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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뜨거] 고기 원산지 표기처럼, 게임 '확률' 공개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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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뜨거]는 지난주 가장 뜨거웠던 게임계 이슈를 누구나 알기 쉽고 자세하게 풀어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국내 게임업계가 확률형 아이템 자율규제에 돌입한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판단해야 할 시기가 됐죠. 지난 25일에는 총 13개 매체 기자들이 모여 확률형 아이템 자율규제에 대해 담론을 나누기도 했어요. 기자들 모두 법의 개입보단 자율규제가 바로 서길 바랐지만, 실상은 유저들의 권리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었습니다.

확률형 아이템 규제를 둘러싼 정부와 업계의 동상이몽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요? 오늘날 국내 모바일, 온라인게임 대부분이 확률형 아이템을 수익모델로 내세우고 있는 만큼 이는 모든 게이머들의 중대사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근원으로 되돌아가 과연 확률형 아이템이 무엇이며 어떠한 규제의 역사를 이어왔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 확률형 아이템 규제를 둘러싼 업계과 정부의 동상이몽

확률형 아이템은 무엇이며, 무엇이 문제인가?

‘확률형 아이템’이라 하면 선뜻 의미가 와 닿질 않죠.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일정 확률로 터지는 폭탄이나 어쩌다 한번씩 날이 빠지는 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무작위로 여러 아이템을 뭉뚱그려 담아 파는 유료 상품이에요. 즉, 내가 원하는 상품 하나와 온갖 쓰레기들이 한 상자에 담겨있는데, 뭐가 나올지는 신만이 아는 겁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국내에선 ‘랜덤박스’라고도 하고, 일본에서는 뽑기 레버 돌리는 소리를 그대로 따 ‘가챠(がちゃ, 철컥)’라 합니다.

원색적으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도박’입니다. 불확실한 결과를 위해 돈을 거는 거죠. 물론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현대사회에서 이런걸 사고 파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순 없지만, 사행성을 조장하는 지경에 이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많은 게임에서 확률형 아이템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밸런스를 뒤틀거나 유저간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하죠. 결과적으로 확률형 아이템은 국내 온라인게임 절대다수의 주요 수입원이 됐습니다만, 규제의 필요성도 끊임없이 역설되어왔습니다.

‘나라면 딸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지닌 부류부터 원하는 아이템을 구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쓰는 유저까지, 확률형 아이템 구매유형은 가지각색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규제의 쟁점도 한둘이 아닌데요. 단순한 결제한도 조정부터 알 권리를 위한 아이템별 뽑기 확률 공개까지 다양한 논의가 있어왔습니다.


▲ 게임업계의 주요 수입원으로 부상한 확률형 아이템, 문제도 만만찮다

확률형 아이템 규제, 정부와 업계 ‘동상이몽’의 역사

근 30년에 가까운 국내 게임계 역사에서 확률형 아이템이 문제시 된 것은 비교적 최근입니다. 2002년에 이미 ‘온라인게임 사업자 자율규제 권고안’이 발의된 바 있지만, 정액제가 대세였던 당시에는 랜덤박스에 대한 조항 자체가 없었죠. 이로부터 6년이 지나서야 확률형 아이템 규제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는데요. 이때까지만 해도 ‘캡슐형 유료 아이템’이라고 칭했습니다.

한국게임산업연합회가 2008년 발의한 ‘캡슐형 유료 아이템 서비스 제공에 대한 자율준수 규약’에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자율규제의 요지가 담겨있습니다. 특히 ‘랜덤박스에 ‘꽝’이나 판매가에 비해 현저히 가치가 낮은 결과값을 넣지 말 것’과 ‘반드시 통상적인 게임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과값만 넣을 것’이 핵심이죠. 또한 ‘카지노’, ‘슬롯머신’, ‘복권’, ‘로또’ 등 형법 및 사특법에서 금지하는 용어의 사용 및 묘사도 지양합니다.


▲ 2008년 캡슐형 아이템에 대한 자율준수 규약의 핵심 요지

문제는 이 2008년도 규약에 대한 업체의 대승적인 참여와 자정작용이 이루어지지 못했단 겁니다. 누군가 시행 현황을 감시하고 강제한 것도 아니고, 문자 그대로 ‘자율준수’였기에 아무도 지킬 생각을 안 했죠. 결국 여기서 진화되지 못한 불씨는 몇 년 후 대대적인 불길로 업계를 덮치게 됩니다.

2008년까지만 해도 간간히 이벤트로 등장하던 확률형 아이템은 2011년에 이르러 개발사들의 대표적인 수익모델로 각광받게 됩니다. ‘던전 앤 파이터’, ‘아바’, ‘마비노기’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SD건담 캡슐 파이터’ 등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대표적인 확률형 아이템 판매 사례가 다 이때 나왔죠.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6개 기관 국정감사에서 직접적으로 거론될 정도로 게임의 사행성 문제가 극에 달했습니다.


▲ 2011년 게임 사행성 논란의 상징과도 같은 '키리의 약속과 믿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1년에 확률형 아이템 문제를 결착 짓지는 못했습니다. 국감에서 쓴소리를 들은 문화부는 확률형 아이템에 대한 행정지침을 마련한다고 공표했고, 업계도 2008년 규약을 다듬은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내놓겠다고 호언했죠. 그렇게 계획을 세우느라 바쁘다며 어영부영 해를 넘기게 된 겁니다.

2011년 말에는 국내 게임계에 또 다른 거대한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바로 청소년 보호법에 의거한 일명 ‘신데렐라법’ 게임 셧다운제의 등장이죠. 청소년들의 게임 과몰입을 방지하기 위해 심야시간에 접속을 제한한다는 것이 골자인데요. 얼마 전까지 사행성 문제로 몰매를 맞던 게임계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업의 직접적인 타격을 입게 됐습니다.

다만 사행성 문제와는 달리 셧다운제에 있어선 게이머들이 업계와 어깨를 맞대고 함께 정부에 맞섰는데요. 문화의 총아인 게임을 중독물로 폄훼하고, 청소년들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악법을 철폐하자고 의기투합했죠. 결국 셧다운제에 얽힌 갑론을박 와중에 확률형 아이템 자율규제에 대한 논의는 은근슬쩍 뒤로 밀리게 됩니다. 


▲ 여성가족부가 발의한 게임 셧다운제 때문에 묻혀버린 사행성 논란

2013년에도 정부와 업계의 평행선 달리기는 계속 됐습니다만, 화두는 확률형 아이템이 아닌 고스톱, 포커류(이하 고포류)였습니다. 문화부가 고포류의 사행성을 좌시할 수 없다며 시행령을 들고 나왔죠. 당시 협회에서는 언제나처럼 자율규제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문화부가 강경히 대응한데다 업계로써도 고포류 사행성을 완전히 부정하기란 어려웠습니다. 결국 이 싸움은 정부측 승리로 일단락됐죠.

한동안 잠잠하던 확률형 아이템 규제 논란을 재점화한 것은 새누리당 정우택 의원입니다. 정 의원은 올해 4월, 확률형 아이템 목록 및 확률 공개를 주로 한 게임법 개정안을 발의하며 법안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어요. 앞서 살펴봤듯 업계가 수년간 자율규제를 주장해왔지만 실효성 없는 공허한 외침이었다는 게 명분입니다. 게이머들의 권리를 업계가 지켜주지 않겠다면 법으로 보장한다는 것이죠.

업계로서는 수입모델에 직접적인 정부 규제가 이루어지는 건 그야말로 목에 칼이 들어오는 격입니다. 당연히 절대로 묵과할 수 없는 만큼 협회가 중심이 되어 어떻게든 자율규제로 끌어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죠. 정 의원이 제기한 실효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소간의 수익감소를 감수하고서라도 아이템별 뽑기 확률을 공개하기로 용단을 내렸습니다.


▲ 정우택 의원은 업계가 유저와의 신뢰를 저버렸다며 정부 규제를 내세웠다

여전히 제자리걸음하는 자율규제, 정부의 손 들어주는 유저들

협회가 의욕적으로 자율규제를 추진한지 2달, 과연 유저들의 ‘살림살이’는 좀 나아졌을까요? 안타깝게도 현재 자율규제는 대상 게임들이 제대로 모두 참여하지도 않고, 구성품 및 확률 공개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나 가이드라인이 없어 같은 회사가 서비스하는 게임끼리도 공개 방식이 통일성 없이 중구난방입니다. 심지어 협회가 7월 말 발표한다던 ‘확률형 아이템 자율규제 모니터링 결과’도 8월을 넘겨 9월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함흥차사죠.

이번 자율규제는 어찌 보면 업계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법의 철퇴가 코앞까지 들이닥쳐서 그런 것도 있지만, 국내 유저들의 업계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법에 앞서 업계 스스로가 확률형 아이템 관련 정보를 공개해 유저와의 신뢰 회복에 나서겠다는 자율규제의 취지는 시작부터 흔들리고 있습니다.


▲ 협회가 자율규제를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듯 보였으나 결과는...

당장 자율규제 시작일은 7월 1일임에도 대부분 업체가 7월 중 세부 사항을 정하겠다며 한발 물러섰고, 그 후 메이저 업체들이 하나 둘 자율규제에 나서는 중에도 여러 중소 개발사는 눈치보기에 바빴습니다. 이처럼 업계의 미온적 반응과 이를 제대로 이끌지 못한 협회의 불찰이 더해 지금의 패착이 됐죠. 자율규제가 시행된 지난 2달간 업계에 대한 유저들의 조소는 점점 더 커지기만 했습니다.

확률형 아이템 구성품 및 확률 공개는 원산지 표시와 같습니다. '이건 불가능한 확률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도 이를 인지하는 것과, 모르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죠. 확률도, 무엇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면 '이 정도 쓰면 나오지 않을까'라는 추축과 기대심만으로 돈을 써야 합니다.

하다못해 러시안 룰렛에서 머리에 총구를 들이댄 사람도 자신이 죽을 확률이 1/6인 것은 압니다. 물론 유저들의 ‘알 권리 보장’이 확률형 아이템을 둘러싼 쟁점의 전부도 아니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의미한 한걸음조차 내딛지 못하면서 다른 방법을 강구하자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업계가 계속해서 유저들의 권리를 보장해주지 못한다면 결국 유저들은 정부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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