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명품 조연’은 작품을 빛내는 감초로 통한다. 주인공의 연기가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이를 뒤에서 받쳐주는 조연이 있어야 한다. 즉, 조연은 작품을 지탱하는 밑바탕과 같다. 게임업계에도 이러한 ‘빛나는 조연’이 있다. ‘시스템 쇼크’, ‘데이어스 엑스’ 등을 개발한 워렌 스펙터가 그 주인공이다. 사실 그의 작품 중, 시장에서 크게 성공하거나, 이름을 널리 알린 작품은 100만 장 판매고를 달성한 ‘데이어스 엑스’가 전부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시스템 쇼크’의 총 판매량은 17만 장 수준이다.
그러한 그가 리차드 게리엇, 윌 라이트 등, 네임드 개발자들이 대거 입성한 ‘게임 개발자 초이스 어워드’에 나란히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파급력’이다. 워렌 스펙터는 2012년에 12번째 ‘평생공로상’을 수여했다. ‘다양한 장르의 깊이 있는 플레이 요소를 성공적으로 결합해 업계에 새로운 트랜드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스펙터의 대표작인 ‘시스템 쇼크’는 이후에 출시된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 대표작이 ‘시스템 쇼크’의 정신적인 계승작으로 알려진 ‘바이오쇼크’다. ‘내 철학을 돈보다 강하게 믿는다’라는 신념으로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워렌 스펙터의 작품은 현재 게임업계를 풍성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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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어스 엑스의 개발자, 워렌 스펙터 (사진출처: giantbomb.com)
영화 평론가 지망생은 왜 게임 개발자가 되었나?
워렌 스펙터는 1955년 10월 2일,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미국 맨하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여느 소년처럼 자동차나, 공룡, 비행기를 좋아했다. 또한 어린 나이에도 본인이 좋아하는 여역에 대한 논쟁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고집 있는 소년이었다. 이러한 그가 청소년 시절에 빠져든 영역은 ‘게임’이 아니라 ‘영화’다. 13살에 ‘영화 비평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정한 스펙터는 영화를 직접 만들며 꿈을 키웠다. ‘남에게 단 한 번도 보여주지 못할 정도로 형편 없었다’고 스스로 말한 습작 영화를 만들며 스펙터는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기술을 익혀야겠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이러한 스펙터가 영화 외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이 게임이다. 비디오게임보다는 TRPG를 선호한 그는 고등학교 시절, ‘던전 앤 드래곤스’를 즐기는 모임을 만들어 게임에 몰두했다. ‘게임을 좋아하는 영화 평론가 지망생’, 이 때만 해도 워렌 스펙터는 본인이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 TRPG의 대명사 ‘던전 앤 드래곤스’
이후 노턴웨스턴 대학교에 입학한 워렌 스펙터는 첫 2년은 저널리즘을, 그 다음 2년은 영화, 라디오, TV 등에 전공했다. 이후 텍사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해 석사학위를 딴 스펙터는 박사학위를 준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영화와 TV에 대해 가르쳤다. 이 때까지만 해도 스펙터의 꿈은 ‘영화 평론가’ 혹은 ‘영화 시나리오 작가’였다. 그러나 대학에서 갑자기 내부 사정으로 강의를 취소하겠다고 통보하며, 스펙터는 당장 다음 달에 낼 집세를 걱정해야 하는 신세가 된다.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든 워렌 스펙터가 처음 입사한 곳이 TRPG 제작사, 스티브 잭슨 게임즈다. 대학친구에게 일을 소개받은 워렌 스펙터는 1983년에 스티브 잭슨 게임즈에 입사하며 게임 개발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한다. 스펙터는 회사가 발행하던 게임잡지 ‘스페이스 게이머’와 ‘판타지 게이머’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회사의 TRPG 제작에 참여했다. 이후 고등학교 친구, 그렉 코스티키안과 함께 만든 ‘툰’을 비롯한 3개 작품 제작에 참여한 워렌 스펙터는 ‘던전 앤 드래곤스’의 개발사 TSR로 이직해 게임 프로듀서 겸 디자이너로 활동한다. 그는 TSR에서 ‘탑 시크릿/S.1’, ‘마벨 슈퍼 히어로즈’ 등의 TRPG를 제작한다.
▲ 워렌 스펙터가 제작한 TRPG ‘툰’ (사진출처: amazon.com)
TRPG 게이머로 시작해 개발자의 위치에까지 오른 스펙터의 이력은 이후 PC 게임 개발에도 영향을 미친다. 펜과 종이, 그리고 두꺼운 룰북을 펼쳐놓고 즐기는 TRPG를 진행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의 상상력이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설정해둔 시나리오와 역할, 그리고 규칙을 제외한 모든 것이 상상력과 플레이어 간의 대화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PC 혹은 콘솔로 즐기는 RPG가 이미 만들어진 ‘던전’을 화면으로 보여준다면, TRPG의 ‘던전’은 유저의 머릿속에 있다. ‘내가 온 던전은 이런 모습일 것이다’라며 플레이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TRPG이 매력이라 할 수 있다.또한 ‘던전 공략’과 같은 중요한 의사결정을 플레이어들의 대화를 통해 실시간으로 결정한다. 이러한 TRPG에 조예가 깊은 워렌 스펙터의 성향은 그의 이후 게임에도 영향을 줬다. ‘시스템 쇼크’와 ‘데이어스 엑스’ 그리고 ‘에픽 미키’의 공통점은 자유도 높은 게임성이 특징이라는 것이다.
처음으로 프로듀서를 맡은 ‘윙 커맨더’부터 가장 최신작인 ‘에픽 미키’까지 워렌 스펙터가 항상 강조한 부분은 ‘플레이어의 선택’이다. 게임 개발자는 플레이어가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무대와 시나리오, 설정을 만들고, 게임 속 이야기는 ‘게이머’ 스스로가 만들어나간다는 것이 그의 철칙이었다. 그의 대표작에 항상 따라붙는 수식 중 하나는 ‘방대한 자유도’다.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을 넓히고,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세밀한 세계를 만드는 것, 스펙터는 이후 이러한 개발철학을 실제 게임을 통해 보여주는데 집중했다.
리차드 게리엇과 ‘울티마’를 만들다
워렌 스펙터를 게임으로 이끈 것이 TRPG라면, 그의 역량이 100% 발휘된 분야는 PC 게임이다. TSR에서 일하던 중 워렌 스펙터는 PC 게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당시 그가 심취한 작품은 당대 최고의 RPG로 손꼽힌 ‘울티마 4’였다. 회사에서 ‘던전 앤 드래곤스’를 테스트하는 시간에 PC에 ‘울티마 4’를 켜놓고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스펙터에게 ‘울티마’ 제작사에 들어갈 기회가 열린다. 스티브 잭슨 게임즈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로부터 ‘오리진 시스템’이 프로듀서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이에 워렌 스펙터는 전보다 적은 연봉에도 이직을 결심했다
스펙터가 오리진 시스템에 입사한 시기는 리차드 게리엇이 ‘울티마 5’를 준비하던 시기다. ‘울티마 4’부터 ‘살아 숨쉬는 판타지 세계 만들기’에 집중한 게리엇의 기조는 ‘울티마 5’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게임 내 거의 모든 오브젝트를 움직일 수 있도록 하거나, 밤이 되면 자러 가고 아침에 다시 나오는 등 살아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NPC 등, 보다 생동감 있는 세계를 구축했다는 것이 ‘울티마 5’의 특징이다. 워렌 스펙터는 게리엇과 함께 ‘울티마 5’를 제작하며, 노하우를 쌓아간다. 본인 스스로가 이 시기를 학교에 비유해 ‘리차드 게리엇 박사과정을 밟았다’라고 언급할 정도다. ‘울티마 5’는 게리엇이 기획부터 코딩까지 맡은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즉, 스펙터는 RPG 거장 게리엇의 제작과정을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본 셈이다.
▲ 워렌 스펙터는 초창기, ‘울티마’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워렌 스펙터가 처음으로 프로듀서를 맡은 작품이 3D 비행슈팅 게임인 ‘윙 커맨더’다. 기존 비행게임이 사실적인 조작과 전투에만 집중했다면 ‘윙 커맨더’의 강점은 스토리였다. 주인공의 성장과 부대원과의 팀워크에 초점을 맞춘 짜임새 있는 스토리는 기존 비행게임과는 다른 재미를 플레이어에게 제공했다 여기에 업계 트랜드였던 까다로운 컨트롤을 버리고, 간편한 조작을 바탕으로 새로운 유저를 끌어들였다. 즉, 기존 비행게임과 차별화된 요소를 어필해 시장에 새 바람을 불어온 것이다.
‘윙 커맨더’ 이후에도 워렌 스펙터는 제작을 멈추지 않았다. 오리진 시스템에서 제작자로 일하던 1990년부터 1993년까지, 근 4년 동안 스펙터는 13종의 게임의 주요 제작진으로 참여했다. 대표작은 ‘윙 커맨더’ 1편과 2편, ‘울티마’ 6편과 7편, ‘배드 블러드’, ‘울티마’의 외전인 ‘울티마 언더월드’ 1,2편으로 압축된다. 여기서 주목할 타이틀은 ‘울티마 언더월드’다. 이 게임을 만든 인연을 토대로 워렌 스펙터는 ‘시스템 쇼크’의 산실 ‘루킹 글래스 스튜디오’에 입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울티마 언더월드’는 던전을 중심으로 한 콘셉에 시뮬레이션 요소를 결합해 자유도를 끌어올린 것이 특징이다. 이에 흥미를 보인 리차드 게리엇이 게임을 퍼블리싱하기로 결정하고, 워렌 스펙터를 프로듀서로 보내며 ‘루킹 글래스 스튜디오’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울티마 언더월드’의 가장 큰 특징은 플레이어가 1인칭 시점으로 자유롭게 맵을 돌아 다니는 ‘탐험 모드’였다. 훗날 워렌 스펙터와 함께 일하게 되는 더그 처치는 ‘울티마 언더월드’의 ‘탐험 모드’에서 ‘시스템 쇼크’를 착안했다고 언급했다.
▲ 높은 자유도가 특징인 ‘울티마 언더월드’
이렇게 오리진 시스템에서 활동하던 스펙터는 1993년 오리진 시스템을 떠난다. 오리진 시스템을 인수한 EA가 ‘울티마’ 등 핵심 타이틀을 제외한 프로젝트를 모두 취소시킨 것이다. RPG가 아닌 1인칭 시뮬레이션 게임을 차기작으로 생각하던 워렌 스펙터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스펙터는 오리진 시스템에서 나와 ‘울티마 언더월드’를 함께 만들었던 ‘루킹 글래스 스튜디오’에 새 둥지를 틀었다.
FPS+RPG, 신생 장르를 탄생시키다 – 시스템 쇼크
‘시스템 쇼크’는 워렌 스펙터가 본인의 이름을 알린 타이틀이다. ‘울티마 언더월드’ 개발을 마친 루킹 글래스 스튜디오는 RPG가 아닌 다른 장르에 도전할 시기가 왔음을 직감한다. 이러한 회사의 방향성에 따라 워렌 스펙터가 더그 처치와 함께 추진한 차기 프로젝트가 바로 ‘시스템 쇼크’다. 요새 게이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루킹 글래스 스튜디오’는 당시 탁월한 개발력을 보유한 개발사로 분류됐다. 특히 기존에는 없던 새로운 장르 탄생에 기여했다. 그 대표작이 ‘메탈기어 솔리드’와 함께 잠입액션게임의 시초로 손꼽히는 ‘시프’다.
‘시프’가 잠입액션의 시작을 알렸다면, ‘시스템 쇼크’는 FPS와 RPG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장르’를 탄생시켰다. 다양한 총기를 수집하고, 이를 주 무기로 적을 소탕하는 FPS의 틀에 캐릭터를 키우고, 플레이어가 주역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RPG 요소를 결합한 것이 ‘시스템 쇼크’의 특징이다. 특히 ‘울티마 언더월드’에서 ‘상호작용이 부족하다’고 판단된 텍스트 방식의 대화 시스템을 없애고, 게임 내 NPC와 이메일을 주고 받는 방식의 ‘오디오 로그’를 최초로 도입해 스토리를 전개하는 색다른 방식을 선보였다. 훗날 CD 버전에서는 모든 대화에 풀 보이스를 입혀 생동감을 더했다.
▲ ‘하이브리드’ 장르의 시작을 알린 ‘시스템 쇼크’ (사진출처: gamester81.com)
‘시스템 쇼크’는 2027년을 배경으로 가상의 우주정거장 ‘시타델 스테이션’을 점거한 AI, ‘쇼단(SHODAN)’을 저지하기 위해 투입된 ‘해커’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이러한 콘셉이 반영된 특수공간 ‘사이버스페이스’는 ‘시스템 쇼크’의 독창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 우주정거장 각 층에 마련된 ‘사이버스페이스’에 입장하면 해킹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캐낼 수 있었다. 여기에 잠긴 문을 열거나, 특정 지역에 전원을 공급하는 등 필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활동도 벌일 수 있다.
진행 방식에도 자유도를 더했다. 예를 들어 감시 카메라를 파괴하면, 이 지역이 ‘쇼단’의 컨트롤에서 벗어나며 좀 더 활동하기 쉬워진다. 즉, ‘시스템 쇼크’는 제작진이 만들어놓은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필요한 정보를 모아 스스로 경로를 개척하는 방식으로 신선함을 전했다. 또한 이는 ‘플레이어의 선택’을 중요시 여긴 워렌 스펙터 본인의 개발철학과도 맞물리는 부분이다. 워렌 스펙터가 ‘시스템 쇼크’를 개발하며 중요시 한 부분은 ‘디테일’이다. 고르는 재미가 있는 선택권를 주기 위해서는 현실에 근접한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한 것이다.
▲ 근미래를 배경으로, 독특한 게임성을 선보였다 (사진출처: giantbomb.com)
여기에 마우스의 활용을 극대화해 직관적인 조작을 지원했다. 바닥에 떨어진 아이템을 왼쪽 클릭으로 집어, 드래그로 인벤토리에 넣거나, 맵에 있는 오브젝트를 더블 클릭해 작동시키는 등, 마우스를 쓰는 색다른 방식을 제안했다. 오른쪽 버튼을 클릭해 적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는 조작 역시 ‘시스템 쇼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마우스로 편의성을 강화한 ‘시스템 쇼크’의 조작방식은 이후에 출시되는 게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외에도 미니맵이나 인벤토리, 무기 세부 정보 등 각종 정보창을 입맛에 맞게 조정할 수 있는 커스터마이징을 도입했다는 점 역시 주목할 부분이다.
워렌 스펙터가 ‘시스템 쇼크’의 프로듀서로서 한 일 중 하나는 판권 계약이다. 당시 스펙터가 어려워했던 부분은 도전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퍼블리셔들에게 거의 ‘모험’에 가까운 ‘시스템 쇼크’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기존과 완전히 차별화된 ‘시스템 쇼크’의 아이디어는 좋지만 개발 기간 및 비용 때문에 계약을 꺼리는 퍼블리셔가 대다수였다. 실제로 ‘시스템 쇼크’는 눈에 뜨이는 흥행을 기록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오리진 시스템이 퍼블리싱을 맡아 1994년에 출시된 ‘시스템 쇼크’의 판매량은 17만 장에 그친다.
이러한 ‘시스템 쇼크’가 훗날에도 회자되는 이유는 이후 출시된 다수의 게임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레셔널 게임즈의 창립자 켄 레빈은 루킹 글래스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시스템 쇼크’를 제작했던 경험을 토대로 자사의 대표작 ‘바이요쇼크’를 만들었다. ‘언리얼 토너먼트’, ‘기어즈 오브 워’로 유명세에 오른 클리브 블레진스키 역시 이 ‘시스템 쇼크’에 영감을 받았다고 전했다.
▲ ‘시스템 쇼크’의 정신적 계승작 ‘바이오쇼크’ (사진출처: blogspot.com)
프로듀서에서 디렉터로 한 단계 더 발전 - 데이어스 엑스
‘데이어스 엑스’는 워렌 스펙터가 디렉터를 맡은 첫 작품이다. 그가 ‘데이어스 엑스’의 초기 아이디어를 구상한 것은 오리진 시스템에서 근무하던 1994년이다. ‘울티마 언더월드 2’를 출시 후, 새로운 타이틀을 기획하던 스펙터는 회사에 ‘트러블슈터’라는 신작을 제안한다. 경찰 출신의 보안 전문가를 주인공으로 한 ‘트러블슈터’는 플레이어가 수집한 정보를 가지고 자유롭게 경로를 결정하고, 인질 구출, 납치범 체포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는 FPS였다. 그러나 ‘트러블슈터’는 위험성이 크다는 회사의 판단으로 인해 사장됐다.
이러한 스펙터가 ‘트러블슈터’를 다시 꺼낸 시점은 루킹 글래스 스튜디오를 관둔 후였다. 당시 그는 2가지 선택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나는 웨스트우드에서 ‘커맨드 앤 퀀커’ IP를 활용한 RPG를 만드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id 소프트웨어에서 퇴사해 신생 개발사 ‘이온스톰’을 차린 존 로메로와 신작을 제작하는 일이었다. 처음에 워렌 스펙터는 ‘커맨드 앤 퀀커’ RPG 제작을 선택했다. 그는 존 로메로에게 걸려온 전화에 웨스트우드와 계약을 마쳤음을 알렸으나, 존 로메로는 ‘단 하루만 주면 당신의 마음을 바꿔놓겠다’라며 마지막으로 스펙터를 붙잡았다.
로메로는 스펙터가 이전에 받아본 적이 없는 가장 큰 규모의 예산과 개런티, 그리고 외부 간섭 없이 원하는 대로 게임을 제작하게 하겠다는 것을 조건으로 제시한다. ‘시스템 쇼크’과 같은 획기적인 게임을 다시 한 번 만들어봐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존 로메로의 의견이었다. 이에 워렌 스펙터는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함께 이온스톰에 입사했다. 만약 여기서 스펙터가 이온스톰이 아닌 웨스트우드를 택했다면 ‘데이어스 엑스’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1994년에 스펙터가 기획한 ‘트러블슈터’는 ‘데이어스 엑스’에 그대로 계승됐다. 여기에 그는 코나미의 RPG, ‘환상수호전’에서 ‘데이어스 엑스’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환상수호전’에는 ‘친구를 구하러 가겠습니까?’ 혹은 ‘아버지와 결투를 벌이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예 혹은 아니오’로 답하는 질문이 있다. 이에 스펙터는 일반적인 도덕 관념에 맞춰 ‘친구를 구한다’, ‘아버지와 싸우지 않는다’를 선택했으나, 이후 스토리를 진행하니 둘 다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결과에 부딪친다. 이 점에서 워렌 스펙터는 게임 밖 세상의 도덕관념이 아니라 게임 안에서 통하는 규칙을 바탕으로 플레이어들이 의미 있는 선택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 워렌 스펙터는 ‘환상수호전’에서 ‘데이어스 엑스’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사진출처: siliconera.com)
‘데이어스 엑스’의 기본 콘셉은 다음과 같다. ‘항상 플레이어에게 명확한 목표를 보여줄 것’, ‘퍼즐을 돌파할 다양한 방법을 마련할 것’, ‘플레이어가 어떠한 선택을 해도 게임 진행이 끊어지지 않도록 할 것’, ‘게임 내 모든 행동을 플레이어가 직접 하도록 하며 NPC의 역할은 최소화할 것’, 마지막으로 ‘플레이어에게 항상 보상을 줄 것’이다. 이러한 초기 기획은 워렌 스펙터가 1997년에 이온스톰에 합류한 후 실제 제작에 들어가며 좀 더 구체화된다. 모든 미션에 여러 가지 해결 방법을 두되, 우선순위에 있는 임무가 무엇인지를 보여줘 목표를 잃지 않도록 돕는다. 그리고 장소에 도달하는 여러 루트를 마련해 플레이어가 원하는 경로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데이어스 엑스’의 콘셉이다.
이를 바탕으로 워렌 스펙터는 개발진들과 함께 약 6개월 간 ‘데이어스 엑스’의 기획에 매진한다. 그 과정에서 RPG 요소인 강화와 스킬 시스템을 추가하기로 결정된다. 또한 워렌 스펙터는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과 같은 실제 사건을 토대로 ‘비밀조직’을 메인으로 한 세계관을 다듬는다. 특히 스펙터가 강조한 부분은 전투 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만드는 것이었다. ‘적을 쓰러뜨려야 한다’를 플레어어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다. 스펙터는 “RPG는 플레이어의 경험이 우선인 장르이며, 디자이너의 설정과 미션은 부차적인 요소다. 개발진이 준비한 해답을 플레이어가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 스스로가 해답을 찾는 게임으로 디자인했다”라고 설명했다.
▲ 다양한 활동을 벌일 수 있는 ‘데이어스 엑스’ (사진출처: giantbomb.com)
‘데이어스 엑스’의 제작은 순탄하지 않았다. 정교한 게임 월드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반응하는 NPC,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오브젝트를 조작할 수 있게 만드는 것 등, 높은 기술력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았다. 제작진이 ‘언리얼 엔진’을 반년 이상 테스트한 것 역시 기획한 콘텐츠를 어느 정도나 구현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언리얼 엔진’을 고른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개발기간을 단축한 것은 물론 게임 속 세계를 기획대로 구현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러나 AI나 대화 스크립트를 처리하는 부분에서는 기술적인 한계에 부딪쳐, 비중을 줄여야 했다. 이 외에도 테스트를 통해 스킬 및 강화 시스템을 보다 사실적으로 구성하고, 완전한 적 캐릭터인 ‘몬스터’를 대거 추가하는 수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데이어스 엑스’는 2000년 6월 26일에 출시됐다. 제작만 따지면 3년, 초기 구상까지 합치면 7년이라는 긴 시간 끝에 세상의 빛을 본 것이다. ‘시스템 쇼크’와 마찬가지로 FPS와 RPG를 혼합한 하이브리드 장르인 ‘데이어스 엑스’는 2052년의 근 미래를 배경으로, 대 테러리스트 기관에서 활동하는 비밀요원 ‘JC 덴튼’을 주인공으로 한다. 이와 같은 설정은 ‘데이어스 엑스’의 초기 기획인 ‘트러블슈터’의 세계관과 주인공의 직업에서 비롯된 것이다.
▲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데이어스 엑스’ (사진출처: gamespot.com)
여기에 게임 진행에 자유도를 부여해 고르는 재미를 강조했다. ‘특정 건물에 들어가라’는 임무를 수행한다면, 적을 쓰러뜨리고 정문으로 들어갈 수도 있지만, NPC를 설득해 비밀통로를 알아내 잠입하는 것도 가능하다. 문을 열 때도 ‘열쇠를 구해 잠금을 풀고 들어간다’는 것 외에도 ‘문 따는 도구를 이용한다’, ‘문을 부순다’ 등 다양한 선택지 중 원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적을 쓰러뜨리는 전투 외에도 해킹, 잠입, 대화 등, 다양한 방법 중 무엇을 선택해도 엔딩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데이어스 엑스’의 특징이다.
‘데이어스 엑스’는 100만 장 이상의 판매를 기록하며 워렌 스펙터를 유명세에 올려놨다. ‘데이어스 엑스’는 메타크리틱(게임 평론 사이트)에서 100점 만점에 90점을 받았으며, 게임스팟이나 IGN 등 주요 언론에서도 후한 평가를 얻었다. FPS와 RPG는 물론 어드벤처, 액션 등 다양한 장르를 성공적으로 혼합한 것, 자유도 높은 게임 플레이, 광활한 월드, 강렬하고 짜임새 있는 스토리라인 등이 장점으로 평가됐다. 워렌 스펙터는 이후에도 이온스톰에서 ‘데이어스 엑스: 인비지블 워’, ‘시프 3: 데들리 쉐도우’의 프로듀서로 활동한다.
이러한 그가 다시 터전을 옮긴 것은 2004년의 일이다. ‘데이어스 엑스’를 퍼블리싱했던 에이도스 인터렉티브가 2005년 2월에 이온스톰을 인수하기 직전의 일이다. 이에 대해 업계에서는 경영진과의 마찰로 스펙터가 퇴사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본인은 ‘개인적으로 회사 밖의 다른 일에 흥미가 있어서’ 이온스톰을 나왔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개인적인 일’은 2007년이 되어서야 베일을 벗는다. 디즈니와의 합작, ‘에픽 미키’가 그 주인공이다. 위기에 빠진 ‘디즈니 월드’를 구하는 ‘미키 마우스’의 일대기를 그린 ‘에픽 미키’에서도 ‘플레이어의 선택’을 중시한 스펙터의 개발철학은 그대로 유지된다. ‘에픽 미키’의 핵심 요소는 ‘마법의 페인트’다. 뭐든지 그리면 실제 물건으로 변하는 ‘마법의 페인트’로 필요한 물건을 자유롭게 만들어 퍼즐을 풀어가는 것이 ‘에픽 미키’의 진행 방식이다.
▲ 워렌 스펙터가 디즈니와 합작한 ‘에픽 미키’ (사진출처: gameinformer.com)
장르 간 혼합, 업계에 새로운 재미를 제시하다
올해 58세인 그는 게임 제작자를 넘어 후학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지난 2013년 5월, 워렌 스펙터는 블리자드의 폴 샘즈와 함께 텍사스 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게임 개발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12개월 동안 20명이 팀을 이뤄 실제로 게임 하나를 완성하는 것이 주 내용인 해당 교육에서 워렌 스펙터는 학생들이 개발은 물론 운영, 관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창조적인 리더쉽을 발휘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목표라고 전했다.
예비 개발자들에게 워렌 스펙터가 강조하는 부분은 ‘게임은 독자적인 예술 분야’라는 것이다. 지난 2013년 3월에 열린 GDC 2013 현장에서 스펙터는 영화의 연출기법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에서 벗어나 ‘게임만의 스토리텔링 기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화와 게임은 서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영화적인 연출기법을 그대로 답습하면 게임의 강점인 ‘상호작용성’이 죽어버린다는 것이었다. 스펙터는 “한때는 ‘게임에는 이야기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오늘날 게임은 사용자와 상호작용하는 역사상 유일한 미디어가 되었다”라고 말했다.
▲ 워렌 스펙터는 후학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사진출처: cubedgamers.com)
워렌 스펙터의 업적은 본인의 작품을 통해 ‘혼합 장르’라는 새로운 영역을 연 것이다. RPG에 시뮬레이션 요소를 결합한 ‘울티마 언더월드’를 포함해 FPS와 RPG의 결합을 최초로 시도한 ‘시스템 쇼크’, 마지막으로 ‘데이어스 엑스’는 FPS와 RPG는 물론 액션, 어드벤처 등의 요소를 혼합해 새로운 영역을 열었다. 즉, 본인이 만든 작품을 통해 ‘장르 혼합도 또 다른 길이 될 수 있다’를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비록 괄목할 흥행기록을 세우지는 못했으나, 그의 작품은 다른 개발자들이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 보다 발전된 게임을 만들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특히 RPG와 FPS의 결합은 ‘시스템 쇼크’가 출시된 후 20년이 넘게 흐른 현재도 업계의 대세로 통하고 있다. 기어박스 소프트웨어의 대표작 ‘보더랜드’는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협동 플레이를 더해 FPS의 기본틀에 MMORPG와 같은 재미를 더했다. 오는 9월에 출시되는 번지의 차기작 ‘데스티니’ 역시 총을 사용하는 1인칭 슈팅에 거대한 오픈월드를 탐험하며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고, 다양한 장비를 모아 캐릭터를 강하게 육성하는 재미를 동시에 제공한다. 즉, 워렌 스펙터가 해온 일련의 활동은 게임이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을 확장하는데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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