리는 맵을 만들어서 손님 뿐 아니라 직원까지도 사망케 하는 맵, 손님들을 떼죽음 시키는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같은 맵을 보고 있자면, 당시 경진대회는 참 맑고 순수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문득 코끝이 시큰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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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메카 취재팀장을 맡고 있습니다jong31@gamemec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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