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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열전] 게임 트렌드를 주도하는 장르 '롤플레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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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갑갑한 현실을 벗어나 모험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현실에서의 일탈은 여행이나 드라이브 같은 선택지밖에 없지만, 상상 속에서라면 모험의 무대는 무한히 넓어진다. 어릴 적 꿈꿔 왔던 용과 요정이 사는 환상의 세계로 떠나거나, 마왕에게 잡혀 간 공주를 구하는 용사가 되는 꿈. 이러한 사람들의 소망을 대변하는 장르가 바로 RPG다.

RPG는 롤플레잉 게임(Role Playing Game) 약자다. 직역하면 역할수행놀이로, 굳이 게임이 아니더라도 연극이나 심리치료 등에서 널리 쓰이는 단어다.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게임 장르 RPG는 가상세계에서 모험의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진행하는 게임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캐릭터의 성장이나 아이템 수집 등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지만, 필수 요소는 아니다. 사실 이 개념은 거의 모든 게임의 기본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에, RPG 장르적 경계는 매우 추상적이고 범위가 넓다. ‘게임의 꽃’이라고도 불리는 RPG 발전사를 살펴보자.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 [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워게임에서 TRPG를 거쳐 CRPG로


 중세 시대 복장을 하고 모의 전쟁을 즐기는 워게임 문화
(사진출처: urbandaisy.wordpress.com)

RPG 등장 이전, 서양에는 워게임(War Game)이라는 문화가 있었다. 워게임이란 근대 시대부터 시작된 지역사회 축제 겸 놀이로, 수십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고대부터 중세까지 복장과 무기를 갖추고 공터에 모여 가상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1913년 SF 작가 하버드 조지 웰스는 이러한 워게임을 실내에서 소수 인원으로 즐기는 미니어처 게임으로 재탄생시켰다. 이후 워게임은 1953년에 이르러 테이블 위에서 즐기는 보드게임 형태로 간소화되었다. 일명 '테이블 워게임'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버드 조지 웰스와 그가 만든 최초의 테이블 워게임
(사진출처: latabernadelaurana.blogspot.com)

테이블 워게임 열풍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 RPG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던전 앤 드래곤(1974)'이다. 개리 가이각스와 데이브 아네슨이 주축이 되어 개발한 '던전 앤 드래곤'은 그 동안 축적된 수많은 워게임 시스템의 장점을 취합함과 동시에, 검과 마법이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에서 자신만의 아바타를 만들어 모험을 펼치도록 디자인됐다. 특히 모험의 무대를 군대가 아닌 개인과 동료로 한정시켜 몰입도를 더한 점으로 인해, ‘던전 앤 드래곤’은 테이블 워게임이 아니라 롤플레잉 게임(RPG)으로 불린 최초의 게임이 되었다.

'던전 앤 드래곤'은 탐사와 전투를 병행하는 게임 시스템에서부터 캐릭터 레벨이나 체력, 힘, 방어력과 같은 보편적 파라메터를 도입하는 등 여러 모로 현대 RPG의 뼈대가 되었다. 다만 룰 북과 주사위를 가지고 테이블에서 즐기는 게임이었기에, 게임 룰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던전 마스터를 포함해 다수의 인원이 참여해야만 했다. 또한 모험의 모든 과정을 플레이어의 상상만으로 그려야 하기에,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은 아니었다.


 펜과 주사위로 진행하는 TRPG ‘던전 앤 드래곤’ (사진출처: filfre.net - Cory Doctorow)

그러던 중, RPG 업계에 천지개벽이 일어난다. 바로 70년대 후반 들어 개인용 컴퓨터(PC) 보급이 시작된 것이다. 수많은 RPG 팬들은 컴퓨터를 이용해 모든 것을 수동으로 결정해야 했던 게임 시스템을 자동화하고, 상상에만 의존해야 했던 모험 속 풍경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모든 복잡한 계산은 컴퓨터에게 맡기고, 플레이어는 단순한 게임 플레이에만 열중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 이른바 컴퓨터 RPG(CRPG)의 등장이다.


 PC 보급으로 이러한 과정이 모두 자동화되었다 (사진출처: pinterest.com)

초기 아마추어 제작자들에 의해 비상업적 용도로 제작된 CRPG들은 ‘던전 앤 드래곤’ 룰을 디지털로 구현하려는 노력이 주를 이뤘다. 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검은 화면에서 문자만으로 진행되는 텍스트 어드벤처 형태가 많았지만, 그래픽 기술이 도입되면서 비로소 우리가 생각하는 컴퓨터 게임에 비슷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당시 제작된 게임 중 가장 눈에 띄는 세 작품을 꼽자면 바로 '로그(Rogue)'와 '울티마(Ultima)’, ‘위저드리(Wizardry)다.

1980년 출시된 ‘로그’는 캐릭터를 직접 움직여 가며 진행하는 CRPG로, 비록 아스키 부호를 이용한 기초적인 그래픽이긴 했지만 캐릭터를 직접 조종해 던전을 탐험하는 능동적 진행을 도입한 최초의 게임이기도 했다. ‘로그’는 훗날 CRPG에서 사용되는 많은 시스템을 확립시켰으며, 프로그래밍 코드 공개를 통해 수많은 파생작을 이끌어냈다. 이후 ‘넷핵(NetHack)’, ‘모리아(Moria)’, ‘던전 크롤(Dungeon Crawl)’ 등 ‘로그’의 정신을 계승한 게임들이 속속 등장했고, 이러한 류의 게임을 로그-라이크(Rogue-like)라고 따로 칭하기도 한다.


 수많은 로그-라이크 게임을 탄생시킨 초기 CRPG ‘로그’

‘울티마’는 세계 최초의 상용화 RPG ‘아칼라베스’에 이은 리차드 게리엇의 두 번째 상용화 게임이다. 그는 학창 시절 ‘던전 앤 드래곤’을 기반으로 한 CRPG를 서른 개 가량 제작한 바 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79년에는 컴퓨터 판매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아칼라베스’를 개발, 3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아칼라베스’를 통해 CRPG의 사업적 가능성을 입증한 리자드는 이후 대학을 중퇴하고 차기작 ‘울티마’를 개발했으며, 현재 당연시 되는 파티 시스템을 비롯한 수많은 RPG 기본 요소를 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81년 출시된 '위저드리'는 던전 탐험을 주 콘텐츠로 삼은 RPG로, 당시 흔치 않았던 1인칭 시점을 전면적으로 도입했다. ‘위저드리’는 미국과 유럽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크게 흥행했는데, 아래에 서술할 일본식 RPG 등장에도 막대한 기여를 했다. 흔히들 ‘울티마’와 ‘위저드리’, 조금 늦게 출시된 1986년작 ‘마이트 앤 매직(Might and Magic)’을 묶어 3대 고전 RPG라고 부르기도 한다.

위 게임들을 필두로, CRPG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이전까지 ‘던전 앤 드래곤’ 류 테이블 게임을 통칭했던 RPG라는 말은 80년대 이후 곧 CRPG를 통칭하는 단어로 바뀌었고, 테이블 RPG는 별도로 TRPG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렇게 RPG는 컴퓨터와 만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CRPG 토대를 다진 ‘울티마’와 ‘위저드리’ (사진출처: sandiegored.com)

일본식 RPG 등장

미국을 중심으로 서구권에서 RPG가 싹을 틔울 무렵,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조금 다른 형태의 RPG가 탄생했다. 미국식 RPG가 워게임과 ‘던전 앤 드래곤’이라는 원류에서 뻗어 나왔다면, 일본식 RPG는 액션/어드벤처 게임 틀에 ‘울티마’나 ‘위저드리’ 등 초기 CRPG 요소가 더해져 태어난 신생 장르에 가까웠다.

물론 일본에도 컴퓨터 RPG 등장 이전에 워게임 형식의 보드게임이나 장기 등의 문화가 존재했고, 이를 컴퓨터 안에서 구현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결과물이 RPG 형태가 아니라 어드벤처나 턴제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으로 구현됐을 뿐이다. 따라서 일본식 RPG 시작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는 관점에 따라 의견이 크게 갈린다. 다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식 RPG 정체성을 제시한 게임은 단연 팔콤의 ‘드래곤슬레이어’, 그리고 에닉스의 ‘드래곤퀘스트’를 꼽을 수 있다.


 일본 최초의 액션 RPG 중 하나인 ‘드래곤슬레이어’ (사진출처: uvlist.net)

1984년 출시된 ‘드래곤슬레이어’는 같은 해 발매된 T&E의 ‘하이드라이드’와 함께 일본 최초의 액션 RPG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 게임 시장에서 RPG라는 장르를 대중에게 알리는 선봉장 역할을 했다.

이로부터 2년 후 출시된 ‘드래곤퀘스트’는 ‘울티마’와 ‘위저드리’ 등에서 선보인 맵 이동과 전투 시스템을 조합함과 동시에, 캐릭터성과 스토리텔링을 극대화시키는 일본식 RPG의 완성형을 보여주었다. 특히, ‘드래곤퀘스트’가 일본 RPG 업계에 미친 영향은 대단하다. ‘드래곤퀘스트’는 발매 전부터 호리이 유지라는 스타 개발자와 ‘닥터 슬럼프’, ‘드래곤볼’로 스타덤에 오른 만화가 토리야마 아키라의 원화 참여로 가히 사회 현상에 버금갈 만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본격 JRPG 시대를 개막한 ‘드래곤퀘스트’ (사진출처: IMDb.com)

이후 ‘제 2의 드래곤퀘스트’를 목표로 한 작품들이 속속 등장하며 8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일본 RPG 시장은 황금기를 맞이한다. 스퀘어의 ‘파이널 판타지’와 ‘성검전설’, 팔콤의 ‘영웅전설’, ‘이스’ 시리즈를 비롯해 ‘여신전생’, ‘젤다의 전설’ 등 쟁쟁한 시리즈의 첫 작품이 바로 이 때 탄생했다

초기 작품들에서 보이는 일본식 RPG의 가장 큰 특징은 선형적 구조다. ‘D&D’ 등 테이블 RPG에서 파생된 북미 RPG가 플레이어의 자유로운 모험을 강조했다면, 일본식 RPG는 자유도를 최소화 하고 주어진 스토리에 집중하는 전개 방식을 택했다. 자연스럽게 세계관과 캐릭터에 대한 스토리텔링 기법이 강조됐고, ‘게임 오타쿠’라고 불리는 다수의 마니아가 최초로 생겨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드래곤퀘스트’에 이은 대표적인 JRPG ‘파이널 판타지’ (사진출처: contemgames.com)

일찍이 액션과 전략 시뮬레이션 장르의 세례를 받아 온 환경 덕분일까, 일본에서는 캐릭터의 능동적인 행동을 강조한 액션 RPG와 전략성이 요구되는 시뮬레이션 RPG가 특히 인기를 모았다. 90년대까지 일본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하이드라이드’를 비롯해 ‘젤다의 전설’, ‘드래곤슬레이어’, ‘성검전설’, ‘이스’, ‘쯔바이’ 등의 액션 RPG, ‘파이어 엠블렘’, ‘랑그릿사’, ‘삼국지 영걸전’, ‘슈퍼로봇대전’, ‘파랜드 스토리’, ‘용기전승’, ‘샤이닝포스’와 같은 시뮬레이션 RPG가 게임업계 유행을 선도했다.

RPG 원조인 서양 기준에서 볼 때, 일본식 RPG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꽤나 이질적인 게임들이었다. 일부에서는 일본산 RPG에 Japanese을 뜻하는 J를 붙여 JRPG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JRPG는 90년대 중후반 플레이스테이션에서 파란을 일으킨 ‘파이널판타지 7’을 기점으로 한 때는 북미 RPG를 뛰어넘는 수준까지 발전하게 된다.


 팔콤을 대표하는 RPG ‘이스’ (사진출처: gamesdbase.com)


 시뮬레이션 RPG 시대 연 ‘파이어 엠블렘’ (사진출처: nintendo.co.jp)

한국 RPG 발전과 온라인게임의 태동

게임산업이 비교적 늦게 태동한 국내의 경우, 1세대 게임 제작자들이 왕성하게 활동을 펼치기 전부터 이미 미국과 일본에서 개발된 CRPG가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 유입되며 고루 영향을 미쳤다. 그렇게 마니아층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RPG는 1994년 손노리의 ‘어스토니시아스토리’, 1995년 소프트맥스의 ‘창세기전’ 등을 시작으로 차츰 대중화됐으며, 90년대 중반부터 국산 RPG는 일본과 미국 등에서 밟아온 길을 차근차근 습득하며 우리만의 색채를 찾는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국산 RPG가 세계 시장에서 자리를 잡기에는 진입 시기가 다소 늦었다. 국산 RPG가 전성기를 맞이하기 위해 기지개를 켜던 90년대 후반, 불법 와레즈(다운로드 사이트)와 번들 CD 열풍 등으로 인해 국내 패키지 게임 시장은 급속도로 허물어졌다. 시장을 잃은 일부 업체는 해외로 눈을 돌렸으나, RPG계 양대산맥인 일본과 미국을 상대로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기에는 기술을 포함해 많은 부분이 부족했다.

결국 국산 RPG가 찾은 길은 온라인게임이었다. 여러 명이 한 서버에 접속해 같은 게임을 즐긴다는 온라인 RPG 개념은 90년대 초반부터 존재했으나, 시대적,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소수 마니아의 향유물이었다. 그러던 찰나, 신생 개발사 넥슨에서 개발한 ‘바람의 나라(1996)’를 시작으로 ‘영웅문’, ‘리니지’ 등이 흥행에 성공했고, 때마침 불어온 광통신 인터넷과 PC방 보급의 바람을 타고 국내 RPG는 패키지가 아닌 온라인게임으로 방향이 잡히게 된다. 흔히 MMO로 대표되는 온라인 RPG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욱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국산 RPG 시발점 손노리의 ‘어스토니시아스토리’ (사진출처: moneymall.tistory.com)


 국내 최초 MMORPG ‘바람의 나라’ (사진출처: nexoncomputermuseum.org)

하이브리드RPG 시대 도래

1990년대 중반, RPG는 한 차례 격동의 시기를 맞이한다. ‘던전 앤 드래곤’으로 대표되던 정통 미국식 RPG가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나머지 수 년 간의 암흑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울티마’나 ‘위저드리’ 같은 전통 강자들은 시리즈가 전개되면서 초심을 잃고 표류했고, 그 자리는 ‘둠(Doom)’을 필두로 한 FPS나 ‘듄 2(Dune 2)’, ‘워크래프트(Warcraft)’와 같은 RTS 등의 장르가 새롭게 들어섰다.

때마침 ‘파이널 판타지 7’이나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와 같은 JRPG가 전세계적인 대흥행을 기록하면서, ‘던전 앤 드래곤’ 룰을 고집하는 턴제 RPG는 마치 고대 유물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정통 RPG 몰락을 눈치챈 RPG 업계는 이전부터 시도되던 타 장르와 퓨전을 시도했고, 액션이나 FPS, RTS 요소를 섞은 게임들이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당시 시대상을 대표하는 게임이라면 1997년 발매된 블리자드의 ‘디아블로(Diablo)’를 들 수 있다. ‘디아블로’는 던전 탐험과 전투를 모두 실시간으로 진행되게 끔 했으며, 복잡한 전략이나 퀘스트, 퍼즐, 긴 모험 등을 배제하고 오로지 클릭만으로 거의 모든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라이트 액션을 강조했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던 배틀넷을 통한 서비스 지원 역시 유저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액션을 강조한 새로운 형태의 RPG ‘디아블로’ (사진출처: us.blizzard.com)

‘디아블로’ 흥행은 RPG에 새로운 길을 제시해줬지만, 이와 비슷한 게임을 양산시키는 부작용도 낳았다. 특히 정통 RPG 팬들은 이에 반발하고 나섰다. 이러한 팬들의 바람 덕분일까, 1998년 정통 RPG 부활을 알리며 등장한 ‘발더스게이트(Baldur's Gate)’를 필두로 90년대 후반 정통 RPG는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한다. ‘발더스게이트’는 ‘던전 앤 드래곤’ 룰을 현대적으로 해석함과 동시에 자유도 높은 스토리와 시스템, 상호 작용 가능한 세계관을 통해 기존 RPG 팬과 신규 유저 모두를 끌어안았다.

‘발더스게이트’를 필두로 ‘아이스윈드 데일(Icewind Dale)’,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Planescape: Torment)’와 같은 작품들이 뒤를 이었다. 또한, ‘발더스게이트’의 개발사 바이오웨어는 이후 ‘네버윈터나이츠’, '스타워즈: 구 공화국의 기사단', '드래곤 에이지', '매스 이펙트' 시리즈 등을 연달아 제작하며 RPG 명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한편, 이전부터 PC보다는 콘솔 쪽에 힘을 기울여 오던 JRPG는 플레이스테이션과 세가 새턴, 닌텐도64로 대표되는 5세대 콘솔 시대가 열림과 동시에 유례 없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앞서 언급한 ‘파이널 판타지 7’과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는 물론, 전통 강자인 ‘드래곤퀘스트’, 휴대용 RPG 새 장을 연 ‘포켓몬스터’, ‘페르소나’, ‘테일즈오브’ 시리즈 등이 연달아 수백에서 수천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JRPG 위상을 높였다.


 정통 RPG 부활을 선언한 ‘발더스게이트’ (사진출처: toucharcade.com)


 PS 흥행을 이끈 ‘파이널 판타지 7’ (사진출처: finalfantasyviipc.com)

2000년대, JRPG 갈라파고스화와 고품질 그래픽 바람

2000년대로 들어서며 RPG 업계 구도는 또 한 번 바뀐다. 먼저 서구권에서는 ‘발더스게이트’ 시리즈로 겨우 이어졌던 정통 RPG 맥이 거의 끊긴 가운데, ‘디아블로’와 같이 타 장르와 협업을 통한 하이브리드 RPG가 계속해서 출시된다. 특히, 2000년대 하이브리드 RPG는 얼핏 봐서는 어떤 장르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통적인 느낌을 많이 뺀 것이 특징이다.

21세기 RPG를 언급함에 있어 꼭 언급해야 할 게임은 바로 2001년 발매된 락스타게임즈의 ‘그랜드세프트 오토 3(이하 GTA 3)’다. 사실 ‘GTA 3’는 RPG가 아니라 액션 어드벤처나 TPS에 가깝지만,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방대한 샌드박스형 오픈월드를 구현함과 동시에 여태까지의 RPG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자유도를 추구해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이는 RPG나 어드벤처, FPS, 레이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임 장르에 샌드박스형 오픈월드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이어 2000년대 중반에는 고성능 콘솔인 PS3와 Xbox360이 등장했다. 이 차세대 콘솔들은 넓고 정교한 오픈월드 구현은 물론, CD에 담기지 않을 수준의 고성능 게임을 쉽게 구동시킬 수 있었다. 이에 RPG 명가로 손꼽히던 바이오웨어와 베데스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매스 이펙트’, ‘엘더스크롤4: 오블리비언’, ‘드래곤 에이지’, ‘폴아웃3’ 등의 고퀄리티 그래픽을 자랑하는 대작을 쏟아냈고, 거의 매년 ‘올해의 게임 상’을 거머쥐며 새로운 RPG 트렌드를 만들었다.

2000년 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위 작품들은, 게임 기술 발전과 함께 올라간 유저들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많은 자본과 인력이 투입되었고, 중소 개발사가 쉽게 도전할 만한 엄두를 내지 못할 수준까지 이르렀다. 이로 인해 2000년대에는 RPG 장르에서 괄목할 업적을 남긴 게임의 수가 극히 줄었다.


 게임업계에 샌드박스 오픈월드 유행을 불러일으킨 ‘GTA 3’ (사진출처: gta3.com)

한편, 일본 RPG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과거의 타성에 젖어 있었다. 콘솔 RPG 황금기를 연 PS2가 너무 많이 팔린 나머지, 차세대 콘솔 시대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PS2에 머무르는 개발사가 많아졌다. 이들 대부분은 최신 기술을 도입하는 모험보다는 기존 인기작에 새로운 캐릭터와 스토리를 보강하는 안전한 길을 택했고, 그 결과 2000년 이후 출시된 JRPG들 중에는 시스템적 혁신보다는 부가 요소인 성우나 아트워크, 컷씬 등만 발전한 사례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눈에 띄는 발전 없이 기존 마니아층만 끌어안은 JRPG는 일본을 제외한 해외 시장에서 차츰 외면을 받았다. 이른바 JRPG 갈라파고스화라 불리는 현상이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세계 시장을 주름잡던 JRPG는 ‘파이널 판타지’와 ‘젤다의 전설’, ‘포켓몬스터’ 등 몇몇 시리즈를 제외하면 대다수가 일본 내수용으로 전락했다.


 전세계 2천만 장 이상 팔린 JRPG ‘포켓몬스터 Red & Green’
(사진출처: pokepassion.blogspot.com)

RPG에 닥친 또 하나의 과제와 미래

1990년대 후반부터 RPG의 추세는 온라인으로 옮겨간 지 오래다. ‘울티마’를 시작으로 위에서 언급한 명작 RPG 상당수가 온라인으로 무대를 확장하거나 아예 옮겼으며, 싱글 플레이를 위주로 하는 패키지 RPG는 몇 안 되는 유명 작품 외에는 전성기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RPG는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경직된 JRPG라는 틀에서 벗어나기 위한 운동이 거세져 ‘데몬즈소울’ 과 같이 얼핏 북미식 하드코어 RPG처럼 보이는 작품들이 등장했으며, 북미권에서는 일본식 선형 구조를 채용해 스토리성을 강화한 게임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콘솔과 PC 패키지 게임들은 각종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멀티플레이 대전이나 협력 플레이를 지원하며, 모바일 게임 시장에서는 라이트성을 살린 RPG들이 최고 인기 매출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JRPG 색을 완전히 벗어던진 수작 ‘데몬즈소울’ (사진출처: eurogamer.net)


▲ 모바일 최고 인기 장르 중 하나인 RPG

RPG는 게임업계 트렌드에 맞춰 계속해서 변화를 거듭해 왔다. TRPG에서 CRPG로, 정통 RPG에서 하이브리드 RPG로… 그리고, 지금 현재 RPG는 다시 한번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주력 플랫폼이 모바일로 바뀌고, 가상현실 또한 다가오면서 외형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와 내년에 걸쳐 진화될 다음세대 RPG는 어떤 모습일지, 큰 기대를 갖고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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