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정남]은 매주 이색적인 테마를 선정하고, 이에 맞는 게임을 골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벌써 4주 째, 영화 ‘조커’의 여운에 빠져 있다. 왠지 계단을 내려갈 때만 되면 어깨가 씰룩거리고, 머리를 초록색으로 물들이거나 빨간 양복을 맞춰 입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고, 괜히 주변 사람들에게 “XX, 당신은 무례한 사람이에요” 라고 말하곤 한다. 아, 오해하지는 말자. 조커의 사상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만큼 영화가 인상깊었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핵심은 꿈을 갖고 평범하게 살고자 했던 소시민 아서 플렉이 아주 천천히 희대의 빌런 조커가 되어가는 과정 묘사에 있다. 두 시간에 걸친 러닝타임 동안 아서는 자신의 삶을 지탱하던 요소들을 하나둘 잃어버리고,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내면 깊숙히 숨어 있던 광기를 마주해 결국 조커로서 각성한다. 그 과정이 너무나도 섬세하고 차근차근 그려지기에 폐부를 찌르는 아픔이 더욱 생생히 느껴진다.
게임에서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정상에 가깝던 캐릭터였는데, 게임을 진행함에 따라 조금씩 망가지기 시작해 결국에는 무너져 버리는 장면 말이다. 아서 플렉 못지 않게 아주 천천히, 천천히 흑화된 게임 속 캐릭터 TOP 5를 뽑아 봤다.
TOP 5. 검은방 - 류태현
류태현은 수일배의 대표작 검은방 시리즈 최대 피해자다. 검은방 시리즈는 밀실에 갇힌 사람들이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동료를 잃고, 사람들 사이에 감춰진 비밀이 드러나고,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을 그린다. 2008년 1편을 시작으로 2011년 4편까지 출시됐는데, 이 모든 게임에 류태현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초대받았다. 다른 세계에서라면 핵 of 핵인싸인 셈인데, 하필이면 검은방이다.
그 과정에서 류태현은 차근차근 망가져간다. 1, 2편에서는 수없이 절망적인 상황과 자책감에 맞닥뜨리지만,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 탈출에 성공하고 경찰까지 된다. 그러나 3편에서는 여러 모로 정신적으로 코너에 몰린 모습을 보여주고, 4편에 이르러서는 매우 불안하고 휘청거린다. 1편과 4편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네 번이나 잡혀오는 것이 이렇게 사람을 망가뜨리는구나 하고 느껴질 정도. 게다가 4편 후반부에는 오른손도 절단당하고, 직장도 잃고, 악몽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여러분, 방탈출 네 번 연속 플레이가 이렇게 위험합니다!
TOP 4. 헬블레이드 - 세누아
최근 발매된 게임 주인공 중에서 가장 처절한 행보를 겪은 이를 꼽자면 단연 헬블레이드의 주인공 세누아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조현병을 앓아 온 데다 전염병을 예견할 정도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로 인해 그녀는 게임 내내 환청과 환시, 편집증과 망상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바이킹의 습격으로 멸망한 부족과 사랑했던 자를 살려내기 위해 사후세계인 ‘헬’로 모험을 떠난다.
세누아의 모험은 순탄하지 않다. 환각과 환청 때문에 절벽에서 추락하기도 하고, 밤새 어둠 속을 헤매고, 수없는 죽음을 간접 체험하고, 자해까지 한다. 그렇게 자기 자신과 맞서며 헬로 향하는 문으로 들어서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여태껏 애써 잊고 살아왔던 끔찍한 과거와 죄책감. 모든 이야기를 풀어버리면 스포일러가 될 테니 설명은 하지 않겠지만, 결국 세누아는 모든 진실을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재해석하고 환각과 싸우며 만신창이가 되어버린다. 게임 내내 가까스로 버텨 가던 그녀가 무너지는 과정을 보고 있자면 그야말로 참혹함 그 자체다. 그래도 엔딩을 보면 이런 기분이 조금은 씻겨내려가긴 하니, 4위에 랭크하겠다.
TOP 3. 헤일로 - 코타나
헤일로 시리즈의 주인공은 단연 마스터 치프다. 그렇다면 여주인공은 누굴까? AI ‘코타나’ 외엔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마스터 치프가 열심히 몸을 놀려 싸우는 와중, 코타나는 뒤에서 다양한 정보전을 벌이고 해킹에 개조까지 해 가며 대규모 전투를 벌인다. 과묵한 성격의 치프에게 재잘거리며 말을 거는 모습을 보면 AI임에도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다. 그런 코타나에게도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수명이다. 인공지능은 수많은 정보 연산으로 인해 수명이 정해져 있고, 그 수명을 넘기면 광기에 빠져버린다.
코타나 역시 마스터 치프가 동면에 들어간 동안 수명을 넘겨버렸는데, 그 결과 우울증, 분노 등 다중 인격 장애 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코타나가 망가져 가는 과정은 헤일로 4에서 여실히 다뤄지는데, 초반에는 잠깐씩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던 코타나가 나중에는 아예 미쳐버린다. 그렇게 붕괴해 가는 코타나는 치프의 믿음으로 인해 정신을 다잡고, 결국 자신의 인격을 분열시켜 치프를 살리고 사실상 죽음을 맞이한다. 물론 나중에 분열된 파편 인격으로 다시 재등장해 진정한 빌런의 길을 걷긴 하지만, 제작진도 기존의 코타나는 4편에서 끝났다고 밝혔으니 이후 행적은 굳이 언급하지 말자.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슬프다.
TOP 2. 월화의 검사 - 타카네 히비키
SNK 대전격투게임 ‘월화의 검사 2’에 등장하는 타카네 히비키. 발도술로 유명한 그녀는 검 제작 장인의 딸로, 게임 시작 전까지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17세 소녀였다. 그러던 중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세츠나를 쫒아 끝없는 전투에 뛰어들게 된다. 참고로 그녀가 뛰어든 월화의 검사 2 세계는 진검 싸움이 난무하는 살육의 장으로, 1 대 1 대결에서 지면 목숨을 잃는 것은 일상이다.
여기까지만 얘기해도 대충 짐작할 수 있을텐데, 살인에 익숙치 않은 그녀의 정신은 전투에서 사람을 벨 때마다 조금씩 망가져간다. 게임에서 계속해서 상대를 절단하며 승리할 경우 처음에는 깜짝 놀란 후 울먹이며 “거짓말… 거짓말일거야…”, “이럴 수밖에 없었어, 어쩔 수 없었어!”, “참을 수 없어! 미쳐버릴 것 같아!”라며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거나 회피하려는 행동을 보이지만, 중반 이후에는 뭔가를 체념한 듯 싸늘한 표정으로 “약하니까 그렇게 죽는거야”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여기서 엔딩까지 갈 경우 아버지의 묘 앞에서 썩소를 지으며 “세츠나에 가까워지기 위해 승리하겠어요!”라며 살인이 일상인 검사로 각성해버린다. 계속되는 살인이 평범한 소녀의 정신을 파괴하는 과정을 차근차근 보여준다는 면에서 어떤 면에서는 조커보다도 더 잔혹한 장면이 아닐까?
TOP 1. 워크래프트 - 아서스 메네실
천천히 타락하는 게임 속 인물, 대망의 1위는 역시 리치왕 아서스다. 와우저라면 모두가 아는 그의 행적을 보면, 등장 초반에는 얼라이언스의 정의감 넘치는 열혈 청년 왕족으로, 약간의 뻘짓을 하긴 했지만 백성들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인재였다. 그러나 19세 때 애마 천하무적을 잃으며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해도 된다는 사고방식을 처음 갖게 되고, 이는 점점 커져 결국 스트라솔름 대학살이라는 광기까지 치닫는다.
결국 이로 인해 성기사 특유의 빛의 힘을 잃은 아서스는 노스랜드로 가서 서리한을 얻게 되고, 검의 이끌림에 넘어가 영혼이 타락해 버린다. 결국 개선식에서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로 유명한 패륜 대사와 함께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공포 정치를 펼치던 그는 옛 스승 우서까지 자신의 손으로 죽인 채 끝없는 학살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아서스의 자아는 거의 사라지고 서리한에 이끌린 빌런으로 향해 가고 있다. 결국 그는 아서가 조커가 되듯, 2대 리치왕이 되어 워크래프트 시리즈 최고 빌런으로 각성했다. 이쯤 되면 호아킨 피닉스가 단독 영화 ‘아서스’ 정도는 찍어줘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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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메카 취재팀장을 맡고 있습니다jong31@gamemec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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