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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내려 앉은 도시: 서장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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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이야기한다

우주가 시작될 때 창조의 여신 ‘컬드라’는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 책에 창조의 여신은 신들의 언어로 지상세계에 대해 쓰고 있었다. 그러자 그 책에 쓰여지는 대로 지상과 우주가 창조되었다. 그 책은 ‘창조의 서(컬드셉트)’라고 불렸으며 창조의 여신이 세계를 만들어내는 도구라고 일컬어졌다.

우주의 세월이 흘러가는 도중 창조의 여신 컬드라는 다른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 신들 중에 창조의 여신은 지상 세계를 돌보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일부의 신들이 창조의 여신에게 반역을 하기 시작했다.

그 반역 신들은 ‘창조의 서(컬드셉트)’를 사용해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우주에 흐르는 시간의 틈에 창조의 여신 컬드라는 ‘컬드셉트’를 잃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반역 신과 창조의 여신을 따르는 신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컬드셉트’는 산산조각이 나 세상 곳곳으로 흩어져 버리고 ‘컬드셉트’의 파편들이 지상 세계로 떨어졌다.

우주의 시간이 시작될 때 인간들은 지상 세계에 안주하고 있었다. 인간들은 신들과 대화하며 세계를 만들어낸 창조의 여신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곳에 어느 날 ‘컬드셉트’의 파편이 세계 곳곳으로 쏟아졌다. 그 파편들은 지상 세계 사람들의 손으로 떨어져 ‘신의 석판(컬드)’ 라고 불려졌다.

우주의 시간이 다시 흐르고─ 인간은 신의 도구를 손에 넣었다

그 후부터 ‘신의 석판(컬드)’을 모두 지배하게 되면 자기 마음대로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전설이 세상에 퍼지기 시작했다.

서장: 소년과 소녀 미소와 눈물

<레론 엘라이 11살 >

가냘픈 노랫소리가 부드러운 봄 햇살에 녹아 내려간다.

소녀가 부르는 신화에 대한 노래를 들으며 소년은 열심히 붓을 날리고 있었다.

신화는 이야기 한다─

예전에 창조의 여신의 손에 있었던 한 권의 책에 대해서─

그리고 신들의 싸움이 끝난 후 인간의 손에 쥐어진 어떤 아이템에 대하여.

드디어 보석상자에 보석을 가만히 집어넣듯이 소녀는 노래를 멈추고 입술을 다물더니,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면 너는 어떤 세계를 만들거니 레론?”

속이 들여다보일 것 같은 하얀 볼에 끝이 없을 것 같은 부드러움을 떠올리며 그렇게 물었다.

“아름다운 세계”

소년이 캔버스에 붓을 놀리며 밝고 환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소녀는 빛나는 눈을 살짝 감더니,

“너다운 대답이구나. 이 세계에서 너는 너 마음껏 아름다운 그림을 많이 그리려는 거구나”

몇 번이고 그 가냘픈 턱을 조금씩 움직이며 말했다.

소녀는 길고 곧게 뻗은 금발 머리에 공화국 휘장을 새긴 하얀 망토를 걸치고 부드러우면서도 새하얀 손에는 엘라이 가문에 전해지는 50번째 ‘컬드’라고 불려지는 신비로운 힘을 가진 작은 석판조각을 들고 그 힘을 지배하는 자로서의 소중한 영광을 온몸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미라 누나는? 어떤 세계를 원해?”

소년은 물었다. 마치 자신의 열정을 나타내듯이.

“미라 누나라면 분명 이 세상의 컬드를 모아서 컬드셉트를 완성 시키려고 하겠지. 그렇게 하면 여신님이 미라 누나에게 천지창조의 권리를 줄 거잖아”

“진짜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신화잖아 레론”

부풀어 오른 소년의 열의를 가만히 받아 넘기듯이 그녀가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

“아무리 이 컬드가 정말로 예전에 이 세계를 만들어낸 컬드셉트의 파편이라고 해도… 다시 한번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잖아”

그리고 잠시 먼 곳을 바라보더니,

“하지만 혹시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다면…… 난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어”

가만히 기도하는 듯이 대답했다.

“누구에게도 지배당하지 않으며, 빼앗기지도 않으며, 파괴당하지도 않는…그런 세계라면 좋겠지”

머나먼 저편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캔버스에 그린 그림처럼 소년의 마음속에 새겨 지는 것 같았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더니.

“꼭 만들 수 있을 거야. 미라 누나라면 꼭…”

“벌써 다 그린 거야 레론?”

소녀가 살짝 미소 띤 눈으로 소년을 향해 말했다.

“그래 가지고는 아버지를 설득시키기 힘들걸. ‘셉터’ 수행을 하면서 네가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를 할 수 있도록 아버님한테 부탁하려면, 좀더 제대로 그리지 않으면 안 되지”

부드럽게 타이르는 그 소리를 듣자 소년은 당황하면서 그녀의 모습을 캔버스에 그리는 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아티미스 페란─11세>

“여기 좀 봐봐요 아빠”

소녀는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무표정인 채로 가만히 입술을 내밀고 피곤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빠와 아빠의 여행준비를 도와주고 있는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또 길어질 거야…. 어쩌면 지금까지 보다 더…”가만히 아버지가 그렇게 이야기했다. 탄탄해 보이는 체구에 검은 법의를 입고 가슴에는 붉은 신단의 휘장이 새겨져 있었다.

짧게 자른 검은 머리에 두터운 손가락. 그의 옅은 녹색 눈이 미소 지을 때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표정이 나온다는 것을 소녀는 알고 있다. 단 그렇게 아빠가 웃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할 수 없을 뿐이었다.

“아티도 내년이면 11살이 돼요”

엄마가 이야기했다. 그 말에 아빠는 슬쩍 소녀 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바로 그 눈은 공허한 표정을 지었다.

“이 애에게 셉터로서의 재능은 기대하기 힘들어 그런 건 차라리 없는 게 나아”

“그래도 애들이 신단에 갈 때는 언제나 부모도 같이 가야 되잖아요”

“그건 알고 있어…”

“혹시 만에 하나라도 아티에게 재능이 있다면 아티가 당신 뒤를 따를지도 모르잖아요”

움찔하고 소녀가 반응했다. 소녀가 아빠의 뒤를 잇는다. 가끔씩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왕궁에서 명령이 내려지면 신전에 전해지는 일곱 장의 컬드를 손에 들고 영광스러운 셉터로서 전쟁터로 떠나는 아빠의 뒤를 잇는다. 바로 내가.

“어쩌면, 아티가 당신의 뒤를 이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런 중요한 때에 당신이 없다니….

아무리 왕궁이라도 너무한 거 아니에요”

엄마가 말했다. 그래 소녀는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혹시 자신이 아빠를 대신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빠는 결코 전쟁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실은 가족을 남겨두고 여행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신단이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신단이 자신들만 자유롭게 지내며 왕궁에 공물을 바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것은 아빠가 그 정도로 셉터로서 왕궁을 위해 일하기 때문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아빠는 싸우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아빠를 믿고 있기 때문에 아빠는 도망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대신에 나가 싸운다면 그만큼 아빠는 집에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몸이 허약한 엄마가 침대에서 창 밖을 바라보며 아빠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그런 애처로운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빠의 뒤를 이으면 그때가 되어서야 아빠가 나를 봐줄 것이 틀림없다. 깊은 감사와 애정을 담아 아빠의 우람한 가슴으로 안아줄 것이다.

“나 셉터가 될래요”

소녀가 그렇게 말하자 아빠와 엄마가 소녀를 뒤돌아보았다. 아빠도 엄마도 모두 놀랐지만 소녀도 놀랐었다. 이런 단 한마디에 아빠와 엄마가 갑자니 날 바라보다니….

아빠의 뒤를 잇는다는 것이 그렇게 굉장한 일인 걸까.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티미스…”

아빠가 저미는 듯한 목소리로 소녀를 불렀다. 그 아빠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소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녀는 그저 아빠가 자기를 바라보며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에 흥분하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지만 왠지 자기를 똑바로 바라봐주지 않았던 아빠가….

“아티미스… 너는 네가 그런 힘이 있다고 생각하니? 창조신 컬드라의 힘을 느끼니? 내가 가진 이 컬드를 보면 뭔가 느낄 수 있니?”

아빠는 커다란 손을 소녀의 어깨에 올리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만지며 자신에게 말을 거니 아빠에게 소녀는 몇 번이고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느낄 수 있어요. 나 셉터가 될래요. 아빠처럼 될 거에요”

소녀는 얼굴을 상기시키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정말로 그런 힘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힘을 느끼느냐고 물어보면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소녀는 아빠와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질 않게 되었다. 아빠가 소녀를 껴안은 것이다. 아빠의 두터운 어깨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오더니 아빠의 냄새와 체온이 소녀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소녀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자신이 생각하던 것 이상의 아빠의 반응에 감동할 따름이었다.

“어쩌면 이럴 수가….”

아빠의 슬픔에 잠긴 목소리는 소녀의 귀에도 들렸지만 마음에는 전해지지 않았다.

“나 셉터가 될래요 아빠”

소녀는 말했다. 몇 번이고 말하려고 했었다. 몇 번이고 그 말을 마음속에서 중얼거렸다. 그것만이 가족을-아빠와 엄마와 소녀를 이어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주문이었다.

<레론 엘라이-12세>

소년은 부드러운 봄 햇살 속에서 캔버스와 그림도구를 안은 채로 뛰어가듯이 숲 속을 헤쳐 나갔다. 소년의 뒤에는 엘라이 성이 우뚝 솟아 있었다. 소년은 그 성에서 도망치듯이 숲 속으로 뛰어갔다.

소년은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었다. 바로 숲 속에 있는 샘이었다. 그 곳은 동물들이 물을 마시러 모여드는 곳이다.

그 동물들 속에서 소년은 한 마리 큰 산양을 발견했다. 튼튼한 두 뿔은 마치 철로 만든 창을 연상시켰고 늑대조차도 감히 덤벼들 수 없는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산양의 모습을 보고 언젠가 캔버스에 그리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소년은 오랜만에 해방감을 느꼈다. 소년의 눈에 세계는 언제나 아름다우며 평화로웠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 소년의 눈앞에 갑자기 강한 빛이 날아 들어왔다.

“무슨 이런 때 그림 그리기야”

빛과 함께 왠지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목소리가 소년에게 들렸다.

“정말 레론은 못 말린다니까. 이러니 엘라이 공작님도 화낼 만하지”

소년은 멈추더니 놀라며 눈앞에 떠오르는 빛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건 다름 아닌 한 장의 ‘컬드’였다.

장방형으로 뻗은 카드처럼 생긴 것이었다. 손바닥만한 크기에 가벼운 돌 같기도 하면서 반대편에는 복잡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또 그 반대편은 얼핏 보면 그저 거울 같았다. 힘을 가진 사람만이 보면 그 거울에 숨겨져 있는 상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 그 작은 석판이 열리더니 거울 판에서 숨겨져 있는 상이 나타났다.

“그리멀킨 - 미라 누나가 보냈니?”

소년이 귀찮다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더욱 강한 빛을 내며 공중에 떠있던 컬드가 팟! 하고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그러더니 뭔가가 빛에 쌓인 채로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건 소년의 허벅지만한 크기의 고양이 모습을 한 크리처였다.

인간 여자와 닮은 듯한 체형에 검은 광택을 가진 체모, 옅은 보라색 띈 짝 달라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뾰족하게 솟은 귀에는 옥으로 된 귀걸이를 하고 목에는 금색으로 번쩍이는 사슬을 걸치고 황금빛 눈동자를 장난스럽게 반짝이며 말했다.

“그래, 미라 님의 명령이야. 뭐야 그런 표정을 하고. 내가 싫은 거야?”

약간 코를 들추듯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소년을 곁눈질하며 노려봤다. 작은 여자처럼 생긴 고양이의 그 모습에 소년은 움찔했다. 이게 가끔은 인간보다도 더 귀여워 보일 때가 있단 말야…….

“절대 그리가 싫은 건 아냐……”

묘하게 당황해 하더니 소년은 말을 얼버무렸다.

소년의 누나가 석판에서 불러낸 이 ‘그리멀킨’ - 통칭 그리는 귀엽게 생긴 외형과는 다르게 여러 가지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녀는 소년의 가정교사, 하인, 놀이상대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었다. 동년배 애들과 거의 만날 수 없는 소년에게는 소중한 존재였다.

“그러면 좀 더 기쁜 듯한 표정을 지어야지. 아무리 연습해도 나 하나만 소환시킬 수 있는 햇병아리 셉터가 말이야”

“꺄하하하”

그리는 장난이라도 치듯이 웃더니 휙 하고 날아올라 소년의 가슴을 밟더니 어깨에 앉았다. 그리의 검고 긴 꼬리 앞부분에는 짙은 보라색 털이 나 있고 그리는 그걸로 소년의 볼에다 장난을 쳤다. 소년은 약간 삐지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조금만 있으면 너 따위는 간단히 소환시킬 수 있게 될 거야”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넌 마나 마력은 넘쳐날 정도로 있는데 아직 기합이 부족하다니까. 엘라이 공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지배해 보이겠다’라는 열의가 없으면 안 돼지”

“지배라……. 난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말야”

“이쪽에서 보기에는 아직 멀었어. 자 빨리 날 지배해봐”

“바보”

왠지 모르게 얼굴을 불게 물들이면서 소년은 빨리 걷기 시작했다. 소년에게 있어서 그리는 소중한 친구이자 교사였다. 지배해야겠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저기 있다”

잠시 후 도착한 샘 주변에서 소년은 한 마리의 큰 산양을 발견했다. 조용하게 상대편을 자극하지 않도록 그림도구를 펼치고 캔버스에 눈을 향했다. 몇 번이고 마음속에 그리고 있던 산양의 모습을 목탄으로 그리기 시작하자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이 몰려왔다.

“세상은 평화롭고 아름답구나”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그때 갑자기 산양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꼭 산양이 자신이 하는 말에 대답하는 것 같았다.

산양이 다시 샘에 입을 갖다 대자 소년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 찼다.

“이런 얼굴을 보면… 왠지 보고 있는 이쪽까지 기분이 좋아진단 말이야”

그리가 옆쪽에 있는 바위에 앉으면서 못 말린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예전에 소년이 아버지에게 셉터수행과 함께 그림도 그릴 수 있게 허락 받기 위해 실제로 언니를 그린 그림을 보여드린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레론이 그린 그림의 훌륭함에 완고한 아버지도 감동해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게 허락해주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런 소년의 얼굴에는 만족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소년의 얼굴에 나타나는 나약함을 아버지는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엘라이 공국의 후계자로서 또 양국의 질서를 담당하게 되는 셉터로서 날마다 그런 웃음이나 짓고 다녀서는 위엄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으로 누나는 이 소년의 미소야말로 영민에게 안심감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해 주었다. 자기가 느낀 감정을 표면에 나타내는 소년의 순진함을 두고 언제나 누나와 아버지는 대립했었다. 누나도 아버지도 우수한 셉터인 만큼 서로의 주장을 굽히는 일은 없었다.

혹시 병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살아있었다면 아버지나 누나 한쪽 편을 들어줬을 것이라고 가끔씩 소년은 생각한다. 어머니는 누나와 아버지조차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셉터로서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어머니의 재능을 한 몸에 받아 이은 소년이 어째서 그런 힘을 발휘할 수 없는지 왠지 아버지 엘라이공은 그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아버지는 요즘 들어서 소년의 능력 발휘를 그림이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성안에서 캔버스를 펼치고 있는 것을 아버지에게 들키면.

“뭐냐 그런 한심한 얼굴을 해가지고서는! 좀더 위엄을 가져야지!”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꾸짖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 정도는 약과였다. 아버지의 기분이 나쁠 때에는 갑자기 말 한마디 없이 때리는 것이었다.

“엘라이 공국에 전해지는 컬드의 지배자로서의 긍지를 가져라!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맞아서 얼얼한 볼을 매만지면서 소년은 가만히 멈춰서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속에서는 지배자로서의 긍지 따위 개나 줘버려 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이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는 것이다.

아버지는 나무 밑으로 내려 쬐는 햇살 사이에서 목마름을 달래고 있는 큰 산양조차 적으로 보이는 걸까.

“저녁이 되기 전까지는 데리고 돌아가겠다고 미라 님한테 약속했지만……. 그런데 이 산양 꽤 멋있는걸. 너도 이 정도로 위엄을 가져야지”

그리가 겨드랑이 사이로 캔버스를 바라보며 귀찮게 했다.

“괜찮아 어차피 하루 종일 성에 가만히 있을 뿐이잖아. 적 셉터가 침입한다고 말은 해대지만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나잖아. 어차피 헛소문일 뿐이야”

“아직 어리네. 셉터끼리 싸우는 것을 아직 못 봤으니까 그런 소릴 하지”

냐옹 소리를 내며 그리가 바보 취급한다는 듯이 웃었다. 소년은 기분이 상해서 산양 쪽으로 집중했다.

“잘 들어 레론. 셉터끼리 싸우는 게 눈에 보일 때는 이미 결판은 거의 난 거야. 셉터는 우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잠입해와. 대지의 마나를 지배해서 조금씩 힘을 높여서 오지. 뭔가 일어났다는 것은-승패가 단숨에 정해지는 단계에 들어 왔다는 거야”

소년은 대충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은 누나와 그리, 아버지한테 몇 번이고 들어왔었다. 셉터는 잠입해온다. 컬드를 여는 목적은 대지의 마력을 지배하기 위해서였다. 마력을 빼앗아 자신에게로 모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파괴와 침략을 일삼는 것이다.

“마치 백 개미들 같은 녀석들이잖아.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남이 살고 있는 집의 기둥을 파먹다니”

여기 아버지가 있었더라면 아마도 일어설 수도 없을 정도로 강하게 맞을 지도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용처럼 무서운 백 개미야, 레론”

그리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소년도 적이 침입해왔을 때의 무서움은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까지 바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 몇 개월 정도 전부터 사정이 갑자기 긴박해졌다.

이웃나라가 ‘검은 셉터’라고 불리는 파괴활동을 하는 셉터를 보낸 이후로 경비가 증강되어 병사들은 모두 살기를 띄고 아버지도 누나도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소년의 민감한 마음에는 고문이라고 부를 만한 긴장감인 것이다. 적어도 며칠에 한번쯤은 이렇게 성을 빠져 나와서 좋아하는 그림이라도 마음껏 그리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이러한 레론을 나약하다고 꾸짖겠지만 알 바가 아니었다. 시장에 물건을 사러 나온 아주머니들에게 조차 달려들어 적 셉터의 스파이가 아닌지 심문하는 병사들의 살기등등한 표정을 보는 것 보다는 산으로 도망치는 것이 나았다.

“적어도 저녁까지는 돌아가야 돼, 레론. 정말 내가 엘라이 가를 섬겨온 지 150년 동안 여러 주인님을 봐왔지만 너는 그 중에서도 가장 별나다니까”

그리가 못 말린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소년은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해서 산양의 모습을 캔버스에 그리고 있는 중이다. 결국 그리도 포기하고 소년 옆에 잠시 눕더니 잠이 들어버렸다.

그만큼 이 주변은 평화로웠다. 산양과 함께 새와 토끼도 샘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언제 늑대나 여우가 덤벼들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다.

적의 존재에 조심하면서 가만히 적과 그렇지 않은 상대를 구분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에게나 무조건 살기를 뿜어내는 인간과는 전혀 달랐다.

소년은 캔버스에 산양의 모습을 몇 장이고 스케치를 그렸다. 행복했다. 동물들처럼 당당한 모습이야 말로 소년이 배워야 할 것이었다. 이 스케치를 아버지의 서재에 올려놔야지. 그리고 병사들의 살벌한 모습을 스케치한 것도 그 옆에 놓아두는 거야. 어느 쪽이 더 훌륭하죠? 그렇게 물어봐야지.

아버지에 대한 도전의식을 높이면서 소년은 잠시, 무슨 소리가 나는 것을 느꼈다.

쾅. 이상하게 길게 퍼지는 소리였다. 의식할 때 쓰는 축포소리 같았다. 동물들이 갑자기 얼굴을 들었다. 다들 두리번거리더니 몸을 숙이고 재빨리 숲 속으로 도망쳤다.

“뭐야 뭐야!?”

이상한 기운에 그리가 날아왔다. 소년은 아직 멍한 채로 있을 뿐이었다. 쾅. 다시 같은 소리가 들렸다. 소년의 뒤쪽에서였다. 하지만 소년은 돌아볼 수 없었다. 얼어붙을 듯한 공포가 발밑에서부터 전해졌다.

“굉장한 마나야! 적이 공격해오는 걸 거야! 성에서 모두 싸우고 있어, 레론!”

그리가 소리쳤을 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섬광이 쏟아졌다. 깜짝 놀라며 소년이 돌아보자 그곳에 거대한 화살 모형을 한 빛의 줄기가 내려오고 있었다.

‘매직볼트’-셉터가 컬드에서 소환시키는 힘 중 하나였다. 그렇게 배운 것을 소년은 떠올렸다. 파괴를 부르는 빛이 다가오더니 잠시 동안 온 세계가 새하얗게 되어버렸다.

“우리들 적한테 들켰….”

그리의 목소리가 폭음에 사라지고 빛의 화살이 소년과 그리에게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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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야소프트
게임소개
게임의 규칙은 매우 간단하다. 부루마블은 정해진 맵 위를 주사위를 굴리며 이동하다가 빈 땅이 있으면 거기에 건물을 짓는데, 컬드셉트는 건물 대신 자기 카드에 있는 몬스터를 배치한다. 만약 상대편 땅에 멈추면 정해... 자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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